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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23. 2024

감정도 선택이다. 단, 무엇을 증명하려는지 알아야

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6-7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를 지나 CH2. 나를 해체해보니입니다.

오늘은 CH2 6편'감정도 선택이다'.입니다. 따라서, 지난 글들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결과는 원인이 존재한다. 

즉 원인은 결과로 증명된다.

현실은 과거가 원인이다. 

즉 과거는 현실로 증명된다.

행동은 감각, 감정, 사고가 원인이다. 

즉 이들은 행동으로 증명된다.   

  

자, 이런 근거로

나에게 온 감정은 지금 무엇을 증명하려 온 것일까? 

이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개입, 선택할 수 있을까? 

증명해내려는 결과를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우주에 존재하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감정 이면엔 긍정의 감정이 딱 달라붙어 있다. 

그러니 진짜 감정을 제대로 알려면 양면 모두, 그러니까 

감정 전체를 봐야 한다.      


지난 편에서 예로 들었던 ‘원망’의 경우 원망이라는 단어가 품은 피상적인 것만 보면 억울함, 상대탓과 연결되어 보편적으로 그렇듯이 '아무런 이유없이 당한 피해자'로, 피해자니까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고 나약한 나인 것으로 스스로 규정해 놓았는데 원망을 뒤집어보면 용서? 이해? 사랑? 책임? 나는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변명을 거부하고 관계에 스스로 개입된 장본인으로서 자기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는 강한 내면을 지닌, 너그럽고 관대한 내 안의 자아를 만나게 된다. '원망'이라는 감정은 자기변명을 자각시키기 위해 찾아온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어떤 감정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그 이면까지를 들여다보면 

피상적인 해석으로 선택된 행동과

깊이 있게 내면의 자아가 지시하는 행동은

아마 반대의 결과로 도출될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결과로 증명되는 것이다. 

원인은 같지만 결과가 다른. 

이 사이에는 나의 선.택.이 있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늘 습관처럼 이쪽면만 보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반대면도 들여다보라. 

그러면 이거냐 저거냐 선택할 수 있다.

같은 원인이라도 결과는 원인 이후 선.택.에 따라 달라지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의지다.

선택한다는 것은 방해 요소에 저항하겠다는 의미다.

선택하겠다는 것은 '내면에 존재하는 내'가 '현재 인지하는 나'보다 '더 큰 나'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결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이 날 덮쳐올 때 나는 선택하지 않고 그저 ‘자극’에 ‘반응’해왔다. 기분나쁜 소리를 들으면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생기고 보기 싫은 표정을 보면 괜히 내가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새로운 시도를 앞두고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긴장감에 쩔쩔 맨다. 

‘자극’에 그냥 ‘반응’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응’을 거부하는 선택도 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자극, 원인). ------> 상대가 미워진다(반응, 결과). 
화살표에서 나는 

STOP

을 외칠 수 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자극, 원인) -----> STOP!

나는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감정이 어디로 이동하든 상관없이 나는 의식적으로 멈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상대를 미워할지 외면할지 이해할지 선택하면 된다. 


내 감정은 상대와는 무관하다. 

상대가 어떤 의도를 품었든 관심가질 바 아니다. 

상대에 의해 내게 온 감정을 무시하라는 것이고 관심갖지 말라는 것이다.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어쩌라구?’ 난 기분 안 나빠. 

미운 감정이 왔구나 그래서 어쩌라구? 난 하던 일이나 할래.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자극이 원인이면 반응은 결과다.

같은 원인이라도 결과는 달라진다.


미워하는 부정의 감정을 거부하는 선택을 할 수 있고 미움 이면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긍정감정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사용하면 된다. 나의 경우엔 ‘그래서 어쩌라구?’하며 멈춰서 다른 선택지에 머물며 감정을 머리로 이동시킨다. 현상과 감정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면이 아니라 인정.이다. 


‘네가 나에게 상처줬지?’ 인정. 

‘그런데 어쩌라구? 감정은 알아서 제 갈길을 가겠지.’

나는 멈춰서 다른 감정으로 날 이동시킬 선택의 권리, 자유의 패를 꺼내 쓰면 된다.     


모든 현상에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에도 온 주변이 죄다 코로나로 걱정하고 조심하고 아파했지만 나는 멀쩡했다. 실제 감염자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감염되지 않았다. 딸이 감염됐지만 나는 거뜬했다.      

코로나가 우리집에까지 왔구나(자극) -> 조심해야지, 큰일났네. 뭘 더 신경써야 하지와 같은 걱정(반응)

코라나가 우리집에까지 왔구나(자극) ->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 제 아무리 전염병이라도 내가 끄떡하나봐라(선택한 반응)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내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부정의 에너지를 멈추고 나는 내 안의 큰 내가 외치는대로 ‘나는 끄덕없어’라는 긍정의 에너지로 날 전환시킨 것이다. 이런 사고패턴은 아주 곳곳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지금 이 시간에 주차할 데가 없을걸(자극) -> 다른 곳으로 갈까? 어디로 가지? 와 같은 고민, 탓, 포기(반응)

지금 이 시간에 주차할 데가 없을걸(자극) ->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 가봐. 분명히 차 한 대가 나갈 거야. 그냥 가보자구!(반응)     


시간은 없고 차는 막히고 주차할 곳은 없고..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음직한 소소한 일들. 이런 일이 있을 때 대다수가 짜증, 왜 여길 가자고 했느냐는 원망 등으로 결국, 주차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약속시간은 늦고... 이렇게 일이 진행된다. 그런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거의 이런 일이 없다. 그래서 어쩌라구? 덕이다. 항상 차 한 대가 쑥 빠져나오면서 빈자리를 내준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한다. ‘것봐! 에너지라니까!’라고. 가는 내내 걱정하는 상대에게 나는 ‘분명히 자리 있어. 거기 얼마나 맛있을까?’ 하며 결과를 즐기는 상상으로 짜증, 원망 이면의 감정으로 날 이동시킨다. 부정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나는 감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내게로 온 감정이 무엇을 증명해줄 지의 결과를 믿는 것이다.

     

자, 같은 원인인데 STOP 하나로 결과는 정반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워요, 힘들어요, 그게 가능한가요? 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해 당신 스스로 답을 해보면 어떨까?     


감정이 당신을 찾아와 

무엇을 증명하려는 걸까요?  


원망이라는 감정이 나에게 왔다면 원망은 상대를 가해자, 나를 피해자로 만들며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평생 한탄하는 나를 증명하러 온 것일까? 원망이면의 용서와 이해에 먹이를 주며 오히려 상대로 인해 내가 세상을 알게 되었노라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커다란 나와 조우하는 결과를 증명하러 온 것일까?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과연 자신이 증명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무기력에 빠져서 원망하고 한탄하고 좌절하는 자신인가? 

무기력 이면의 내면의 힘을 들춰내어 자기 인생을 전환시킬 수 있는, 니체가 말한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주1)'인 자신인가?      


어떤 경우라도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과연 감정이 증명하러 온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내가 선택하면 된다. 

자신이 증명하고 싶은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에너지에 힘을 보태면 된다. 

그러면 된다. 

나머지는 에너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에너지는 자기증폭을 해내니까!

 

나를 지배하려는(역으로 말하면 내가 지배되는) 감정을 내려놓고 그 이면의 감정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면 된다. 나는 길을 터주기만 하면 된다. 부정감정 이면에 긍정감정이 딱 달라붙어 있음을 인지하고 부정감정이 내 속에서 난동을 부리더라도 지배당하지 말고 정신을 출동시키면 된다. 그리고 그 이면의 힘쓰지 못하는 긍정감정에게 힘을 보태면 된다. 의식적으로 말이다.


난동부리는 감정이 내게 올 때 의식하고! STOP외치고! 감정(반응)을 선택하고!

이것이 부정감정을 외면하고 ‘자각’의 수준을 높여서 현실에 지배당한 작은 나에게 가려져 있던 내면의 위대한 나를 깨우는 것이며 위대한 내가 맘껏 힘을 부풀려 갈 길을 의식적으로 터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진처럼 6편에 걸쳐 감정에 대한 긴 거론을 했는데 감정의 정체를 정리해보겠다.


첫째, 감정은 야누스와 같다. 

한쪽에는 반드시 상반된 다른 모습이 맞물려 있다.


둘째, 감정은 자가증폭한다. 

또한, 내가 관심두는 쪽이, 집중하는 쪽은 더 빠르게 증폭한다. 


셋째, 감정은 에너지다. 

내가 보낸 에너지는 무한의 자석력으로 무한의 공간에서 동종끼리 만나 무한정 증폭된 상태로 나에게로 다시 온다.


넷째, 감정은 증명하라 요구한다. 

내가 무엇을 증명할지 선택하면 선택된 감정이 스스로 역할에 몰두한다. 


다섯째, 감정의 진가는 나를 자각시키기 위한 것, 자각하는 순간 감정은 사라진다.  

뭐니뭐니해도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저절로 분명하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발생근원은 ‘내가 마음먹은 곳, 내가 힘주는 곳’이 현실이 된다는 사실이다.   


자, 이제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하지 말고

내가 감정을 지배하는 의식적 개입!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자기 자신을 통해 증명해보라!


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15,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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