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16
내게는 무한한 능력으로 신기한 짓까지 해내면서 너무나 대견하고 대단하고 위대한, 다양한 충복들이 있다. 이 충복들이 제대로만 기능하면, 제대로 제 위치에서 자기 역할만 해주면...
나는 대단한 부를 누리는 주인이 될텐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 여럿을 거느린다 해도 적재적소에 써먹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랴. 나는 그런 어리석은 주인은 되기 싫고 되어서도 안된다. 나의 충복들이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썰을 풀기 전에 우선,
나의 육체는 신체, 정신,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미리 전제한다.
신체는 물질화된 모든 것, 눈코입귀손발각종장기등등등을 의미하며
정신은 비물질화된 모든 것, 내 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영혼은 나로부터 분리되어 온세상과 교류하며 날 자극하는 느낌, 즉, 내 감각에 전해주는 모든 자극으로 규정한다.
자, 그럼 나의 충복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이들이 제대로 일은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어디 구석진데 짱박혀 딴청피는 놈은 없는지도 살펴봐야겠다. 다들 막중한 임무를 띄고 나름의 서열도 갖추고 있지만 각자 해야 할 역할들이 달라서 때에 따라 이 녀석을 가장 우위에, 또 다른 때엔 저 녀석을 가장 우위에, 이렇게 지배 위계를 바꿔가는데 그 때 감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면 충복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명시시켜가며 이 과정에서 제 구실 못하는 녀석들을 일깨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 녀석은 태어날 때 아주 근사하게 탄생했음에도 본질 자체가 촐싹맞고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실컷 돌아다니다가 가끔 되돌아오지 못하거나 만신창이가 된 채 돌아와 여럿을 속썩이는 통에 애초부터 몽둥이찜질을 좀 해야 한다.
'맞아야 정신차리지.'
이 말이 딱이다.
몽테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말 안듣는 정신에는 몽둥이찜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제대로 풀어지고 터지며 빠져서 부서져가는 통은 망치로 때리고 두드려서 조여야 한다(주1).'고까지 말했다.
그래도 참 다행은 조금만 혼을 내면 이 녀석의 강한 충성심은 제대로 자극받아 자신의 능력과 역할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성'과 연합하여 스스로 잘 통제하고 조율한다.
왜 정신이라는 충복이 제 위치에 서 있어야 하냐면
첫째, 이 녀석은 감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담아두는 통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녀석은 감정으로부터 그대로 들어온 통속의 구성물들을 제대로 분석, 해석, 검토, 검열, 구분, 분리해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렇게 정리된 구성물질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해 신체로 연동시키기 때문이다.
즉, 정신은 감각으로부터 전해진 감정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동시키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이 녀석이 제 할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신체는 엄한 곳에 에너지를 쏟고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GIGO(Garbage in garbage out).
쓰레기가 들어오면 쓰레기가 나온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그런데 아니다!
이 녀석이 무한의 능력을 발휘하면 이 말이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같은 감정이 정신으로 흘러가도 정신이 제대로 가공, 정돈하면 쓰레기속의 보물을 발견하여 신체로 흘려보낸다. 왜냐? 감정이란 녀석이 모양새가 제 아무리 쓰레기같아도 쓰레기감정이란 건 애초에 없으니까. 정신이 제대로만 기능하면 이 미운 모습으로 온 감정에서조차 그 진가를 볼 줄 아니까. 참...정신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끔 거꾸로 해석해서 말썽이란 말이다.
보물같은 사태와 감정을 넣어줬는데도 쓰레기로 내보내는 몹쓸 짓을 하곤 한다.
보물을 쓰레기로 착각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가령, 불안이 들어오면 이를 좌절감으로 전락시켜 무기력하게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실제 불안이라는 옷을 입은 감정이 투입되더라도 이 녀석이 제대로만 능력을 발휘하면 불안은 과거의 인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자기고집으로 해석하여 오히려 자기변화의 기회가 되도록 신체에 명령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너무 기뻐할 사태와감정을 넣어줬는데도 정신의 나태함과 배신이 출몰하면 기쁜 나머지 이상한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니, 정신이라는 충복만큼은 진짜로 정신차리게 잘 연마시켜야 한다.
정신을 책임지고 훈련시킬 '의식(Consciousness)'은
절대 잠을 재워서도 안되고
아프게 해서도 안되고
어떤 방해요소를 줘서도 안된다.
늘 '깨어있는 의식'이어야만 한다.
이 녀석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를 데리고 논다.
하루 종일 방안에 쳐박아두기도 하고 몇날며칠이고 나돌아다니며 들끓게도 한다.
이 녀석의 골치아픈 문제이자 엄청난 장점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너무 자유로워서 예상도 안되고 통제도 안되고 친구들도 제 맘대로 마구마구 데려온다.
설레임이라는 작은 녀석이 조신하게 놀다가도 열정이라는 녀석과 손잡으면 금새 쾌락의 도가니에 신체를 빠뜨리는 파괴력을 낳기도 하고 눈을 질끔 감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포심이 온마당을 휩쓸고 다니다가 이내 자기 짝인 두려움과 손을 잡으면 신체는 어디 한곳에 짱박혀 이불 뒤집어쓰고 있거나 아니면 건넌방으로 이동, 침묵속으로 침잠하여 오히려 자기내면을 탐색시키기도 하니...
이 녀석은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친구랑 손잡고 노느냐에 충복이 충(忠)을 행할 지 역(逆)을 행할지 너무 다른 결과가 나타나니 말이다.
그러니 감정이란 녀석이 흘려보내는 것을 담는 통, 정신은 이 감정이 어떤 녀석을 업고 들고 매고 달고 오는지 잘 감시해야 할 터이다.
그래도, 이 녀석이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으니 이 녀석은 반드시 필요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주책없이 통속에 마구마구 자신을 밀어넣는다고 해서 정신이 그대로 쑥쑥 들어내거나 드러나게 냅두거나 드러나려는 녀석 다시 들이밀거나 하면 안될 것이다.
왜냐? 감정이란 충복이 이리 정신없게 구는데도 내 가만 냅두는 이유는...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나.의 현실을 제대로 자각시켜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게로 오는 느낌, 감각을 내 속에서 알아채고 내 현주소를 알려주는 매개체가 바로 감정이며 그렇게 전해진 감정은 말 그대로 '지금의 나를 자각'시키기 위해 치장, 분장, 변장, 화장없이 마구마구 그 본성대로 정신의 통에 자신을 들이미니. 감정이 없다면 '지금의 나'를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감정의 널뛰기를 탓하지도 비웃지도 외면하지도 겁내지도 마라.
굳이 그러려면 널뛰기가 본성인 그 녀석이 왜 계속계속 널을 뛰는지의 진가를 이해하고 해석해내지 못하는 정신, 그 놈에게 묻고 그 놈을 단도리해라.
하하 요녀석이야말로 진짜 생각이 없다. 시키는대로만 하는 녀석인데,
이 녀석은 정신의 명령대로만 움직인다.
정신이 힘이 없거나 나태하거나 출타했을 때는 감정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도 하는데 바로 요 타임만 조심하면 된다. 감정이 정신을 거쳐 신체로 가야 하는데 정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이 신체라는 충복은 무조건 방에 가둔 채 문을 잠궈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감정과 바로 손잡아 버려 감정의 명령대로 움직이니 이 때만 조심하면 이 녀석은 그저 정신이 시키는대로 잘 움직일 것이다.
자, 이렇게 나의 충복들의 hierarchy(계급)를 나눠보니 조금 정리가 됐다.
감정-정신-신체의 패턴으로 '나'라는 사람이 움직여지는구나.라고.
그러면,
공허하다. 불안하다. 설렌다. 아린다. 그립다. 싫다. 밉다. 두렵다. 황홀하다. 기쁘다. 벅차다....
왜?
모르겠다. 그저 느낌이 그러니까.
모르겠다. 그저 봤을뿐, 들었을뿐, 만졌을뿐...
그렇다.
감정은 감각이 주체구나.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
모든 기억에 저장된 감각과 세상이 보내는 여러 자극들이 나의 감정으로 밀려드는구나.
이 밀려드는 흔들림이 감동(感動)이구나.
감동이 더 세차게 움직이면 파동이 일고
파동이 무언가와 연결되면 파장이 일고
파장이 더 거세질 때 우리 모두는 전율하며 공명하는구나....
감각이 나의 감정-정신-신체의 연동고리의 근원인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더 민.감.해져야겠다.
아, 그런데 또 가만....
왜 내가 무슨 기억에 대한 공포심에, 무슨 말에, 무언가를 봄으로써, 무엇을 느낌으로써 지금 여기에 사로잡힌 것이지? 왜 내가 지금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지? 무엇이 나에게 이 신호를 준 것이지?
그렇다.
영혼이 나의 보이는 신체, 보이지 않는 감정과 정신의 모체구나.
이 신호를 주는 것은 나에게 하루만 거주하고 99일은 세상을 떠돈다는 나의 영혼이구나.
결국, 내가 민감하겠다는 것은 영혼의 자극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구나.
영혼의 자극. 영혼이 내게 보내는 신호, 메세지...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내 영혼은 어디서 자극을 받는 것이지?
왜 내 충복에게 내 허락없이 자극을 준단 말이지?
누가? 왜? 언제? 어떻게?
이 정체는 무엇이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이 내게 명령한 나의 사명이다.
아... 세상이 나를 창조시킬 때 내게 심어준 그것, 꿈.
나의 꿈이 나의 영혼에게 계속 나를 자극시키라 명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가장 위대한 충복인 영혼에게 아랫 것들이 잘 연동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구나...
꿈은 현재 세상에 없는 것.
하지만, 어떤 힘이 세상을 위해 창조시키려는 것.
그 주인으로 나를 선택해 내게 심어놓은 것.
따라서, 꿈은 어떤 힘의 존재가 자신을 대신해 내게 위임한 과업.
아...
그렇게 나를 통해서 구현해내려고 나를 이리도 체계적이고 조밀하고 긴밀하게 연동시키는 것이구나.
그렇게 구현해내야만 할 새로운 창조, 꿈을 위해 나의 충복들을 이리 아프도록 훈련시키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꿈이 나의 영혼을 자극하고 영혼으로부터 감각-감정-정신-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간절하게, 절실하게.
이 절실함이 나의 정신을 더 정신차리게 해서 나의 손발을 움직여대며 꿈으로 한발짝 더 나가게, 그렇게 어떤 존재의 위업이 나를 통해 이뤄지게.... 그런 것인가!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나'는
'나의 주인인 꿈'의 창조, 즉, 나의 주인인 꿈의 충복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내 신체는 가장 아래서열에서 시키는대로 말없이 수행해야만 하는 시간의 지배자로,
내 감정은 영혼이 보낸 자극을 그대로. 가공없이 느끼어 정신에 전달하는 교신자로,
내 정신은 통에 담긴 감정들을 수정, 삭제, 첨가, 가공하여 곳곳에 명령하는 중앙통제집권자로,
내 영혼은 세상의 의중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대로 내게 전달해야만 하는 내 주인 꿈의 대변자로,
이렇게 정리시켜
나의 주인인 꿈이 나를 위대한 충복으로 훈련시키고 있었구나.
이 전체의 연합에서
꿈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감정의 다른 이름들인 의지와 열정, 투지, 동기, 끈기와 같은 모든 충복들이 긴밀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나면 정신이 이를 받아 신체를 어떤때는 가열차게, 어떤 때는 빨리, 어떤때는 멈추게, 어떤때는 고립까지 명령하는 것이구나.
결국,
내가 기르고자 했던 의지와 열정과 끈기와 집중과 행동력과 판단력과
기타 모든 이성과 감정, 행동기능을 작동시키는 주체는
꿈. 간절함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해본다.
결국,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세상에 발현될 꿈을 위해 어떤 존재에 간택된 충복.
꿈의 설계가 충복인 나의 목표이며
그 목표를 위해 나의 몸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몸은 결국, 꿈의 충복이며
나의 몸을 구성하는 신체, 정신, 감정, 영혼은 꿈의 역할수행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오로지 세상의 창조에 쓰여야 하는 주인아닌 충복으로서의 기능밖에는 없구나.
* 오늘로서 매주 월 5:00 A.M. 발행하던 '이기론'의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주부터 새로운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