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언급한 성공멘탈을 지녔다면 당신은 성공의 운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를 가지고도 단 한 가지!
‘운’이 없으면 성공의 마침표를 찍지 못할 것입니다.
'운'은 수많은 성공 인자를 모두 모아놓은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강한 성공의 핵심코어이며
성공을 위한 화룡점정(畵龍點睛)입니다.
성공을 위한 마지막 점하나!
운!
너는 누구냐?
그리고 너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일단, 운은 신의 선물입니다.
내가 아닌, 신이 가지고 있으면서 내게 줄까 말까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다 해내면 하늘은 그 사람이 뜻을 이루게 행운을 허락한다)’
이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핸들링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뭘 얘기하려는 걸까요?
여기에 분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지요.
칼자루는 신이 쥐고 있지만
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니까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성공으로 이뤄가기 위해서는
운도 내 것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운이 없으면 고생 끝에 낙은 오지 않고 고생만 계속 됩니다.
운은 내가 살아가는 세월 가운데 어느 순간
‘아!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느끼는 기적과도 같은 체험을 선사합니다.
찰나에 벌어지는 그 영험의 경험,
도저히 내 머리로는 추론할 수 없는 퍼즐의 조화.
운은 그렇게 느닷없이, 예기치 않은 찰나에 등장합니다.
'운'은 지금까지 거론했던 모든 성공인자의 합이나 곱보다 더 크게 내 인생을 바꿔버립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 ‘인생론’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세 가지 요소로 분별, 힘, 운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운’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억척스러운 노력은 결국, 노의 역할일 뿐,
즉, 노를 열심히 저으면 조금 더 배가 앞으로 전진하겠지만 순풍이 불 땐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
순풍이 곧 ‘운’이다.
또한, 니콜라스나심탈레브는 실패자, 나아가 무덤에 묻힌 자들도
우리가 익히 성공자의 특성이라고 일컫는 낙관적이고 용기있고 두려워하지 않는 ‘따위 것’들은
다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이것만으로는 안된다! 라며
파올료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등장해 모두를 흥분시켰던 ‘초심자의 행운’까지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편향에 의해 초심자들은 실험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초심자는 진짜 초심자가 아니라 일정 정도 걸러진 자들이라는 거죠.
물론 탈레브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나처럼 성공을 저술하고 강의하는 자들에게 일타를 날린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묘한 쾌감이 듭니다.
일단 논리가 명확해서 반박이 어렵고
나 역시 여러 가지 성공 요인 가운데 운을 으뜸으로 여기기 때문이죠.
어쨌든 그는 '성공자와 실패자를 나누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저 행운(운)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운은 모든 성공인자의 합보다 크며
모든 것을 취했다 하더라도
운이 없으면
실패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대단히 중요한 성공 요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운을 손에 쥔 신에게 간택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신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그 이유대로 살면 되는거죠.
부모나 선생님에게 이쁨받으려면 시키는 것을 제대로,
게다가 더 잘 해내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신이라면 누구에게 선물을 주겠습니까?
당연히 이쁜 짓하는 이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신이 세상에 나를 내보내며 부여한 그 명(命)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가 가장 이쁘겠지요?
그러니 신의 선물인 운을 받으려면 신에게 이쁨받을 짓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구요.
신은 모든 인간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겠지만 일단 신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공표했어요.
모두를 위해 준비했노라고!
하지만, 아무에게나 주지는 않을테니 서로 경.쟁. 하라고!!!
단, 경쟁은 서로간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이 얼마나 공평한 게임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다행입니까?
엄청난 능력자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입니다.
나 자신과만 경쟁하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게다가 내가 엄청난 신의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단, 권리는 의무를 다해야 얻을 수 있기에 내 의무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운은 투자한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내게로 보내는 섬광입니다.
이 섬광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
우리가 무언가에 도전해서 꾸준히 치열하게 집중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노력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치열한 그 과정 어디선가 신은 기적처럼 내 인생으로 개입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누구나 경험해 봤습니다.
요령피지 않고 원하는 곳에 응시했는데 마침 정원미달이었고
이것만 누가 도와주면 완성되는 프로젝트에서 우연히 귀인을 만나기도 했으며
마침 중요한 약속이 겹쳤는데 자연스레 상대가 먼저 스케쥴을 조정하자고도 하고...
이렇게 우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흔하게 접해 봤습니다.
이렇게 운은 예상치 않은 상황에 느닷없이 등장하기에 과학적인 잣대로 논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화해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단어가 이 세상에서 인류와 지속적으로 함께 존재해 왔다는 것은
존재해야만 할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이미 학문적으로는 사회과학의 범주에 진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운을 그저 허황된 바람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 정도로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저도 가끔 포기하고 싶거나 좌절감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행운’이 나에게 오길 바라며 이 단어를 머리속에 콱! 집어넣습니다.
‘신의 테스트!’
그리고 날 설득시킵니다.
‘신이 나의 명을 이루게 하려고 날 테스트하는구나!’
‘분명 그 명은 나에게만 부여한 것이 아닐텐데 내가 여기서 좌절하면 그 운은 남에게로 가겠구나.
어이쿠 정신차려야지’ 합니다!
‘신은 같은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누가 선물당첨자가 될지 점검하겠지?’
‘음, 잘하고 있군. 음. 이 친구는 안 되겠어. 뭐, 이러지 않을까?’
'나를 거쳐 다른 이들을 훑고 다시 한 바퀴 돌아 여전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살피러 오겠지?'
내가 나를 만족시킬만큼 제대로 잘 가고 있다면
‘음. 여전히 잘하고 있군.’,
‘음. 아직도 잘하고 있군.’,
‘음. 이제 선물을 줄 때가 되었는걸!!!!!’.
이렇게 되겠지요?
이렇게 점점 나는 신의 인정을 받으며 선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잠깐 꾀를 부리거나 좌절이나 포기를 하면 신은 이렇게 한탄하겠지요.
‘음, 이제 선물을 주려 했는데, 어이쿠! 안타깝군!’
우습지만 저의 이런 야릇한 사고패턴은
제가 주저앉고 싶을 때,
게으름에 꾀가 날 때,
이번 한 번쯤이야 타협하려 할 때 저를 다시 초심으로 돌려세우는 강력한 멘탈을 갖게 했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요령을 피울 때가 많습니다.
한번 샛길로 빠지면 1번이 2번되고 2번이 3번되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포기해도 되는 정당한 이유'를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야 만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을 거머쥔다는 것은
내 능력이 닿는 한 끝까지 꾸준히 역할에 충실했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그 꾸준함의 과정에서 분명 나의 능력 이상의 우연과도 같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소리치지요.
‘드디어!! 내가 해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거야말로 기적이야!’
‘역시 신은 내 편이야!!’ ‘Oh My God!’
운은 나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의 기적적 개입의 순간인 것입니다.
최진석 교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신명한 통찰력이 생기고
성인의 마음이 따라서 갖춰진다.
우리가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일을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해나가면
통찰력이나 성인 수준의 마음을 갖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러니 성공을 원한다면
운이라는 신의 선물을 받아내느냐 마느냐의 결정적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단, 운을 끌어오는 것은 분명 나의 몫이지만 운을 받을 타이밍은 신이 결정합니다.
우리는 그저 내 역할을 묵묵히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신은 다른 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나를 수차례 테스트한 후
나에게 이렇게 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적임자다! 이 선물은 네꺼다!’
좀 거창하게 얘기가 진행된 것 같지만
여하튼 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해야 할 것들부터 그냥 하면 되는 것이지요.
묵묵히!
꾸준히!
멈추지 않고!
6시에 일어나기로 했다면 그냥 일어나면 됩니다.
일어나서 머리가 멍하고 계속 졸더라도 그냥 일어나면 됩니다.
그렇게 1주일간 멍한 상태로 아침을 보내더라도 일어나면 됩니다.
그리고, 매일 1시간씩 독서를 해야지 하면
책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냥 책을 껴안고 있어야 합니다.
책이 읽혀지든 안 읽혀지든 당분간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적응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게라도 하면 적응이 되거든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습관은 적응을 거쳐 이뤄지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1주일, 2주일, 1달, 2달 반복하면
기가 막히게도 알람 없이 6시에 눈이 떠지고
세상에 그렇게 맑은 정신으로 책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식도,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조차도 내가 통제하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여 조절하고 집중했을 때 얻어지는 신의 선물, 운입니다.
2~3일 일어나 보고는 ‘일어났더니 머리가 멍해. 책도 안 읽어져.’라고 쉽게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입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데 있어 내가 뭐라고 맘먹은 날부터 당장 잘 해낼 것이라고 기대했는지,
늦잠꾸러기가 6시에 일어나려면 며칠을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뭐라고 단 며칠 만에 되니 안 되니를 따진단 말입니까?.
그래서 묵묵히, 꾸준히. 라는 단어를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요.
‘열심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묵묵히, 꾸준히’입니다.
운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지요.
이런 의미에서 좌절과 고통, 시련,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은
신이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내어준 어려운 문제를 푸는 시간이라는 말이 더 명쾌해집니다.
하나를 넘어서면 더 어려운 숙제가 나를 기다립니다.
명품.. 좋아하시지요?
더 어려운 숙제를 해낼수록 선물은 점점 명품에 가까워진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너는 선물 받을 자격이 있니?’
나에게 던져진 신의 숙제.
나에게 온 부정적인 모든 것을 신의 테스트로 여기며 이 테스트만 통과하면...
이렇게 하나하나 합격점수를 받는 기분으로 인생의 게임을 즐겨봅시다.
어떻습니까?
운이란 신의 선물을 내 것으로 만드는,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감이 오는지요?
‘난 항상 운이 없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운을 받을 만큼 대가를 치렀는지.
정작 항상 운이 좋은 사람은 ‘운 타령’하지 않습니다.
아니, 운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느라 운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것이지요.
이런 이에게 운이 찾아옵니다.
원래 간절히 바라는 것은 기다릴 때 오지 않는 법이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기적처럼 옵니다.
운도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품을만한 그릇을 갖추지 못한다면 결코 내게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운은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그저 자신의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는 멘탈이
운을 내게로 가지고 오는 유일하면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선물을 받았다면 이제 누리면 됩니다.
선물이란 일단 상대에게 주고 나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지요.
신의 선물 역시 내게로 넘어오는 순간,
신의 것이 아닌 내 것입니다.
내 것이 되면 맘껏 누리면 됩니다.
운은 내가 주체가 아닌데도 나의 노력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 내가 누리는,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 되는 기가 막힌 성공 요인입니다.
평생을 신이 내게 준비한 선물을 받을 게임을 즐겨봅시다.
단계별로 차근차근. 엄청난 보물이 내게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 보물의 이름은 신의 기적적 개입, ‘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