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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03. 2024

새벽독서 5년째. 저의 새벽을
리얼하게 공개합니다.

'집중'에 대하여


나는 새벽을 좋아한다. 

아니, 새벽독서를 좋아한다. 


'태양이 뜨기 전, 모두가 깨기 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읽어내야 할 책을 읽는 행위의 시간'

새벽이 좋아 독서가 좋아진건지, 독서가 좋아 새벽이 좋아진건지. '새벽'과 '독서'를 따로 떼어내면 그닥 별로인데 '새벽독서'로 단어를 붙이면 그 가치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래서 

새벽독서는 내게 

고유명사다. 


좋아하니 더 오래 누리고 싶어 이미 정해진 것, 가진 것을 버리고 새벽을 늘였다. 저녁 10시경 자고 03경 일어나는, 그래서 비효율적인 밤을 잠에게 주고 집중이 넘쳐 효율이 높은 새벽을 정신에게 주었다. 

집중은 포기를 전제한다.

손에 쥔 것을 놔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사실 이런 패턴은 잘 유지되다가 몇달간 무너져 새벽 4시~4시반쯤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새벽시간이 줄어드니 영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역시 신은 내 편이다. 자신과 타협없이 약속을 지켜내는 분이 새벽독서에 합류하면서 내가 원하는 패턴을 다시 되찾게 된 것이다. 


그녀는 호주에 산다. 타협없는 그녀는 호주시간 새벽5시, 여기 시간 새벽 3시. 어김없이 혼자라도 줌에 접속해 책을 읽는다. 일어나 줌을 켜면 책과 글에 집중한 그녀의 모습에 여러 차례 감동만 받다가... 그래, 다시 해보는거야! 하며 새벽 3시가 다시 내게로 온 것이다.

매일 새벽 3시 반경 그녀와 나

항상 원하면 된다. 내 의지가 약해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느닷없이 된다. 계기가 나에게 오는 것이다. 전세계 그 많은 나라에서 왜 하필 호주이며 왜 하필 호주의 새벽 5시가 여기 새벽 3시냔 말이다!!!!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는 하던 행동에 더 강력한 힘을 요구한다. 따라서, 기존대로 해서는 안된다. 되다 안되다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집중자체에서 또 다른 밀도를 지니게 된다. 집중은 반드시 집중해야만 하는 계기를 만들고 집중못하는 혼란을 거쳐야 얻을 수 있다. 


여하튼, 이렇게 다시 자리잡기 시작한 새벽독서.

내 하루의 모든 에너지는 이 새벽시간에 집중적으로 얻는다.


일어나면 곧바로 이부자리부터 정돈, 양치와 고양이세수 후 7분뒤 씻어내는 얼굴팩을 한다. 피부샵이나 기타 관리는 해본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매일 7분씩만 투자한다. 나이에 비해 주름이 많다거나 얼굴에 뭐가 난다거나 화장으로 가리려 애쓰는 건 모두 싫다. 나는 맑은 피부를 원한다. 그래서, 오장육부가 건강해야 피부가 좋다는, 매일매일 작은 습관이면 따로 시간내지 않아도 된다는 2가지 원칙을 매일 지킨다. 화장도 잘 안하고 이것저것 바르는 것도 귀찮으니 나에게 하루 7분투자는 최선이다. 특별한 노력도 없고 시간도 안들지만 효과는 탁월하다. 사실 지금껏 피부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다. 집중은 무조건 효과를 낸다. 단, 한순간 집중해 끝낼 것이 있고 매일매일 작은 집중이 쌓여야 하는 것도 있고. 


며칠 전부터 1일 '1분 플랭크'를 시도하고 있다. 아직은 3~40초에 무너져 1분을 둘로 나눠 하고 있지만 이 또한 '반복'을 입히면 효과는 끝내줄 것이다. 투자대비 탁월한 효과라면 난 일단 시도하고 반복하고 그렇게 집중을 이끈다.


팩을 붙인 7분간 우리집냥이 개리와 새나의 밥, 물, X을 챙긴 후 테라스에 나가 별을 본다. 매일 본다. 요즘같이 흐린 날엔 모습이 감춰져 있지만 안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니 내가 보면 된다. 별과 나누는 대화는 주로 '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보기엔 어떤지,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나의 일방적인 질문과 당부지만 대화상대가 월등한 존재라 맘놓고 말한다. 보고 듣는 이 없어 우습기도 난처하기도 이상하기도 한 대화지만 맘놓고 맘껏 한다. 


그리고 커피내리며 팩을 씻어내면 하얀 피부에 더 뽀얘진 나를 만난다. 이 만남은 진짜 황홀하다. 스스로 자뻑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런 나에게 살짝, 어떤 때엔 크게 한 번 웃어주고 왼손바닥에 스킨 두방울 펌프! 양뺨을 착착 쳐주면 책상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상쾌한지.. 최고다! 하루에 처음 만나는 나에게 나는 가장 뽀얀 얼굴로 활짝 웃어준다!. 그렇게 오늘도 키워내야 할 나에게 웃음부터 준다. 찌뿌둥한 표정보단 활짝 웃는 표정이 낫겠지?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길이 정해지니까!


3시 2~30여분경. 커피잔을 들고 책상에 앉는다. 내 책상은 10년도 더 된 책상이지만 꽤 넓은 편이다. 이사하며 유리가 깨져 유리없이 그냥 사용중인데 곳곳에 고양이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몇 번 '이놈!' 호통쳤더니 이제는 안한다고 믿지만 책상위 발톱자국이 늘어나는 걸 보면... 뭐, 어쩔 수 없다. 지나고 나서 야단쳐봤자 소용없다. 나는 지난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금에만 집중한다. 모든 것에 그리 한다. 집중은 현재에만 가능하다. 시간과 있는 힘껏 손잡고 지금밖에 없다고, 마치 1시간뒤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날 구속하는 것이다.


녀석들 발톱으로 생긴 홈에 먼지가 끼어 매번 책상에 앉기 전 꼭 물티슈로 책상 위를 닦는다. 나는 정리정돈이 나름 습관이 되어 있는지라 매일 자기 전에 다음 날을 위한 책상세팅이 딱! 되어 있지만 그래도 닦는다. 귀찮아도 닦아버리면 내 정신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는 정리이며 정리는 귀찮다. 하지만, 귀찮은 그것을 해치우면 집중이 제 기능이상의 힘을 낸다.


zoom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 본격적인 '오늘',  '지금'을 시작한다. 나의 새벽독서모임은 5~7시까지 진행되는데 그냥 들어오는대로 zoom을 켜고 각자 추천받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하튼 여유있게 자뻑한 상태로, 깨끗해진 책상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년째 매일같이 반복하는 단기목표와 우주와의 약속을 쓰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권리가 있다.
나는 나의 열정과 포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자격이 있다.
이는 우주가 약속한다.  - 매일 쓰는 우주와의 약속
2019년부터 시작된 나의 작은 목표노트들

목표 3번, 우주와의 약속 3번을 적는데 겨우 2분. 짧은 문장들이라 2분이면 충분하다. 매일 2분으로 내가 어느 과녁으로 활을 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항해를 할지 표류를 할지는 목적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다. 나는 내 인생이 표류하길 원치 않는다. 매일 2분, 그것도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첫 2분의 집중은 여차하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지, 떠돌지 모를 내 인생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항해시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돕는다. 집중은 결과로 가는 길에서의 낭비를 없애준다. 


여기까지 30여분. 

나는 나의

감정과 이성을, 

현실과 이상을, 

내면과 외면을, 

지금과 미래를 

모두 내 것으로 정비한 후 

책상 앞으로 초집중에 진입한다. 


나의 왼쪽에는 커다란 독서대가, 가운데는 노트북이, 오른쪽에는 읽던 책들이, 이 모든 것 뒤로는 평소 자주 들춰야 하는 책들이 놓여 있다. 독서대 옆엔 연필꽂이 대용으로 사용하는, 딸이 사준 세워지는 필통이, 필통에는 매일 사용하는 빨강,파랑,검정 0.28펜과 다양한 컬러와 크기의 인텍스, 인덱스에 쓸 2가지 굵기의 싸인펜이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커피받침이 있다. 뜨거운 커피를 책상에 놓았을 때 아래에 동그라미 자국이 남는 것을 싫어해 커피받침은 나의 기분을 위해 아주 유용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거둬내고 필요한 것들만 채운 것. 집중은 그런 것이다.

사실, 독서대없이 책을 읽다가 몇달 전부터 한쪽에 치워둔 독서대를 다시 꺼내 사용한다. 목에 선명해진 하나, 선명해지려는 또 하나, 두개의 주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행동패턴상 목을 깊이 숙이는 경우가 책볼 때 외에는 별로 없고 주름의 깊이나 위치가 딱 그렇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그렇다. 집중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변화를 이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목디스크때문이다. 내 목은 '거꾸로 C자'다.  10여년전 목디스크는 심각했었다. X-레이 사진을 본 얘들아빠가 '여러 사진을 봤지만 이런 목사진은 처음'이라 했다. 당시 내 목은 1자목을 너머 거꾸로 C자가 되어 목에서 내려오는 신경이 오른쪽 어깨와 팔, 손끝까지 떨게 하며 결국 오른쪽 팔 전체를 못쓰게 된 것인데 그 때까지 병원 한 번 안가고 그냥 파스로 견딜 정도였으니 나는 미련곰탱이 소리를 백만번 들어도 싸다. 


그런 내가 병원을 내 발로 스스로 간 이유 역시 명확했다. 오른팔을 쓰기 위해서다. 아픈 건 참겠는데 불편한 건 도저히 참지 못했다. 노트북사용은 물론, 오른손잡이인 내가 치솔을 손에 쥐지 못해 양치질도 버거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시 사람은 불편이 극에 달하면 절대 하지 않겠다던 짓도 한다. 불편이 도를 넘으면 무조건 집중할 수밖에 없다. 닥치거나 다급한 경우도 무조건 집중이 된다. 하지만 바람직한 집중은 아니다. 


하지만, 수술을 며칠 앞두고 나는 '나 안해!' 해버렸다. 여하튼 병원 싫어하는 성격탓에 수술대신 통증마취주사로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 때 난 알았다. 나라는 사람 참 간사하다는 것을. 너무 아플 땐 뭐라도 하겠다더니 통증이 마취되니 그렇게 계속 살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바쁘다는 사람이 주사 맞으러 1주일에 1번 꼬박꼬박 병원에 가는, 시간없다는 것은 다 핑계다. 집중은 없던 시간도 만들어낸다.


등과 어깨에 맞는 통증주사는 너무 많이 아팠다. 피할 수 없으니 일단 정신집중! 참는 방법말고는 없었다. 침대에 엎어진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힘을 주고 참는다. 내 몸의 모든 힘을 그리 한 곳을 위해 집중해본 적이 있던가. 궁사가 활시위를 당길 때 온 몸과 영혼을 과녁에 집중하듯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선 모든 곳이 다 그 곳만을 위해 존재하게 해야 한다. 많이 아프면 집중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된다. 당하고 나서 알게 되는 어리석음도 함께..


그런데 난 어리석지 않았다. 시간을 돌려도 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 때 수술하지 않길 참 잘했다. 몸은 들어간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행동이 잘못되어 얻은 증상은 잘못된 행동을 거둬내면 다시 원점으로 갈 수 있다. 원인을 알았으니 원인만 제거하면 증상은 없어진다. 이 단순한 원리에 의해 내가 오른팔을 못쓰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책상에 앉는 자세때문이니 이 자세를 바꾸기로 결론내렸다! 물론, 잘못된 자세로 인해 굳어진 이 신체로 증상이 시작되기 전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천만배 힘들고 아팠다. 그래도 길게 가려면 기본부터! 난 스스로 재활하기로 했다. 집중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한 그것을 믿고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정했다. 하루 300번 좌우로 목돌리기. 허리부터 머리까지 꼿꼿이 펴고 앉기, 파워워킹으로 3km걷기를 통증마취주사를 맞는 것과 병행했다. 당시 분당에서 광화문에 있는 학교를 다니던 딸의 셔틀타는 시간이 6시. 아이를 태워보내고 곧바로 파워워킹, 하루 일과를 마치고는 목을 돌렸다. 목을 돌릴 때는 매번 아파서 울었다. 아이들이 옆에서 하나, 둘, 셋하며 숫자를 세주기도 했는데 너무 아파서 아이들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면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아이들은 울면서 목돌린, 목돌리며 운 엄마를 기억하며 웃는다. 집중은 집중시킨 그것을 해내느라 부끄러움도 모르는 바보를 만든다. 집중은 바보처럼 울게 할지라도 반드시 웃는 결과를 선물한다. 


결과는? 수술없이, 물론 지금까지! 통증마취주사는 그 당시 3달정도에 끝. 목돌리기는 1년넘게. 파워워킹은 지금껏 만보로. 지금은 목도 자유롭게 돌아가고 팔도 안아프다. 단, 거꾸로C자인 목이 제대로C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혀 아프지 않다. 단, 자세가 며칠만 흐트러져도 어깨와 오른팔에 신호가 온다. 이런 내가 다시 고개를 숙여 책을 보다니... 한대 쥐어박고 독서대를 꺼낸 것이다. 결국, 고개들고 책읽으려고.


독서대꺼낸 이유가 이리 장황할수가...


4:40여분이 되면 5시 발행을 앞둔 글의 최종수정을 한다. 그렇게 1년 7개월째 새벽 5시 발행. 매일 지켜온 반복된 행위지만 늘 나는 발행 전 기도한다....

어떤 연유로 나에게 왔는지는 모르나 나를 통해 세상으로 보내지는 이 정신의 활자들이 

제 힘을 키워가며 세상 곳곳으로 흩어지길... 

그렇게 어떤 누군가의 인생에 에너지가 되어주길.. 

그렇게 작은 소망담아 '발행'버튼을 누른다. 

5시가 다 되어갈 때쯤이면 독서모임 동료들이 줌으로 한둘 입장한다. 벌써 독서삼매경에 빠진 이도 있고 여하튼 그렇게 자유롭게 자기만의 새벽을 위해 한 곳으로 모인다. 나로 인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지켜주며 함께 하는 최고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주로 2~3권을 돌려 읽는데 얼마전 '키루스의 교육'을 다 읽고 몇년전 재미없게 읽어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꺼내어 다시 읽는데 요즘 나는 니체에 미쳐있다! 너무 감동이고 벅차고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적혀 있어서 새벽마다 심호흡이 필요하다! 몇년전 왜 나는 이 느낌을 갖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집중은 나도 모르는 사이, 반드시 내가 몰랐던 그곳에 '앎'을 선물한다! 이와 함께 '루미시집'을 명상용으로 읽는다. 



책을 읽으며 필서까지는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을 노트에 적는 것을 즐기는 나는 누가 선물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면 볼펜한자루 사달라고 한다. 2000원가량하는, 내게 익숙한 볼펜은 내 손에 잡히는 순간 2주 정도면 수명을 다한다. 볼펜을 잡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처음 새것일 땐 으슥으슥 자연스레 써지지 않았지만 계속 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글씨체도 이쁘게 바꿔주어 계속 그 볼펜만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 다 써서 버릴 때쯤되면 엄청 아쉬워진다. 아! 지금 진짜 잘 써지는데!!! 반복은 집중을, 집중은 편안함을, 편안함은 소중함으로 진화된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영감이나 새롭게 이해된 것들은 곧바로 글의 소재가 되어 메모로 남기거나 죽~써내려간다. 새벽은 오로지 나의 정신이 책과 글 속에 빠져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 나의 집중도는 놀랍다. 측정기로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오후쯤 되면 내가 왜 놀랐는지 알게 된다. 새벽에 밑줄 그은 부분이나 노트한 것, 떠오른 영감에 대한 메모, 새벽에 쓴 글들을 다시 보면 내 능력이상의 것들을 이해하고 써내려간 것이다. 집중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멘탈과 마음가짐이 나약한 나는 환경의 도움으로 내 능력이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시간이 새벽이다. 그 환경을 내가 알아내기까지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도 끝에는 결론이 있고 결론나면 그걸 지켜내면 된다. 그래서 5년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새벽을 지킨다.

물론, 이 시간을 온전히 책과 정신이 계속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날 술이라도 마셨다면 뱃속이 요란하여, 커피중독이라 커피타러, 책이 이해가 안되거나 내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면 테라스에 나가 찬바람도 맞아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인생은 자수와 같다(주). 아이들 어렸을 때는 주로 직접 뜨개질을 해서 옷을 여럿 만들어 입혔었는데 이쁘게 무늬까지 넣은 옷을 완성하면 마지막에 안감을 한다. 뒷면은 실들이 어지럽고 지저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뒷면에 매듭이 하나 성기게 매여 풀리기라도 하면 아뿔싸, 앞면의 무늬가 망가진다. 


어지러운 혼란도 다 제 몫이 있는 것이다. 

일관은 항상 그 이면에 어지러진 것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새벽의 강도높은 2시간의 집중이 그렇다. 가끔 또는 자주 날 방해하는 요소들이 안밖에 있어도 그것 역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라 집중을 위한 혼란이며 정리와 혼란이 함께 병행되는 것이 일관이다. 방해를 당해도 계속 하는 것이 일관이다. 

집중은 집중하지 못하는 그 시간들의 반복을 통해 점점 힘을 키운다. 


집중력. 집중하는 힘이다.

힘의 원리는 연마하면 키워진다는 것이다.

일관을 지키는 시간의 양이 쌓일수록 집중의 힘은 커진다.


집중은 재미없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집중에는 일정시간 엄청난 혼란이 따르지만 이 혼란이 집중으로 가는 길이기에

집중은 재미없던 것을 재미있게, 싫던 것을 좋아하게, 몰랐던 것을 알게, 못하던 것을 잘하게 만든다.


이렇게 집중의 양이 쌓이면서,

집중은 나에게 영원한 놀이 하나를 선물한다.

집중은 몰입으로 진화되고 몰입은 초월된 어떤 세계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즉,

집중은 집중하려는 시간으로만 키워낼 수 있으니 다른 어떤 방법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다시 6시까지 책에 집중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가장 의미와 가치를 두는 시간, 

가장 오래 지속하고 싶은 시간, 

나를 살아있게 하는 시간, 

나를 배우게 하고 나를 흥분시키는 새벽독서시간. 


현재 1년 6개월 가량 진행하고 있는 '매일 만나는' 새벽독서모임은 5~6시까지는 줌을 켠 채 각자 책을 읽고 6~7시에는 자유롭게 나누고 싶은 내용 나누고 나의 피드백 내지 강의로 진행되는데 항상 마지막이 버리이어티하다. 모두가 아쉬워한다. 손하트에 빠이빠이까지, 내일 새벽에 또 만날 것인데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단지 책읽고 대화나눈 것인데 뭐가 그리 벅찬지, 우리는 그렇게 소소한 공간에서 거창하고 찐한 행복으로 가슴을 한껏 부풀린 채 새벽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이제 본격적인 하루로 들어가는 것이다. 독서모임의 집중은 새로운 하루를 매번 특별하게 열어준다.


매일의 축적은 가공할 위력을 갖는다. 5-7시, 24시간 중 겨우 2시간이지만 새벽과 독서, 사람들의 성장에너지로 시작하는 하루가 쌓인다면 이런 이들이 성공하지 않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새벽시간 나는 1분도 허투로 버리지 않고 내 신체와 정신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히, 그것도 매일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 한것은 나의 아들딸을 만난 것이고 2번째 잘한 것은 새벽독서를 만난 것이다.

매일 새벽 6-7시 독서토론

집중은 순간을 100으로 살게 한다. 한순간 집중하고 나머지는 나몰라라가 아니다. 독서도, 글쓰기도, 공부도, 노는 것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하나하나에 100의 진심을 담아 사는 것이 습관이 된다. 


대충 적당한 것들을 열.심.히.하는 1들이 모여 100의 하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좌우할 1 내지 20에 100의 힘을 집중시켜 축을 만듬으로써 하루의, 인생의 전체가 강력한 원심력에 의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며 100의 집합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의식을 새벽에 치르고 나의 평범한 일상은 7시부터 다시 시작된다. 

이제 2/19일이 되면 새벽독서를 시작한 지 딱 5년이 된다.

거의 완벽하게 나의 일상으로 자리한 새벽독서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렇게 6년, 7년...10년이 되면 나는 어떤 내가 되어 있을까...

함께 공부하는 나의 동반자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서 있게 될까...


이 글을 마치는 내 손끝이 살짝... 떨린다... 내 심장과 함께...


주>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 동서문화사


[지담북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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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 연재]

월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화 5:00a.m. ['철학'에게 '부'를 묻다]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금 5:00a.m. [느낌대로!!! 나홀로 유럽]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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