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때엔 더 이상 높이 오르지 못하는 시소가 재미없어 다른 놀잇감으로 갈아타고 싶기도 하다.
이리 여러 감정이 소란을 떨면
내 글은 미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군데군데 곰보인 모양새로 세상에 등장한다.
그러다 감정이 소란을 멈추면
이 역시 여실이 글에 드러난다.
나를 담은 정갈한 모습으로 고이 세상으로 등장한다.
레드카펫위를 사뿐히 조용히 단아하게 그리고, 정성스레 치장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은은한 품격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미끄러지듯 걷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과연, 나는
이 감정의 소란을 정신으로 압도할 수 있을까?
감정이 각도를 잃으면
정신은 온도를 잃는다.
감정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기울어지면
정신은 그것을 바로 잡느라 기온을 상승시켜 열을 내거나
기온을 하강시켜 차갑게 외면한다.
감정과 정신은 늘 내 안에서 내전중인지라
전쟁의 치열함이 가혹하다 싶지만
전쟁이 너 죽고 나 살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구글이미지 발췌
너희들은 단지 정신의 불꽃만을 안다.
그 정신 자체인 모루는 보지 못하며, 또 그 망치의 가혹함도 너희들은 모른다.
(중략)
너희들은 너희들의 정신을 눈구덩이에 내던져본 일이 한번도 없다. 그럴 수 있을만큼 너희들이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찌 눈이 지닌 냉기의 황홀감을 알겠는가.
(중략)
너희들은 독수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너희들은 정신의 경악 속에서 누리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가 아닌 자는 심연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도 안된다.
너희들은 미지근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심오한 앎은 차디차게 흐른다. 정신의 가장 깊숙한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샘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뜨거운 손과 열렬히 행동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청량제다(주1).
언제부턴가 글에 죽자살자 덤벼드는 정신의 고열덕에 나는 쓰러지기와 똑바로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1년 7개월, 650편이 넘는 글을, 그것도 매번 짧지도 않은 글을 써대며 나의 정신은 부숴지다 파닥거리며 일어서다 하늘로 던져졌다 땅으로 내리꽂혔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정신에 맷집이 생긴 것도 느낀다.
아무리 바닥에 쳐박아봐라. 내가 멈추나. 싶은 오기가 생기더니 오기는 기운인지 끈기인지 애매모호한 옷으로 스스로 갈아입고는 결국 기세를 몰아 나를 뜯어고쳐 습관으로 무장시켰다. 습관이 되니 고열에 들끓던 정신은 서서히 열을 내려 차가워진 듯했지만 잠시라도 감정이 각도를 잃는 순간 다시 오르락내리락... 그래도 정신의 온도는 많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오늘 새벽,
위에 언급한 니체의 글에서 내 감정의 각도계의 바늘이 심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감정이 각도를 잃으면
얼음같이 차갑던
정신의 온도가 올라
눈물이 된다.
요즘 또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 나 자신에게 투정이 심하다.
혹 나는
모루를 무시하고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망치의 가혹함은 피하고 불꽃은 튀기고 싶은 오만함이 내 정신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민 것은 아닐까?
독수리도 아니면서 비상을 꿈꾸고 절벽 위 깊은 곳에 둥지를 튼 채 쩔쩔매는 것은 아닐까?
얼음창같이 차가운 앎에 화상입을까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이 눈물의 의미는
네 이빨이 빠지나, 내 살점이 뜯기나 두고보자며 죽자살자 덤비더니 이제 습관이 되었다고 대충 덤비는 나의 빈틈이 내게 발견된 증거이리라.
남들이 줄서는 자리를 내다 버리고 책상앞에 나를 매어놓은 그 단단했던 정신의 줄이 헐거워진 틈으로 나태와 태만의 유혹이 살랑대며 침범한 것의 증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