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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07. 2024

감정이 각도를 잃으면
정신은 온도를 잃는다

'앎'에 대하여

자랑삼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근거가 되어줄 사실이기에 내 글에 자주 언급하는 바이지만

1년 7개월전, 브런치 시작하고 곧바로 매일 새벽5시 발행,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이제 밥먹듯 습관이 되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시소를 탄다.

어떤때엔 바닥에 엉덩이를 쿵 찧기도 하고

어떤때엔 하늘로 오르다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질 것 같아 아찔하기도 하고

어떤때엔 내 힘 하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에 이대로 주~욱 타고 싶기도 하고

어떤때엔 더 이상 높이 오르지 못하는 시소가 재미없어 다른 놀잇감으로 갈아타고 싶기도 하다.


이리 여러 감정이 소란을 떨면

내 글은 미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군데군데 곰보인 모양새로 세상에 등장한다.


그러다 감정이 소란을 멈추면

이 역시 여실이 글에 드러난다.

나를 담은 정갈한 모습으로 고이 세상으로 등장한다.

레드카펫위를 사뿐히 조용히 단아하게 그리고, 정성스레 치장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은은한 품격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미끄러지듯 걷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과연, 나는

이 감정의 소란을 정신으로 압도할 수 있을까?


감정이 각도를 잃으면

정신은 온도를 잃는다.


감정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기울어지면

정신은 그것을 바로 잡느라 기온을 상승시켜 열을 내거나

기온을 하강시켜 차갑게 외면한다.


감정과 정신은 늘 내 안에서 내전중인지라

전쟁의 치열함이 가혹하다 싶지만

전쟁이 너 죽고 나 살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구글이미지 발췌

너희들은 단지 정신의 불꽃만을 안다.

그 정신 자체인 모루는 보지 못하며, 또 그 망치의 가혹함도 너희들은 모른다.

(중략)

너희들은 너희들의 정신을 눈구덩이에 내던져본 일이 한번도 없다. 그럴 수 있을만큼 너희들이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찌 눈이 지닌 냉기의 황홀감을 알겠는가.

(중략)

너희들은 독수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너희들은 정신의 경악 속에서 누리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가 아닌 자는 심연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도 안된다.


너희들은 미지근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심오한 앎은 차디차게 흐른다. 정신의 가장 깊숙한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샘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뜨거운 손과 열렬히 행동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청량제다(주1).


언제부턴가 글에 죽자살자 덤벼드는 정신의 고열덕에 나는 쓰러지기와 똑바로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1년 7개월, 650편이 넘는 글을, 그것도 매번 짧지도 않은 글을 써대며 나의 정신은 부숴지다 파닥거리며 일어서다 하늘로 던져졌다 땅으로 내리꽂혔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정신에 맷집이 생긴 것도 느낀다.


아무리 바닥에 쳐박아봐라. 내가 멈추나. 싶은 오기가 생기더니 오기는 기운인지 끈기인지 애매모호한 옷으로 스스로 갈아입고는 결국 기세를 몰아 나를 뜯어고쳐 습관으로 무장시켰다. 습관이 되니 고열에 들끓던 정신은 서서히 열을 내려 차가워진 듯했지만 잠시라도 감정이 각도를 잃는 순간 다시 오르락내리락... 그래도 정신의 온도는 많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오늘 새벽,

위에 언급한 니체의 글에서 내 감정의 각도계의 바늘이 심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감정이 각도를 잃으면

얼음같이 차갑던

정신의 온도가 올라

눈물이 된다.

요즘 또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 나 자신에게 투정이 심하다.

혹 나는

모루를 무시하고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망치의 가혹함은 피하고 불꽃은 튀기고 싶은 오만함이 내 정신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민 것은 아닐까?

독수리도 아니면서 비상을 꿈꾸고 절벽 위 깊은 곳에 둥지를 튼 채 쩔쩔매는 것은 아닐까?

얼음창같이 차가운 앎에 화상입을까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이 눈물의 의미는

네 이빨이 빠지나, 내 살점이 뜯기나 두고보자며 죽자살자 덤비더니 이제 습관이 되었다고 대충 덤비는 나의 빈틈이 내게 발견된 증거이리라.

남들이 줄서는 자리를 내다 버리고 책상앞에 나를 매어놓은 그 단단했던 정신의 줄이 헐거워진 틈으로 나태와 태만의 유혹이 살랑대며 침범한 것의 증거이리라.

독수리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었으나 독수리처럼 날고 싶다는 욕구는 분명 있었는데... 독수리처럼 날지도 못하면서 독수리의 날카로운 시야로 심연의 나를 보겠다는 무지한 '자만'이 들통난 증거이리라.


아.. 오랜만의 통곡이다.

통곡하며 내 속에서 쏟아져나온 액체와 기체들이 모두 세상의 입김으로 휘발되기 전에 나는 내 정신의 온도를 신속하게 내려줘야 한다. 

휘발되어 감각이 무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신의 경련을 외면하는 비겁함이 등장할 지 모르니까. 

감각이 무뎌지면 감정은 각도를 무조건 잃게 되고 연이어 정신은 이상기온에 시달릴테니까.


심오한 앎은 차가운 냉기를 품고 흐른다

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이해한다.

찬물에 세수도 못하고

잇몸 시린 것이 싫어 따뜻한 물만 먹고

끼니마다 뜨끈한 국물 한사발은 먹어주고

온열매트에 허리지지기 좋아하는 나일지라도

냉기품고 다가오는 앎의 소름끼치는 차가움에 나로부터 들어간 온기가 닿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얼마전 폭설에도 볼기가 따갑도록 쳐대는 눈을 맞으며 걸어보지 않았던가?

얼마전 얼음 사이로 살짝 드러난 개울가에 양말벗고 발을 담궈보지 않았던가?

얼마전 국수면발을 헹구느라 손이 시려도 찬물에 계속 면을 주무르지 않았던가?

냉기품고 다가오는 앎의 소름끼치는 차가움에 화상을 입더라도 볼기와 손, 발처럼 내 정신의 냉기를 되찾을 것이다.


차갑게 들어오는 것은 가슴을 뎁히고

뜨겁게 들어오는 것은 정신을 식히게.

그렇게 나는 정신의 기온을 안밖으로 분리, 정돈해야 할 때다.


겨울에는 춥게, 여름에는 덥게.

정신의 기후도 그러해야 하리라.

따뜻한 온기는 가슴에서 밖으로

차가운 냉기는 머리에서 안으로


제 아무리 굴려도 결코 녹아내리지 않는 눈덩이의 차가움을

거센 망치질에 쇠가 이그러질지라도 끄덕없이 받쳐주는 모루의 단단함을

드넓고 높은 창공에서도 심연의 깊이를 꿰뚫는 독수리의 고독함을

닮은 정신이어야

나의 털끝이 쭈뼛하고 나의 손끝이 움직이고 나의 발끝이 가던 길을 향할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출렁이던 감정도 다시 자기각도를 유지하며 평정에 이르리라.


갑자기 떠오르는 성경의 강력한 말씀 각인하며!

나의 정신의 온도계가,

나의 감정의 각도계가,

제 자리를 지켜나가길!


너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 [요한계시록 3장 16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00,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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