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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14. 2024

궤도를 분절시키지 않으면 전체 궤도를 이을 수 없기에

'글쓰기'에 대하여

시작부터 건방진 얘기지만 나는 참으로 소로우(주1)를 닮았다.

그가 쓰는 글은 전부 나를 위한 글처럼 읽히고 

그의 추구가 나의 추구의 길과 결이 같아서 

나는 그의 일기가 마치 내가 쓴(쓸) 글처럼 느껴진다.


소로우의 책들을 씹어먹듯 읽고 또 읽고.. 

언제든 그가 그리우면 또 펼치고...

나는 소로우와 카페에 마주 앉아 얘기하고 글을 쓰며 그의 정신을 내게 담아 배우고 따르고.. 그렇게 그와 함께 살고 있다고 느낀다.


소로우의 저서들

시대를 초월해 과거의 그가 지금의 나를 이리 데리고 사는 이유는 그가 남긴 글이 우리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죽으면, 소로우와 에머슨, 절친인 이들 사이에 나도 끼워달라고 졸라볼 요량이다. 오래전 읽은 소로우를 지금 새벽독서를 하는 길동무들에게 권한다. 나는 그를 여기저기에 맘껏 소개한다. 


시대, 인종, 환경 모두를 초월해 연결짓는 수단이 있다면 글이 아닐까. 

글속에 담긴 삶이 아닐까. 

삶속에 담긴 자신만의 사상이 아닐까.


무수한 책을 읽고 위대한 기억의 힘으로 제 아무리 정신을 채운들 그것이 자신의 색채를 띈 사상으로 정립되지 않는다면 그저 지식의 탐식일 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글쓰다가 사이사이 나는 성현들에게 묻는다. 

겸허히 묵묵히 나의 길을 가기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를....


그렇게 오늘 새벽 살짝 펼친 소로우.....

아니, 책은 내가 펼치고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어떤 구멍을, 필요를 감지한 영혼이 책앞에 나를 세우고 내게 필요한 그 구절을 펼쳐 보여준다. 


그렇다고 나는 돌다리를 수선하고 있는 저 사람들 옆을 지나가기를 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시(詩)는 없는지, 또 나의 반성의 재료는 없는지 알아볼 것이다. 숲과 들 등 자연의 광대한 모습만을 보려는 것도 일종의 편협함이다. 위대한 지혜는 사람들의 일상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주2).


소로우는 나를 크게 반성케하고 내가 어떤 부분에서 내 삶과 삶을 담은 글이 오류를 행하고 있는지 꼭 짚어줬다. 


나는 사람들의 일상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들이 뭘 먹고 어디를 가고 왜 웃는지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나는 그래선지 사람만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항상 먼저 자리를 뜨거나 대화에서 침묵하거나 애써 자리의 숫자를 채워주는, 그저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나다. 그렇게 남들의 일상에 관심없는 내가 왜 그럴까에 대해 고민해봤지만 해답도 없었고 그저 나는 그런가보다... 고민거리로 남기지 않았는데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소로우가 저렇게 알려줬다.


나는 편협했던 것이다. '고립'을 원해서 그것으로 자위하며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세상 속 어느 언저리에 머물려 했다. 사실, 영원히 그리 살길 원한다. 지금도. 


그렇게 선택한 삶이다보니 내 곁에 머무는 이들에게만 지독하게 관심이 깊고 그들과의 대화에 열을 올리고는 있으나 돌다리를 수리하는 누군가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저 길가에 핀 민들레보다도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눈이 더 날카로워지려면 크게 보려는 시야와 세심한 것을 들여다보는 작은 시선이 함께 필요하다. 모든 것은 무심한듯 연결되어 있다. 무관한 사태와 사물, 그 어떤 것도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을터인데 나는 이들을 들여다보기에 소홀했고 연결지점에 구멍이 나니 나의 사상을 정립해가는 글쓰기에서도 난감한 순간에 자주 부딪히는 것이다. 광대한 것만을 보려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그 접점을 날카롭게 포착해야 하는데....


그렇게 나의 글이 

나와 모두를 연결지어 

공감을 끌어내는 글이라면 좋겠다. 


작은 입속에 숨겨진 혀에서 모두를 위한 소리가 만들어지는 공명의 시선으로

상세한 설명, 서술보다는 추상적인 울림으로 실체를 그려내는 통찰의 시선으로

하나를 묘사하기보다 전체에서 연결된 하나를 포착하는 온전(whole)의 시선으로

대다수가 표현하는 단어가 아닌 내가 창조한 언어로 보편에 스며드는 독자적인 시선으로

적당한 거론이 무방할지라도 그 '적당'이, 읽는 이들의 혼을 떨게 할 수 있는 영혼의 시선으로

나의 글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조금은 다른 곳으로, 조금은 먼 곳으로, 조금은 낯선 곳으로, 조금은 불편한 곳으로 내 다리를 옮겨야 할 필요가 있다. 너무 같은 패턴으로만 지내는 요즘, 내가 '외출'이라는, 굳이 명목이 없어도 '외출'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뭔소리?'라고 반문하겠지만, 나는 내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발길을 내미는, 내 시간을 이.유.없.이. 쓰는 것이 낯선 것이기에 낯선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보려 한다.


분명 나는 

이상과 현실이 먼 거리에 존재함을 안다. 

경박한 삶과 신성한 삶의 거리가 먼 것도 안다.

소소하게 반복되는 일상과 어떤 의도를 품은 인생이 먼 거리라는 것도 안다.

'지금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나'도 자로 잴 수 없는 먼 거리에 서있다는 것도 안다.

무심한 것과 신성한 무관심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정신이라는 것도 안다.


이렇게 먼 거리를 연결짓는 하나의 궤를 이으려먼

궤도를 분절시켜 나아가지 않으면 전체 궤도를 이어갈 수 없다.

이것을 무시하면 저것으로 연결시킬 수 없기에

여기서만 보면 더 큰 시선의 의도를 포착할 수 없기에

일상만 즐기는 편협은 거대한 조화를 담아낼 수 없기에

삶의 궤도에서 지금을, 인생의 궤도에서 사람을, 사람의 궤도에서 현상을.. 그리 담아내어야만 한다. 


점 하나를 바라보더라도 거대한 시선으로부터의 날카로움을 보탠 응시여야

그 점 하나와 우주의 연결을, 그 점하나가 우주의 일체를 위해 존재하는 가치를 담아낼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정신에서 발현되는

주장을 설득으로, 아집을 사상으로 초월시켜 

시선의 경계를 너머 무한한 사상의 바다로 나의 글이 길을 낼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일상에서 작은 일탈을 해보련다.

무관심한 것으로 애써 눈길주고

낯선 것들에 오래 귀를 기울이고

드문 것들을 귀하게 들여다보며

그 것들이 품고 있는 사랑과 아름다움에 내 가슴이 어떻게 진동하는지 나는 느껴보련다.


인생은 하나하나의 행위를 점점이 이은 선, 곧은 자로 줄을 그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도약을 했으냐에 관계없이 그 선은 늘 직선이다. 우리의 인생은 극히 사소한 일을 얼마나 잘했는가에 의해 평가받는다. 인생은 이 사소한 일들의 최종적인 손익 결산이다(주3).


내 시야에 다 담지 못하는 하늘의 시선으로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의 걸음에 찬사를 보낼 것이며

내 시야를 모두 채워버리는 바다의 시선으로 발밑의 작은 물방울의 앙증맞음에 폴짝 뛰어볼 것이며

내 시야에 쏙 들인 저어기 먼 달의 시선으로 옆에 지나가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감동할 것이며

내 시야에 담은 적 없는 땅속 깊은 뿌리 끝에서 돌틈사이 새싹의 강인한 신비로움에 경탄할 것이며

내 시야에 낯설지만 용기담은 시선으로 내 앞에 있는 이의 활짝 열린 치아에 함께 환할 것이며

또한,

내 시야에 단한번 보여진 적 없는 '내 글을 읽는 모두의 시선'으로 내 세포 곳곳에서 꿈틀대는 사소함들을 끄집어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큰 시야에 작은 시선의 날카로움을 담은 글의 창조자이고 싶다.

아니, 매개자이어야 한다.

창조되어야 할 글이 나를 통해 나오고야 마는,

여기와 저기를 연결지어 거대한 하나의 궤를 잇기 위한 작은 점...


그렇게 내가 쓰는 것이 아닌, 나를 매개하여 쓰이는 글이길 바란다.

이를 위해 나는

나의 비옥도를 높여 나의 삶을 도구로 어떤 글이든간에 먹음직스럽게 영글어 누군가의 영혼에 양분으로 흡수되길 바란다. 


소소한 일상 속에 한 순간, 사려깊게... 잠시 나를 멈춰 세우는 것.....

이 작은 시도가 한가함에 젖은 감상의 낭비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 작은 시도로 인해 내 틀이 깨지고 온전한 나의 원석을 드러낼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작은 시도의 끝에 어떤 의도도 없는 오로지 나와 내 글이 일치되는 궤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작은 시도가 전체 궤도의 연결을 위한 분절된 행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은 시도가 '나'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에 필요한 '글'이 탄생되는 한 순간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훌륭한 문장은 어쩌다 우연히 쓰여지지 않는다.

글에는 어떠한 속임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쓴 최상의 작품은 그의 인격의 최상을 나타낸다.

모든 문장은 오랜 시련의 결과이다(주4).


주1> 헨리데이빗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 : 미국 사상가 겸 문학자.

주2,3,4> 소로우의 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1996, 윤규상역, 도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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