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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21. 2024

며칠간 동거한 릴케에게 감사를 전하며.

새벽독서 1800일을 지나며

요즘엔 잠을 많이 설친다. 

더 자려 애쓰지 않는 이유, 잠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잠을 방해하면서까지 내게 알려주고 싶어하는 내지 알아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에 대한 호기심때문이다. 


몇년전 릴케에게 푹... 빠져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요 며칠 니체로 인해 너무 가슴이 뛰는 나는

초연해지기 위해 다시 릴케의 시를 읽었고 

밑줄그으며 읽는 나의 습관대로 내가 그어놓은 글귀들을 따라 다니며 릴케와 며칠 함께 지냈다.


나는 책을 접할 때 항상 작가를 내 곁에 머물게 한다.

이렇게 며칠 릴케와 동거를 한 나는

몇년전 함께 공유하지 못한, 지금의 내 정신과 감동을 보여주고 

수많은 사유를 함께 해나간다.

 

그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가 남성이 아닌 듯하다.     

그의 글 전반에 넘치는 여성성...

섬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 그렇게 아름다운 어휘들이 쏟아지는지지... 

(그렇다고, 남성이 아름답거나 섬세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역시 나의 고정관념일 뿐)  

감탄해마지않는 릴케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그리고 <말테의 수기> 로 만났는데 그의 시가 아직은 내겐 조금 어렵다. 


몇 년전, 로댕이 그에게 '동물원에나 가보시오' 해서 탄생한 그 유명한 시, '표범'에 엄청 감동받고 그 길로 곧장 동물원으로 달려갔었던 나, 그런데 나에게선 아무 것도 탄생하지 않았다. 또한, 지난 10월 로마에 가서도 그가 한참을 서있었다는 아우렐리우스의 기수상앞에 나도 서려 했으나 그러지 못해 내내 안타까웠고..


그래서 나의 꿈 가운데 하나는 죽은 후 진짜 릴케를 만나면 졸라서라도 그의 감성과 이를 표현하는 천재성을 사사받는 것이다. 그리고 릴케에게 로댕같은, 나에게도 그런 이가 꼭 선물처럼 오길 바란다는 것이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로뎅과 1년 살다 헤어진 후 파리에 오면서 대도시의 폐허와 침체에 환멸을 느끼며 수기형식으로 쓴 글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서평이나 그것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적는 것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폐허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수기를 써내는 그의 천재적인 표현력에 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어졌다.      


나도 배우고 싶다.

로댕에게 릴케가 배운 것을 

나도 배우고 싶다.   

  

하나의 생명을 보는 조건을 구비하기 위하여 끈기있게 내면적으로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을,

무겁게 닫혀 있는 사물의 압력에 견디고

경건하게 그 내부에 들어가는 것 (중략)

요설(饒舌)과는 정반대의 침묵 속에서 보는 방법(주1)...    


나도 배우고 싶다.

끈기있게 내면으로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을,

사물의 압력을 견디고 그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침묵으로 보는 방법을...   

  

며칠 전 소로우(주2)와 동거하며 그에게도 나는 약조했었다. 

더 오래.. 깊이 들여다 보겠다고... 

내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너무 무관심했다고..

여기에 릴케까지 보태니...


내 잠을 설치게 하면서까지 이들이 내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더 심연으로 들어가라, 더 오래 들여다봐라, 더 이면에 다가가라는 것일까.

아직도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들에 진동하는 나의 안타까움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일까.

이제는 이면의 것들을 봐도 좋다는 시력이 내게 허락된 것일까.

이제는 피상(皮相)이 아닌 진상(眞相)으로의 시선이 내게 필요하다는 신호일까.


사물과 사태의 단단한 피상을 뚫고 그 속에 감춰진 본질앞에 나는 서고 싶은가보다.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신이 숨겨놨다는 그 배후의 귀결을 나는 알고 싶은가보다.

가장(假裝)한 천사의 열연을 통해서라도 나는 저 위를 응시해 보고 싶은가보다.


한순간의 스케치를 위해서도, 대조적인 바탕이 힘겹게 마련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게 하려 함이라 (중략) 나는 여전히 머무를 것이다. 언제나 볼 것이 있을테니까.(중략)


내가 인형 무대 앞에서 기다려야만 한다면, 아니, 그처럼 강렬히 저 위를 응시해야만 한다면, 끝내 나의 시선을 상쇄하기 위하여, 가장(假裝)을 뒤집어쓴 천사가 거기에 와서 배우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 제 4비가(주3) 

 

이렇게 온통 내 정신이 

내 일상의 세세한 율동들, 나의 시력이 담을 수 있는 세세한 포착들에게 민감하니 나도 이들을 뚫어낸 통찰과 파헤친 감성을 표현해내는 재능을 선물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렇게까지 되고 싶어 안달난 나와 요즘 자주 마주쳐 자주 달래고 자주 독려한다. 


진정 그 때가 되면 

홀연, 홀로 흘러나갔던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다시 스스로의 얼굴에 거두어들이는 거울(제 2비가, 주4)마냥


나에게서 나도 모르게 홀연 흘러나간 나의 아름다움이 다시 거둬질까...  

자연은 내게서 흘러 나간지도 몰랐던 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돌려줄까... 

이토록 간절한 내게서 흘러가버린 시선의 토막과 감성의 파편을 다시 내게 오게해줄까... 


<말테의 수기>를 탈고한 직후 탁시스 부인에게 아드리아 해변의 두이노성에 초대받아 탄생시킨 그의 시, <비가>.


흘러나갔던 아름다움을 다시 자신에게로 거두어 들여주는 대자연과 인조된 모든 것을 '거울'이라는 한 단어에 모두 담아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파했을까...  


아직 그의 정서와 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왜 그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왜 가슴이 아프고 

왜 이 글이 이리도 고마운지...     


그의 형상시집과 기도시집, 그리고 신시집까지.

모두 읽어버리고 싶다.

시적이해가 현저히 부족한 내가, 

읽기는 하겠지만 

가슴으로 이해하기 버거울 것 같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고 싶고 

닮고 싶다.      


<말테의 수기> 마지막 2장을 남겨둔 곳에서 나는 

릴케가 날 유심히 관찰하고 쓴 글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글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나에게 말부터 가르쳐야 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며 그런 글도 꽤나 적었었는데.

릴케가....

날 꿰뚫어본 듯, 날 겨냥한 듯 그리 적어놓은 것이다!


말을 배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놀라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뜻도 없는 짤막한 허위의 첫 문장을 쓰기까지 일생이 걸린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그는 주자가 시합에 나가 뛰듯 이 말을 습득하는 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 뛰는 속도를 지연시켰다. 초보자보다 더 굴욕적인 것은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자의 돌을 발견했으나,

빨리 만들어진 그 행복의 황금을 인내의 납덩이로 바꾸도록 끝도 없이 강요당했다. 

스스로 공간에다 자신을 적응시킨 그는 출구도 방향도 없는 미로를 벌레처럼 기어나가야 했다.


이제 그가 몹시 애를 써서 고통스럽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왔다고 생각한 사랑이 모두 얼마나 부족하고 미미하였는지 드러났다.

그것은 무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일을 하기를,

사랑을 실현하기를 시작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주5).


그와 동거하길 잘했다.

내 곁에 그를 두길 잘했다.

그를 세세히 관찰하길 잘했다.

그에게 나를 드러내길 참 잘했다.


나는 늘 말하고 살았는데나름 말 잘한다 싶었는데 말하기부터 난관이었고

매번 첫문장을 쓰는데 일생이 걸리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나 행복을 인내의 납덩이로 바꾸도록 나는 늘 나에게 강요했으며

책상앞에 나를 붙이고 출구도 방향도 다 가로막아버린,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미로 속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늘 사랑하고 사랑받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라는 단어의 깊이에 대해 이제서야 알게 되는,

어쩌면 여전히 모르고 있는 나와 직면해야 했고 

그렇게 '나의 일'을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그에게 나를 훤히 들켜버려 새벽내내 어찌나 울었던지...

이 글을 다시 펼친 지금도 나는 멍...한 상태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아직도 벌레처럼 글 속 미로를 기고 있는 내가 가여워 가슴이 많이 아파진다.

그의 말대로 '나의 일', '나의 사랑'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거부하고자 하나 거부할 수 없는' 사실에 내가 너무 애처로워 난 자꾸 눈물이 난다.


치고 올라오는 기억들에서 나는 도망치려,

기억도 나에게서 도망치려...

서로를 견제하고 거부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 

나와 나의 경험, 

그리고 감정의 총체인 기억들이 

서로를 마주했고

이제 나란히 손잡고 함께 걸어보자 한다.

나는 나의 기억들과 이제 휴전할 때다.


이는

릴케의 선물이다....


생의 긍정과 부정

죽음의 긍정과 부정. 

이 모두를 일체로 풀어내는 그의 통찰과 예술적 승화는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를 '나와 나의 삶'으로 연결시켜주며 

내게서 회환의 회포를 이끌어내었다.


그는 죽음에 있어서까지 전설을 남겼다.

그가 직접 자작(自作)한 그의 묘비명을 읽으면서 그가 생전에 인식했듯이 두 세계에 걸쳐 존재하며 수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장미의 기꺼운 잠을 자고 있는 그에게     

요 며칠 당신과 함께여서 너무나 황홀했다고,

당신을 글로 접할 때마다 내 언어의 보잘것없음이 한탄스러웠지만

당신으로 인해 나는 언어의 격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당신의 세상에서 당신이 들여다보는 그 특별하게 깊이있는 시선에 난 항상 감탄했다고.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그리 되고 싶다고.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로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

                                     -릴케 자작묘비명(주6)


주1,5,6> 말테의 수기, 라이너마리아릴케, 2005, 민음사

주2> 헨리데이빗소로우 : 미국 사상가 겸 문학자. 월든, 소로우의일기의 작가.

       지난 1/14일 그에 대한, 그리고 그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담은 글을 발행했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848

주3,4>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마리아릴케, 2022, 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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