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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24. 2024

이치에 합당하다면
일은 일이 가는 길을 갈 것이니...

새벽독서 5년째 


내가 주인장으로 있는 온라인카페이름은 

지담북살롱.

책과 글, 코칭으로 결이 같은 이들이 모이면서 

나는 불현듯 오프라인 지담북살롱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해버렸다.  

그렇게 작년 여름, 1주에 1번 정도 양평을 오갔다. 


날이 추워진 지금,

가고 싶어 안달난 마음에 괜히 사진폴더만 뒤적이다가...


양평이, 강물이, 

그 맑은 자연이 

날 맘에 들어할까?

...

...

생각에 잠긴다.

 

계획대로 2025년 지담북사롱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 요량으로 매주 드나들었던 양평,

늘 그랬지만 볼일은 잠시, 거의 반나절을 강옆 벤치에 앉아 글을 썼고


그러다 문득... 

강물에 비친 나무와 하늘과 구름과 새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강가 벤치에 앉아 글쓰다 문득 앞의 강을 보니 좁지만 저렇게 온갖 것들을 강은 다 품었다 내보내고 있었다.


강은 고요하게 제자리를 지킬뿐인데

참으로 많은 것들이 

고요한 강물에 담겼다 떠나갔다.

무심한 강물은 

그렇게 담았다 그렇게 보냈다.     


이 구름에서 저 구름을,

한마리에서 V자로 줄맞춘 여러마리 새들을,

텅빈 하늘만 가득,

그러다 곧

바람이 나무잎을 흔들어

자신의 평온을 깬 요동까지 

모든 것을

담았다 흘려보내며

그저 오가는 모든 것에 참견이 없었다.


늘상 봐왔던 장면이었는데 오늘 그 장면이 떠오르니

내 가슴은 유난을 떤다.     


강물이 나무와 새와 구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나무와 새와 구름이 강물을 지나갔던 것이었다...  

   

강물은 

있는 것을 그대로 담았을 뿐.

담기고자 하는 것에 그대로 자신의 품을 내줬을 뿐,

지나는 것에 그대로 길을 허용했을 뿐.

자기를 그대로 드러낸 채 모든 것을 수용했을 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품은 수많은 생명들을 지키며 

자기 갈길을, 자기 속도로, 그렇게 흐르고 있었을 뿐이다.


강가가 보이는 벤치, 동네 아저씨들 점심식탁을 떡하니 차지하고 노트북으로 글쓰고 있는 나.


외부인이 강가 벤치에 노트북켜고 터줏대감처럼 앉아있으니

집에서 싸온 점심도시락펼치는 마을아저씨들이 함께 한 숟가락 뜨라 했다.

그럴 땐 변죽좋은 나는

좋다고!! 막거리도 한잔 달라고!!

그렇게 막거리를 많이도 얻어마셨지만 취하지도 않던...


그 곳에 지담북살롱을 만들어야겠다 맘먹고 돌아온 이후 

나는 늘 그 곳이 그립다.

물에서 놀다가

아무데나 퍼져앉아 글쓰고 밥먹고 막걸리마시고

그렇게 맘껏 사유할 수 있는 그 곳이 나는 참 좋다...

얼른 여건이 마련되길 바라는 맘 계속 간절해지며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그 곳으로...


즉석에서 따온 깻잎, 고추랑 주섬주섬 싸온 동네아저씨들의 점심식사에 숟가락 얹고 막걸리도 얻어 마시고


원하는 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에게 자기 곁을 허락받으려면

내가 먼저 강에 어울려야 하겠지. 


강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강이 내가 어떻게 더 위대해졌는지 날 지켜보며 대자연의 허락을 구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다시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강을 보라!'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를테면 그들이 보다 위대해졌는지 아니면 보다 왜소해졌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주1).


내가 매일 먹는 생명체들 -깻잎, 고추, 쌀 모두 생명체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에머슨이 말한대로 '보은하지 않는천박한 사람일 수 있으니

그것들을 내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의 양분으로 재탄생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 근사한 모양새로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자기 속의 모든 생명체를 그대로 품고 지키며

지나가는 것들 지나가라 자리내주는 강물처럼

내가 품은 양분으로 새롭게 창조될 것들을 위해

나를 지나가는 모든 것들모든 이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제 길 가는데에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은 그대로인데 강표면이 변화하는.

고요하지만 유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지는.     

나도 강물처럼 일관되고 고요하게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겠다.

내가 고요하고 초연하게 강을 닮아간다면

현상은 나를 거쳐 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지.    

 

현상에 감각을 곧추세울 필요도

내가 어찌 잡아보겠다 힘쓸 필요도

오지 말라 막을 필요도 없음이다.     

강물이 맑다면 있는 그대로를 담을테고

혼탁하다면 오는 것조차 비추지 못할테니

그저 맑게 곱게 강처럼 나를 지켜내고 있어야겠다.

괴테는 '어릴 적부터, 내가 나 자신이나 세상을 바라볼 때의 내적인 성실함이 나의 외모에도 나타나(주2)' 있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제서야 어린 괴테의 지각에 근접하여 나의 외양은 나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외양은

나에게로 온 모든 것들이 지나간 흔적들의 누적.

역사라고 표현하는 그 찰나들의 총합이

지금 나의 눈빛, 말, 글, 손짓, 나의 외적인 모든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담아도 자체정화력으로 스스로 맑음을 유지하는 것이 강인데...

지금 나의 탁도는 내 과거의 결과다.  


나의 자세는.

움직이는 나의 지성과 심성이 어떻게 연합하여 진화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요하면 고요한대로 내 육신의 연합은 무언가를 잡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란하면 요란할수록 내 육신의 연합은 제 아무리 잡으려한들 외면당할 지 모른다.    


지금 나의 외양은 

인간으로서, 나로써 살려 애썼던 애닯은 내 심정의 외현화다.    


일이란 좋은 일, 나쁜 일, 큰 일,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 속두어서는(有) 안됩니다. 이 '둔다', 有자는 한군데 붙어 있고 얽매여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正心(공심), 助長(조장), 計功(계공), 謀利(모리)의 각종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주3).

퇴계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매어있는 것에 대한 차이를 이렇게 풀어냈다. 


내가 양평에 북살롱만들기를 진정 염원한다면 마음이 그것에 얽매이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가고 싶어 안달났음을 느낀 지금, 얽매어 있음을 감지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그 자연에, 그 맑은 강물에 어울리는 내가 되도록 실천하는 것만이 내가 집중해야 할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누가 보든 안보든 강물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있다.

신독(愼獨)이어야 한다.

나 스스로 나를 얼마나 검열하고 정화하고 있는지는

지금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분출물 –말, 글, 표정, 행위- 들이 증명하고 있다.     


실천행위로 드러나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인 것을 말한다기보다 일상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주4). 퇴계가 김돈서에게 주는 서한에 앉고 눕는 자세, 궤좌(跪坐), 위좌(危坐), 언와(偃臥)까지 상세하게 알려준 것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인간이 행하는, 이미 몸에 배어 있는 작은 행동거지, 즉, 몸가짐에는 그 사람의 마음 자세가 모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외적자세한마디로 언행은 나의 지적심적 연합의 드러남이다.

오관(五官)으로 들어온 현상이 가슴으로,

가슴의 진동이 머리의 지성으로, 

가슴과 지성의 주관으로 모든 세포가 반응하는 미세한 움직임은 다시 감각으로,

이 각각의 운동들이 어지럽지도 엉키지도 않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면

이 모두를 주관하는 나의 사상이 내가 원하는 그것을 '실제'로 창조해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그 곳에서의 삶을 위해

나는 강처럼 모든 것에 '열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린 정신과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를 지니더라도

받아들인 것들이 제각각 움직이게 하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마치, 

강물이 미생물부터 암모니아까지 

모든 것을 담아 

움직이는 것들을 조율, 정화하면서도

표면의 고요함을 지독하게 고집하듯


나 역시 나의 통제와 조율을 가미하되. 

나의 가미가 '원하는 바'가 가는 길에 합당하도록 

나의 고요를 고집하겠다는 의미다.

나라는 사람의 본성을 일관되게 지키겠다는 의미다. 

이것이 모두를 열고 모든 것을 담되 

스스로를 혼탁시키지 않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나에게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의 명언이다. 

링컨이 도끼날부터 갈았다는 실천은


나무를 베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수용

주어진 조건 모두를 이해한 지각

그것들을 오로지 받아들인 그의 열린 마음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방향을 지목했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목적하는 바를 위해

시간의 함수 안에서 기본(도끼날을 가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결과를 위한 효율적인 실천이었다.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이 큰 변화이기에

제대로 칼날을 갈아야 한다.

무딘 날에 손을 베이면 베이지, 

제대로 날이 선 칼에 손을 베이는 일은 없다.


'칼날을 간다'의 의미는

왜 날이 선 칼이 필요한지에 대한 목적과

날선 칼이라는 도구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사용할 시기적절함이 모두 연합되었을 때

'칼날을 가는' 행위에 혼이 담기고

'칼날을 가는' 행위가 나의 깊은 뿌리가 되어 흔들리는 바람에도 날 지켜줄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날세운 칼 앞에

우리는 

'서슬이 시퍼런' 기(氣)까지 느낀다.


기본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은 

'서슬이 시퍼런' 경지에 나를 오르게 한다.     


제 아무리 엉뚱하고 기이한 현상들이 오더라도

그 모두를 담아내어 정화시키는 혼란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꼿꼿하고 한결같이 유지시킬 수 있는 기(氣). 

    

무언가를 향한다면

무언가를 갈구한다면

무언가가 간절하다면

나는 '서슬이 시퍼런' 기를 위해

내면의 '칼'을 가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수록

더 길고 깊은 일관으로 기본을 다져야만 할 것이다.

양평에 자리를 정하고 시립도서관의 자료를 다 뒤져 찾아낸 내가 원하는 북살롱 모델(주5)

책과 글과 사유의 결이 같은 이들과 맘껏 사유하며 지낼 수 있는 자연속의 공간.

내가 그리로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나로 나를 만드는 이 시간들.


내면의 칼을 가는 것은 강물이 자기 스스로 독을 없애는 정화를 끊임없이 지속하며 맑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내 속의 독을 제거하며 새로운 창조를 위해 강에 어울리는, 그 자연에 어울리는 내가 되어 그 곳에 내가 '없으면 안되는 존재'로서 나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여 허락하도록 만들어내는 것부터여야 한다.


'실제'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타당'이 근거가 되어야 하며

'타당의 명분'은 '옳은 이치'의 길에서만 용인된다.

'이치'가 자신이 낸 길의 좁은 골목만이라도

나를 그 곳에 어울리는, 타당의 명분을 지닌 자라 판단한다면

내가 원하는 '실제'는 '합당'하게 '적당'한 때에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책과 글과 코칭이 사유라는 수단을 지닌 나를 거쳐가도 

괜찮은 인간으로 나를 만드는 것

그렇게 강을 닮아 

모든 것을 담고 품고 정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외에

내가 달리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치에 합당하다면

일은 일이 가는 길을 갈 것이니...

내가 그에 어울리면 되는 것을...

 


주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00, 책세상

주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와 진실, 2007, 동서문화사 

주3,4> 퇴계선집, 이황 1993, 현암사

주5> 북유럽의 집, 토마스슈타인펠트 외, 2013, 한스미디어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의 찐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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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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