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와 ‘업’에 대하여
새벽독서 모임은 사업가, 예술가, 직장인, 교사, 작가 등 다양한 업을 지니신 분들이 함께 한다. 그 중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고등학교교사가 함께 했었는데 이 분이 책공부를 해야겠다 맘먹은 이유는 '지금껏 교사가 천직인 줄 알았는데 나의 교육관과 너무나 맞지 않다.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 인성이 배제된 채 기계적으로 아이들에게 주입해야 하는 이 교육이 너무 힘들다'였다.
아마 대다수의, 특히 특목고나 외고의 교사들에게 이러한 고민은 더 심하지 않을까.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입시성과를 내야하는 사업가같은 그런 느낌..
얼마전 학과장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정권이 바뀐 후 계속 변화하는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도대체 자기가 교수인지 행정직원인지 모르겠다고, 자신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해는 가지만....
현장에, 최일선의 이들이 조금만 힘을 낸다면(솔직히 말해, 더 정신을 붙들어 맨다면, 더더 솔직한 말로 타협하지 않는다면) 우리, 이 당면한 제도적인, 형식에 얽매인 압박을 조금은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다들 교육탓, 정부탓, 탓탓탓이 길고 많다.
우선, 단어에 대한 독자와의 합의를 위해 아래, 나의 정의를 기본 전제로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보도록 하겠다.
목적은 세상이 나에게 명령한 것, 내 안에 있는 것, 세상이 진화를 위해 원하는 방향.
목표는 목적을 위해 장/중/단기로 구분하여 그 지점에서 나를 통해 드러나야 할 실체
수단은 목표를 향해 걷기 위해 필요한 도구
계획은 수단을 어떻게 이용할지 일정기간 해내야 할 역할 내지 행동강령
스케쥴은 계획을 숫자로 된 시간단위로 쪼개놓은, 그 시간에 내가 서 있어야 할 구체화된 자리.
교사나 교육에 대한 거론을 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지만 언급했던 특목고 교사와 학과장을 예로 들자면,
교사는 교육을 하는 사람이며
교육의 본질, 즉 목적은 외부로부터의 주입이 아니라 '끄집어내는 것'이어야 하며
'학습'을 통해 '공부'를 알려주는 인간육성이어야 한다.
'학습(學習)'은 '익혀서(習)' '배우는(學)' 것. '습(習)'은 깃(우,羽)이 하얗게(백,白)되도록 무수한 날개 짓을 반복하며 이소하는 새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본능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의 신체가 다할 때까지 가야 할 곳으로 향하는 아가새처럼
현실의 가열찬 움직임으로 자신의 길을 본능적으로 떠나게 돕는 것이 '학습'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이 공부(工夫)의 길로 통해야 한다.
'공(工)'은 천(天)과 지(地)의 연결이며 '부(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이러한 업을 가진 자가 교사(敎師)이며 업을 수행하는 수단이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인 것이다.
가르치는 수단에 목적을 담아 목표를 세운다면 충분히 '대학 보내기'나 '취직시키기'를 너머(또는 통해) '인간 육성'을 실현할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렇다.
그 일에는 그 일이 가진 본질이 있다.
그 일이 가야할 길이 있다.
그 일이 일이 되도록 해내야 할 양이 있으며
그 일이 자신에게 부여된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 본질에 자신의 가치를 투영한 것이 자신이 그 일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어야 하며
그에 따라 목표가 정해지고
목표에 의해 계획이 세워진 후
행동이 반복되면
'일이 수단이 아니라 가치있는 나의 삶'이 된다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워라벨(work & life balance)라는 말을 나는 거부한다. 이 단어는 전제부터 일과 삶을 분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하고 있는 이 업에 과연 목적이, 본질이 무엇인지를 혹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 수단과 목적을 헷갈려 하거나 혹은 수단만 남기고 목적은 상실한 것은 아닐까?
또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뽀다구나는 명함 손에 들고 그 수단만 즐기며 목적은 외면해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계획하는 것이 목적의 방향을 향하는지 점검할 능력이 없거나 점검해야 할 필요를 모르는 무지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을까? 가령, 돈이라든가 주변평판이라든가 사회적 서열이라든가...
교육에 몸담은 나부터 우리 모두는 이 질문들에서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벗어난 자신에게는 조금 호된 질책을 스스로 가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여, 벗어난 줄도 모르고 벗어나 있더라도 무지했던 자신을 발견했다면
조금의 용서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비겁하게 그런 자신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몰랐다', '모른다'는 것만큼 근사한 핑계는 없다.
그 뒤에 결코 자신을 숨기면 안된다.
숨는 즉시 정신은 지체할 요령을 피울 테니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보통 취직을 합니다. 즉 '직'을 갖습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그 '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말은 그 '직'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직'은 자신의 '직업'이 됩니다. '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업'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합니다.
직업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찾은 그 역할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간다는 것입니다. '직'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직'과 '업'은 일체가 되지요. 이 말은 자신과 '직'이 일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때 자신은 자신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 직업 안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충족감을 느낍니다. (주).
내가 내 삶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새벽독서를 예로 들면,
새벽독서는 여러 분야의 분들이 '한 번 해볼까?' 하는 탐나는 아이템인 것은 분명하다. 어찌 알고 나와 인연이 닿으면 나는 반드시 1:1로 1시간가량 대화를 먼저 갖는데 1/10정도만이 새벽독서를 시작한다. 시작하지 못하는 데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한 번 해볼까?'로 자신을 자극했던 자신의 목적, 그리고 목표는 금새 '편안함'과 '잡혀있는 질서'에 밀려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책읽을 시간이 없어요!
천만에 읽어야 할 이유가 없겠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요!
천만에 일어나야 할 동기가 없겠지
그런 책을 읽을 능력이 없어요.
천만에 자기 한계에 갇혀서 오히려 편안하겠지
너무 바빠요!
천만에 지금 손에 든 그 무엇도 포기하기 싫은거지.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천만에 어려운 게 아니라 낯선 것인데.
대단한 분들이라 비교될 것 같아요!
천만에 배우려는 사람은 스스로 모른다고 인정한 사람들인 것을.
새벽부터 일어나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아요!
천만에 변화없이는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재앙 곁으로 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
시간을 뺄 수 있게 정리부터 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천만에 당장 일어나는 것조차 시도하지 못하면서 완벽해지려 하다니.
혼자서라도 해볼께요.
천만에 일이 일이 되게 하는 나를 너머선 더 거대한 우주의 힘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겠지.
새벽독서를 원하는 이들을 예로 든 것은 내 최근 경험이 가장 직접적으로 집약되어 녹아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많은 이들이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려' 애쓰고 또 변화하지 못한다.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변화'하게 손을 내밀면 뒷걸음질치고 오히려 '변화할 수 없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아니, 그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 '어쩔 수 없었다'로 비겁한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고는 '자신은 진짜 노력하는 사람인데 어쩔 수 없는, 스스로를 억울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린다.
마치, 가난한 자들이 돈이 많아지면 자신에게 허영심이 들어올까 두려워하듯.
마치, 아기코끼리가 태어날 때부터 묶여있던 말뚝을 어른이 되어 힘이 넘쳐도 뽑지 않듯.
마치, 뚜껑닫힌 비이커 속의 벼룩이 뚜껑을 열어줘도 절대 비이커 밖으로 튀어오르지 않듯.
갈망하지만
갈망만하는
목적있지만
목표는없는
해야하지만
안해도되는
그런 자신이 더 편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통적이다.
시간이 없고 체력이 약하고 능력이 부족해서라 한다.
더 나아가 변화도 계획을 세워서 하려 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다.
안가본 길을 이미 가본 경험으로 재단한 계획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다.
하면서 완벽해지는 것이지 완벽해져서 시작하는 일은 결코 없는데 말이다.
시작을 못하는 이유는 무조건
목적이 없거나 찾지 못했고
목표를 이뤄야 할 이유가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도 더 잘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오류, 그리고 자만때문이다.
나를 매개로 세상에 나가려는 실체다.
나라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발현되어야 할 구체화된 의지다.
나여야만 하는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 체력, 능력 핑계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목표란 나를 통해 세상에 발현되어야 할 창조물이다.
목적은 이 발현된 창조물이 모이는 곳, 세상이 목표로 인해 진화가 증명된 곳이다.
나를 쓰게 해야 한다.
나를 빌려줘야 한다.
나를 소모시켜야 한다.
나를 과감히 내줘야 한다.
세상이 이를 원한다.
세상이 나를 키워주겠다 손내밀고 나를 보호하겠다 약조하며 지금 그 자리에 앉혀두고 지금 무언가를 시도하라고 느낌을 주었는데 내가 그걸 재단하고 계산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손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직업이 무엇이든간에
나를 통해 나오려는 그것을 내가 막으면 안된다.
나여야만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된다.
나밖에 안된다는 명제도 믿어야만 한다.
나를 세상이 원하는 큰 존재로 부상시키는 것은
환상이나 쫒는 망상가라서가 아니라
실제가 그러니까, 인간 개인은 큰 존재니까 그런 것이다.
나는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성장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내 몸을 빌어 이 세상에 드러날 수많은 목표들이 현실화될 것이다. 어떤 업을 가졌든 업에 세상의 명령을, 자신의 가치를 투사해야 한다. 그러면 본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고 거기까지 하면 나머지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나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내 업을 수단삼아 내 안의 것이 세상밖으로 드러나게 할 충분한 자질을 지녔음을 믿어야만 한다. 핑계 뒤에 자신을 숨겨셔는 결코 안될 것이다.
아!
처음 언급했던 그 특목고 교사는 6개월 새벽책공부를 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했었다. "교사가 정말 제게 천직입니다. 이제 영어를 통해 무엇을 전해주어야 할 지 알게 되었습니다. 잘 가르쳤던 영어를 통해 무엇을 전해주어야 할 지 어렴풋이 방향을 잡은 것 같습니다."
바뀐 것은 없다.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기존지식이 다시 질서를 잡았고 질서잡힌 지식의 틈새에 부족한 지식이 들어갔고 그것들이 연결되면서 지성으로 구축되며 가슴뛰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간단한 삶의 공식에서 자칫 중요한 부호 하나를 빠뜨려 엉뚱한 답을 내고 사는 지도 모른다.
많이 배운 자들이 오류에 빠지면서도 오류가 오류인줄 모르고 판단이라 스스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인식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사고를 '이해'라, 인식밖 미지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사고를 '상상'이라, 상상과 이해가 오가며 연합된 사고를 '직관'이라 명명한다면, 인식안에서 이해만으로 판단하는 것도, 상상속에서 감정과 결부되어 판단하는 것도 오류유발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결국, 직관을 따르려면 기존의 인식에 틈새를 벌리고 그 사이에 미지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치를 주입하고 그렇게 혼합된 이성으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이 글을 읽은 모두가 잠시 아니, 조금 오래 시간을 내어 다음 질문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미래에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에게 구하는 동안 자신의 목적과 목표,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똑같은 일상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워라벨은 의미없는 단어임을 알게될 것이다!
주>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2017,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