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크루즈 탑승!
2023. 10. 24
나는 지금 지중해크루즈 11층 선상에 있다. 거대한 공화국이 바다 위에 나를 세워주고 시야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수백대의 질서정연하게 정박된 요트, 다양한 나라-정말 다양한 나라인지는 잘 모르겠다만-에서 모인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여유들이다.
눈을 조금 더 너머로 뜨니 우기가 시작되는 시기에 걸맞게 비가 내렸다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변덕스런 날씨와 지중해의 하늘과 반짝이라는 표현에 절대적으로 들어맞을 듯한 지중해 바다가 전부다.
눈이 부셔 태양을 바라보진 못하지만 나 여기 있노라 온 힘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잔뜩 성이 났는지 힘을 쓰는지 흥을 돋구려는지 아무튼 태양은 뜨겁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불어들이 들린다. 나는?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는다. 나 자신과만 소통중이다. 이 곳에서 한국인은 아주 극소수라 한다. 크루즈사업의 입장에선 절대수에서 한국이 밀린다고 하니 이 배를 타러 한국에서 로마까지 그 먼거리를 오는 것이다.
지중해의 바다는 너무나 반짝이고 여기 노니는 사람들도 반짝거린다.
이라는 우리말표현은 다른 말로 대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두 글자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제대로다. 사람의 표정에서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고 걷다가 음악에 까딱 목만 흔들어도 난 그 사람의 반짝임을 본다. 썬배드에 앉아 남들이 춤을 추든 수영을 하든 개의치 않고 책에 빠져있는 한 백인남성도 반짝이고 재즈악단의 연주에 맞춰 가던 길 돌려 스텝을 밟으며 걷는 남미아주머니도 반짝인다.
보석보다 더 반짝이는 자신을 우리 모두는 지니고 있다. 나에게도 있겠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서둘러 찾고 싶다. 나의 반짝이는 부분을 더 반짝이게... 그리 만들어야지.
지금 내 주변은 비키니만 입고 다니는 이도 있고 가죽점퍼까지 걸친 이도 있다. 나는 그저 청바지에 티 하나. 해가 나를 조준하면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뜨거워지고 해가 나를 외면하면 반팔에 드러난 팔이 서늘하다.
집 테라스에서 보는 하늘이나 여기서 보는 하늘이나 매 한가지, 하늘입장에선 그저 저기는 오른쪽 거기는 왼쪽일텐데 나에게 달리 보이는 것은 내가 서 있는 곳이 나의 사고를 변화시켰기 때문일테다. 공간의 감각적 압축과 시간의 제한된 압박은 사람의 감각과 감정을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힘이 있다.
집 테라스에서 보는 하늘보다 여기서 보는 하늘은 왜 아까운걸까?
친정 해운대에서 보는 유흥과 여기서 느껴지는 유흥이 왜 저것은 환락으로, 이것은 여유로 보이는걸까?
맘만 먹으면 볼 수 있는 동해의 바다와 여기 지중해의 바다가 왜 내 가슴으로 전해지는 타격이 다른걸까?
이는 나의 진화의 속도와 정도를 나보다 억만배나 잘 아는 커다란 존재의 배려인걸까, 외면인걸까?
나는 ‘수영복을 가져올 걸’, ‘맥주나 한잔할까?’하며 과거로, 외부로, 들락날락하는 정신을 감지하며 남들처럼 챙겨오지 못한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마실가듯 그냥 나온다고 한지가 바로 직전인데 화려하고 흥겹고 신나는 현장에서 나만 바보된 것 같고 나만 이방인같고...
암튼... 나에게 평정심.은 아직도 멀었나보다. 싶었지만 순간의 흥분은 순간일 뿐 나는 이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분명 날 변화시킬 것이라 나는 내가 어떤 것을 흡수할지 어떤 것들을 내놓을지 이번 여행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나는 (응급실에서 받아온 진통제를 계속 먹고 있어선지) 아프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뭘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시간과 공간에 날 맡기고만 있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시간도 공간도 나의 정신도 내면도 꽉 차 있는, ‘이상한 느낌’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도, 어떤 공간도, 어떤 시간도 진공상태는 존재치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상한 느낌’이 나를 채운 것인데 나는 그게 뭔지 잘 표현하지 못하겠다. 몰라서 못하는 것인지 어휘를 찾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휘가 없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나는 무언가로 차오르고 있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기 속도로 커나가듯 나는 내가 채워지는 느낌으로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여기서도 늘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나는 지금 내 삶을 메고 지중해 구름위를 걷는 느낌으로 충만해진다.
사실 나는 이런 호화스런 여행을 거의, 아니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지중해라는 위대한 대양 아래 거대한 자본주의의 위력이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 자연색으로 덧칠한 느낌이 살짝 들어 거북하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거나 요란스러운 것이 내겐 좀.. 많이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물론 나는 이 거대한 자본공화국의 위력이 위선인지 모험인지 발전인지 정당인지 잘 모른다. 그저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고 세력이 너무 위대하고 거대하게 비대해져서 감히 지중해의 자연을 논하기보다 이 거대한 바다위의 건설산업에 더 많은 대화가 오가는 인간이 싫다고나 할까...
여하튼 모른다는 것은 관심도 없다는 것이며 관심없다는 것은 어찌되든 내 알바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건너 하나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앞으로도 죽 나는 내 할 일이나 잘하자로 일관될 인간인지라 이를 논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 사람이지만 이런 나의 눈에도 단 1시간만 이 곳에 있어 보니 알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알아지고 보여져서 애써 정신을 털어내야 할 수고를 해야 했다.
거대한 공화국으로 인해 하늘 위, 바다 위 그 곳의 사람들의 대화에서 자연, 삶,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일, 멋, 부가 들어차 버렸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또 다른 사람들...
지금 시대에 분명 피부색이 어떤 기준은 아닐텐데 여하튼 같은 계단에 같은 피부색이 모여 있다.
수영을 하고 춤을 추고 쇼핑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며 웃는 이들,
그들에게 쟁반을 들고 열심히 음료를 나르는 이들,
또 그 옆에서 손걸레를 들고 테이블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
또 그 가장자리에서 짐을 옮겨주는 이들....
이렇게 지불능력을 지닌 한 사람의 편의와 놀이를 위해 줄줄이 이어지는 피부색은 점점 검어진다.
이제 새벽 1시..
크루즈12층 선상으로 올라갔다. 잠을 자야 내일 잘 보내지. 따위의 말이 나에겐 소용없다. 잠오면 자고 안 오면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자다 깨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선상 위의 탑에서는 시끄러운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아래 사람들의 흥이 여전하고 그 아래부터 왕국의 곳곳에는 검은 사람들이 청소하느라 피곤해한다.
바다도 하늘도 온통 너무 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검어서 아무 것도 못 보는 것은 나의 시력의 한계이지 바다속 생명체들은 여전히 움직일테고 별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귀뚜라미 비슷한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다. 자연은 그대로다. 자연의 자리에 인간이 세운 공화국, 그 공화국 안의 여러 계층. 사실 이런 현상도 우리 세상에서 우리끼리 이런 것이다. 거대한 자연은 자기 자리를 침범한 우리에게 임대료없이 자리를 내주고도 저리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 곳에서 유일하게 내가 계획한 것이 있다면 잠시라도 날 위해 고래가 고개를 내밀어주길 바랄뿐인데...
내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라는 수밖에. 계획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지만 유일하고 은밀하게 나만의 계획을 세우는 권리를 미리 포기할 이유는 없다.
마침 여기서 읽는 책이 볼테르여서인지 나 역시 책의 주인공인 거인의 시선(주)에서 나를 바라볼 기회를 갖겠다. 나보다 작은 존재, 귀뚜라미 비슷한 소리를 내는 곤충이 자신의 존재를 이 거대한 바다 위에서 더 크게 드러내듯 나보다 더 큰 존재 역시 내 감각에 포착되지 않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더 큰 존재에게 나는 한없는 미물에 불과할테지만 컴컴한 바다 위 인간이 세운 거대왕국에서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귀뚜라미가 자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듯이 나 역시 나의 존재를 지금 있는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는 중이다.
내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나만이 내지를 수 있는 소리를 지니고 있다. 장미에게서 향을 뽑아낼 수 없듯 비슷한 모양의 인간들 사이 나의 존재에는 나만의 향이 분명 존재한다. 그 향을 내뿜으며 산다면 나도 귀뚜라미의 자신감 정도는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 묵묵히 이 배의 언저리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고래정도의 본성은 드러낸다고 하겠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듯 거대왕국은 지중해를 달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춤추는 사람들도 비쩍 마른 채 수영장 청소로 하루를 버는 검은 이들도 모두 어딘가로 나가는 중이겠지. 고래도 귀뚜라미도 그들도 나도 각자의 길로 나아가는 중이겠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엉킨 것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잘 모르련다.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조화라 하니.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정치부터 종교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위계와 그저 자기 존재를 내보이는 자연의 단순한 위대함의 공존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어떤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으면 다른 세상에는 반드시 자기 자리가 있다고 하니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니까.
나는 남들이 모두 관심갖는 것에 무심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시차, 날씨, 놀거리, 살거리 등이 지금 나에겐 무심하다. 지금 내가 몇시간째 깨어 있는지..아마 36시간은 넘은 듯한데... 잘 모르겠다. 여기서 뭘 하고 놀까, 뭘 살까에도 도통 무심하다. 시차야, 그냥 불변의 시간에 가변의 내가 맞추면 되지 미리 요리조리 적응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이 지금 몇시 건 여기가 낮이면 깨있고 밤이면 자면 된다. 돌아가서도 마찬가지다. 놀거리 살거리도 그렇다. 함께 놀자는 이도 없지만 거기까지 간 김에 이거해라 저거해라에 나는 관심두지 않고 괜한 선심으로 여행다녀온 티를 낼 선물을 살 생각도 없다. 안주고 안받는 게 젤 편하지만 꼭 주고 싶은 것은 돌아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서 주면 된다. 이번 여행의 목적을 ‘나홀로’ 나만의 시간을 공간이동하여 더 깊이 가져보게끔 그리 흘러온 것이니 나는 목적에 충실하면 되겠다.
나의 무심은 지금 이 거대왕국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 행선지를 모른다. 여행하면서 오늘의 스케쥴을 모른 채 그냥 데려다 놓는 그 자리로 공간이동만 되었을 뿐 나는 그 곳의 새로움을 맘껏 느끼려는 의도밖에 없다. 검색으로 미리 알아가거나 뭘 해야 한다는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어디를 가는지 정도는 알려할 줄 알았는데 나는 그런 인간조차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말 무심하게 무관하고 집요하게 목적지향적이다. 내 목적에 어울리는 것에만 모든 관심과 정신과 감각을 쏟는 그런 인간. 이번 목적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니까.
'모름 내지 알려하지 않음'이 더 강렬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기본모티브라 여긴다. 알려 하고 알아야 하고 알고 싶은 욕구를 잠시 내려놓는 것 자체가 새롭게 다가올 것에 미리 인식의 때를 묻히지 않고
를, 그러니까 그것 자체가 오롯이 온전한 모습으로 내게로 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새로움이다.
나의 새로운 행선지와 마주칠 현상들이 나에게는 ‘진짜’의 모습으로 오게 하고 싶다. 아니, 진짜로 오겠지, 내가 그것의 진짜의 진가를 보도록 기존의 나를 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나에게 올 시간과 현장과 현상이라는 새로움이 어떤 막도 치지 않은 상태에서 내게 당도케 하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진 최고의 권리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가 이제 거의 중독수준임을 느낀다.
은 강박이다.
강박은 집중이며
집중은 집중외의 것에 대한 외면이다.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여기에서 어떻게든 글을 쓰려 빈틈을 파고든다. 그저 가볍게 다녀도 될 일인데 언제나 나의 어깨에는 노트북과 책이 들려 있다. 열정, 의지 그런 건 없다. 중독이다. 그래서 너무 편하다. 마약쟁이가 마약을 맞지 않으면 정신을 못차리듯 나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너무 좋다!. 핸드폰 하나 달랑 들어가는 가방을 들어본 지는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다. 낙타가 앞무릎 꿇어 등에 짐을 싣듯 허리굽혀 양쪽 어깨에 책가방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훨씬 익숙하고 훨씬 맘이 안정된다. 나는 그리 되었고 그것이 좋으니 그럼 된 것이다. 여기 로마에, 지중해크루즈에, 11층 선상에까지 와서 이 자유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채 선배드에 청바지 입은 채로 앉아 ‘지중해야 나에게 더 큰 에너지를 다오’하며 책과 노트북을 펼치는 것이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내가 자꾸만 좋아진다.
‘내가 뭐 거창한 작가도 아닌데 이런 생각까지?’ 싶다가 이런 이유로 난 위대한 글을 쓰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짝 다가와 'stop'을 외친다. 위대한 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왜 두려움으로 오지? 위대해지려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나는 ‘글의 힘’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 역시 힘있는 글을 쓰고 싶고
그러한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대한 힘으로 발휘되길 바라고 있었나보다.
나의 창조가 세상에 아주 긴요하게 필요한 것이 되길 바라나보다.
아니, 그 필요에 충족되는 내가 되길 바라나보다.
충족이유가 제대로 정당하고 타당한 내가 되길 말이다.
이 소망이 너무 강렬한가보다.
힘은 반복하면 무조건 키워진다.
지금 없어도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면 무조건 근육이 생긴다.
정신의 힘도, 글쓰는 위력도 그렇게 '반복'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니
나는 내 글이 어떤 순간 힘을 지니게 됨을 믿는다.
나, 나의 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반복의 힘으로 글이 힘을 지닐 것을 믿는다.
나는 어디서든 현상 이면을 읽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정신 스스로가 연마되어 가고
나는 어떤 때든 주변 모두에 커튼을 치고 나를 고립시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에 초집중할 수 있도록 이성이 훈련되었고
나는 누구와 있든 상대와 내가 대화의 질과 결이 다르다면 웃으며 나의 정신과 감정이 낭비되지 않는 진정한 배려에 이제 숙련되었다.
지금 여기서, 이 순간. 나는 내가 아주 많이 단단해졌음을 체감한다.
자잘했던 좌절이나 작지만 힘겨웠던 고통들이 나에겐 크고 많은 상처들을 만들었었다. 상황이 날 강하게 타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약했던 것임을 이미 알아챘고 그 작은 타격들이 다시 산고를 겪으며 어떤 강박을, 집착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순간(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니... 1년여전쯤)
글을 쓰고 싶어 스스로 루틴을 만들었고
매일 썼고
쓰기에 드러났고
드러내니 버려졌고
버려지니 다시 채워지는...
나와 내 인생의 고름짜기가 매일 반복되며 나는 지금도 단단해진 듯하다.
새살이 거의 돋았다는 신호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살이 돋았음을 이리 강렬하게 느끼게 되다니
역시 새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은 새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나보다.
늘 다니던 길을 매일 걷지만 우리는 늘 어깨도 뻐근하고 다리도 저린다. 그러다 새로운 길로 접어들면 처음엔 뛰다가 이내 뒤를 본다. 겁쟁이라면 이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하겠지만 모험가라면 이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며 즐기기까지 한다.
평생 자신의 습관에 집착한 삶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관된 자신의 방향을 향해 우리는 새로운 길의 모험을 나설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그 길에서 넘어진들 난 겁쟁이가 아니니 괜찮다.
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는데 넘어지는 것이 무슨 대수랴. 그러다 잠시 지금 짐을 내려놓고 쉴 때. 지금껏 걸어온 길이 주는 강렬한 자극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4년간의 고립, 나를 찾고자 집요했던 구속에서 나는 지금 10일간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즐기는 중이다. 나는 지금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나에게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삶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다.
하지만 오답에 여러번 넘어지면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거창한 작가도 아닌데 계속 글을 쓰려는 모험을 품고 있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없다.
진실을, 나를, 삶을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이조차 내려놔야만
가고자 하는 길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쓰지만 계속 버려질 것이고
지속적으로 쓴 글은 지속적으로 부족한 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써야만 하겠다.
여기가 집이든 도서관이든 카페든 지중해의 크루즈안 작은 객실이든...
주> 볼테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이병애역, 2010, 문학동네
[지담북살롱]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 연재]
월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화 5:00a.m. ['철학'에게 '부'를 묻다]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금 5:00a.m. [느낌대로!!! 나홀로 유럽]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