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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pr 04. 2024

초고수 자유인이 되렴

엄마의 유산 29

참 이상하지?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에서 어떤 구속없이 사는 것 같은데 왜 모두가 한결같이 '자유'를 원할까? 원한다는 것은 현재 없기 때문이지. 자유롭지 않으니 자유를 원하는 것이지. 그런데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텐데 '자유가 뭐지?'라는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오늘은 네게 '자유'에 대해 얘기하려 해!     

'자유'라는 이름에도 

깊이가 있단다.

 

첫번째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지. 누가 보든 말든 남이 듣든 말든 세상이 어찌 되든 말든 자기 마음대로, 의무도 책임도 없는 이것에도 자유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들은 있지만 상식적인 기준에서 이는 자유가 아닌 '방종'이라고 하지. 가장 낮은 수준의 자유야. 


freedom과 liberty. 

둘 다 자유지만 전자는 그냥 자유, 후자는 '책임'을 전제한 자유.     


둘째, 내가 가고 싶은, 보고 싶은, 하고 싶은, 먹고 싶은, 사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이들이 있지. 부럽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도 있으며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고 사고 싶을 때 살 수 있는 자유. 이 말은 하기 싫은 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다는 거야.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원하겠지. 이런 자유를 '경제적 시간적 자유'라고 하면 느낌이 오지? 돈때문에 직장에 가야 하고 시간이 없어 주말에만 놀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런데 이런 자유는 아주 능력있는 자들이나 아무 능력이 없는 자들 모두 가질 수 있어. 

능력이 있으면 돈이 시간을 살 수 있고 

시간을 사면 자유도 덤으로 얻지만 

아무 능력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살 수 있으니까 가고 싶은데 가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지. 돈? 이런 이들은 여기저기 구걸도 잘 해. 빌리기도 잘하구. 극과 극의 이 두 부류는 겉으로 보이는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누가 뭐라 해도 후자를 자유롭다고 하지는 않겠지? 비굴한거지.      


그런데 참 이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자유를 원하면서도 

갖지 않거나 갖지 못하는지 아니? 


인간의 본성은 '익숙'해지면 '편안'해지거든. '구속'에 익숙해지면 '구속'자체를 '자유'로 착각해. 지배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즉. 속박이 없으면 오히려 허망하고 공허하게 느낀단다. 퇴직하면 자유로운데 계속 회사에 나가고 싶어하거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왔어도 오히려 더 직장을 구하지. 시간도 돈도 자유로운데 행복하지 않다거나 뭔가 일은 하는데 그 일이 싫다거나 자꾸만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는 류의 사람이지. 자유로우면 불안해하는.   

  

아마 대다수가 이럴텐데 자유가 주어져도 그것을 어떻게 누리는지 몰라서 오히려 구속당하는 쪽으로 발길을 옮겨. 실제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많아지면 오히려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불안'해지는 심리 때문에 계속 가난을 택한대. 속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결국 다시 속박을 택하면서 자유로부터 멀어지지. 마치 아기코끼리를 말뚝에 묶어놓고 키우면 다 자라서 말뚝을 뽑을 힘이 넘치는데도 결코 말뚝을 뽑지 않아. 그렇게, 주는 사료와 구속된 공간, 지배자의 명령에 익숙해지고 편해진거지. 시간과 돈이 있어도 이렇게 자신이 누군가, 무언가로부터 구속당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해 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어.    

 

여하튼 시간과 경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정신'의 자유가 없다면 지배당하는 쪽에 머무르거든. 우리는 이런 경우를 아주 많이 봐. 많은 것을 가졌는데 방황하거나 방탕하게 살지. 너무나 자유로우니까. 모든 걸 다 가졌으니까.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실제 우리는 가진 것 다 가진 사람이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중독되기도 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이 봤지. 물질은 풍부한데 자기정신이 없는 삶. 이는 결코 자유로운 삶이라 할 수 없지. 


자유는 정신 속에 존재하는데

정신이 없으니 자유도 없는거야.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바라는 '자유'에 있어서 

'진정한 자유'

에 대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어. 

시간과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이들을 너머선 궁극의 자유. 

극소수(정말 극소수일거야)만이 세번째 자유를 소유하겠지.     


셋째. 최고의, 궁극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 자유야. 첫째, 둘째와 비슷해보일 수 있지만 차원이 다른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지. 가고 싶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소유할 것들을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추상적이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자유는 내면이 자신이 추구하는 바로 들어찬 사람만이 얻을 수 있어. 첫째, 둘째 자유와 양태는 비슷하지만 내면이 자신의 삶으로 꽉 찬 자유지. 물질이나 공간, 시간을 초월한 영적으로 더 깊고 실천적으로 더 주체적인 자유야. 자기 경향이나 습관, 관성, 주변시선이나 관습, 나이와 같은 제한된 것들로부터 비틀거리지 않고 해방된,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아는 이들의 몫이지.  

    

자.신.의.삶.을.선.택.하.는.자.유.    


자기 안에 커다란 꿈과 야망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도구를 지니며 그것을 위해 매일 자신의 변화를 즐기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묵묵히 걷는 자, 소신있는 자,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자. 이러한 사람들은 명품옷이나 근사한 세단, 멋진 집을 아무리 준다 해도 그것을 거부할 자유가 있어. 제 아무리 명예를 준다 해도 외면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지만 결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정신을 소유한 자의 몫이야. 그 어떤 것과도 결코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아. '소유'보다 '존재'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끼니까. 


헨리데이빗소로우가 하버드를 뒤로 하고 월든호숫가에서 살았던 자유, 

몽테뉴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옥탑방에서 글과 책으로 인생을 즐겼던 자유,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그 자유의 크기는 감히 측량될 수 없거든. 

보편적이지도 않고 이해받기 어려울 수도 있지.

세번째 자유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자유, 최고의 행복이란다.  

   

그리고, 

자유에는 범주가 있단다. 

자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시간이나 돈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지     


첫번째 범주는, 시간도 돈도 없는 이들이야. 아마 대다수의 직업을 지닌 노동자들이겠지. 자신의 시간을 돈과 맞바꾼 사람들이야. 하루의 일정시간과 능력을 '월급'이라는 일정한 돈과 맞바꾸는 것이지. 능력이나 규모에 따라 수입의 차이가 있을 뿐 시간과 맞바꾼 돈으로는 자유를 누리긴 어려워. 석유왕 록펠러의 말처럼 '너무 바빠 돈벌 시간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지.      


두번째 범주는, 시간은 없는데 돈이 많은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는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소규모 사업가들이야. 돈을 버느라 너무 바빠 돈을 쓸 시간이 없지.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크게는 돈과 명예는 얻을 지 몰라도 더 크게 잃는 것이 건강이란다.       


세번째 범주는,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는 이들. 우리는 대충 이들을 백수라 하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구나.     


네번째 범주는, 시간과 돈이 다 많은 이들. 그야말로 자유인이지. 돈이 돈을 버는, 시간의 함수에서 벗어난 업을 지닌 사람들의 삶이야. 이들의 대부분은 니콜라스나심탈레브가 언급한 '수입의 자가증식성'을 가진 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야. 음반이나 베스트셀러의 주인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이들은 돈과 무관하게 자신의 시간을 온통 자신의 창작을 누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지.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저작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시간, 돈과 무관하게 즐길 수 있는 인생, 그림이 좋아 그저 그렸을 뿐인데, 글이 좋아 썼을 뿐인데, 자기가 잘하는 것을 그저 했을 뿐인데 요즘같이 네트워킹된 세상에서 돈으로 환원하는 것이지. '정신의 물질화'. '관념의 형상화'. 바로 보이지 않는 자신의 창조가 돈으로 환원가능한 세상에서 이를 외면한다면 아마 평생 돈과 시간을 맞바꾸는 인생을 살아야겠지?


말 그대로 시간과 돈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시간과 돈의 주인인 사람들이야. 


니콜라스나심탈레브도 자신은 천성적으로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월스트리트의 그 대단한 직장을 관두고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야. 물론 이런 주인공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쎄... 무언가의 결과로 '자유'로워진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자유'를 얻을만큼의 댓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몇십년을 일정한 생활비를 위해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고 차가 아무리 막혀도 연휴에만 놀러갈 수 있는 구속된 삶을 선택하는 것과, 모호하고 희미하지만 자신의 창조물을 위해 몇십년을 준비해 지속적이면서 영속적인 수입을 창출하는 것과 뭐가 더 어려울까? 둘 다 쉽지 않지. 이래저래 삶은 다양하고 모든 삶은 존중받을만 하지만 시간과 돈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상이, 자신의 삶이 돈이 되는 그런 삶을 추구하길 바란다. 


진정한 자유지. 

시간과 돈에 무관한 삶.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삶. 

그리고 

그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삶.     


또, 자유에는 나름의 급이 있어. 

시간을 중심으로 언급하자면,


주인이 시간을 허락할때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부류. 과거 노예와 같은.     

시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저당잡혀 있기에 주인이 시간을 허락할 때만 자유가 보장되지. 

하수란다.     


시간을 내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부류.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시간을 요령껏 낼 수 있는 사람들이야. 개인 사업을 하는 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중수란다.     


시간과 무관하게 산다면, 

즉,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 

시간을 자신이 주체적으로 소유한, 좀 더 커다란 회사, 그러니까 직원 500명 이상을 두고 거의 모든 권한위임이 되어 있는 경우지.

고수야.     


그런데, 하수, 중수, 고수. 어떤 삶의 방식을 지녔든 그것과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든 자유로우면 초고수지.

몸이 시간에 매여 있어도 정신이 자유로운 사람. 

몸은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사유가 끝없이 펼쳐져 몸과 따로 자신이 모든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 

자신의 정신이 오직 자신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정신에 제 아무리 커다란 괴리가 있다 하더라도 항상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현재의 삶을 과정으로 여기며 도달할 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초고수의 자유인이 되어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과 돈에 얽매어 있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초고수가 될 수 있어.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시간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일정기간 구속을 택하고 그 기간동안 정신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야. 자신의 업(業)을 찾은 사람, 그 업에서 자유를 누리며 결국, 돈으로부터 해방되고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  

    

진정한 자유란 

시간과 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물리적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정신의 자유를 지닌 상태에서 시간과 돈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의 것이야. 시간과 돈만으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지. 시간과 돈의 자유는 당연한 것이고 그 이상의 초월된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이 정신이라면 비단 일정기간 돈이나 시간에 구속당하더라도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나 정신에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돈에서만 자유로우면 오히려 맹탕이나 잡탕같은 인생이 될거야. 뭘 하는지도 모르게 살아 맹탕같거나 이것저것 잡다하게 열심히만 살아 잡탕같거나.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을 통해 네가 명심하길 바라는 것은 

'자유'에 

'윤리'와 '선(善)'이 결여되면 

'자유'는 '악'이 된단다.     


'자유'에 '정의'와 '정신'이 결여되면 '자유'는 누군가를 '구속'하는 비굴한 권력이 된단다.

'자유'에 '절제'가 결여되면 '자유'는 '탐욕'이 된단다.

'자유'에 '철학'이 결여되면 '자유'는 '이기'가 된단다.

'자유'에 일정기간, 일정부분의 '구속'이 없다면 '자유'는 '방종'이 된단다.

그리고

'자유'에 '자신의 사명'이 결여되면 '염세나 냉소주의자'가 될 수 있단다.

  

결론적으로 

자유의 부피는 내면에 있으며 

자유의 속도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디를 향하느냐에 있으며

자유의 확장과 가치는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지.     


자유는 2가지 방향을 향해야 해. 

내면으로는 '자신의 깊은 심연의 소리'를 향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세상의 흐름'을 향해야 해.

그런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어.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식한 사람, 

여유있게 사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들의 조그마한 정원을 손질하여 낙원으로 꾸밀 줄 알고 

불행한 사람마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거리면서도 끈기있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 햇빛을 다만 1분간이라도 더 오래 쳐다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 그렇지, 그런 사람은 말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제약을 받고 있더라도, 

항상 마음속에서도 자유라는 즐거운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감옥같은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런 자유의 감각 말이다(주2).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p.22



p.s. 잔소리같겠지만. 

너무 까다롭게 구는 사람,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 깐깐함이 지나쳐서 틈이 없는 사람, 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이들과는 다툼하지 마라. 그들은 내면이 자유롭지 않아서야. 가진 것이 많다 해도 내면에 공간이 없으니 그 어떤 것들과도 섞일 수 없고 정화되지 않아서 늘 부딪히는거야. 스스로도 알거야. 자기자신을 존중하지 않거나 존중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스스로 내적성장을 하지 못하면 변하지 못해. 제 아무리 심리치료나 코칭을 받으며 외부에서 도움을 줘도 변화시키기 어려워. 가장 근원적인 것이 바뀌지 않으니까. 사실 엄마가 늘 이래서 어려웠지. 그래서 내면을 채우려 새벽에 책읽기를 이렇게 5년씩이나 하고 있는 것이고.


너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살다가 일정 시기는 그런 시절도 겪을 수 있지만 명심하렴. 

반드시 

내적성장만이 

내면적 자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만약 그런 시절에 네가 서 있다는 것을 느끼더라도 괜찮다. 

단, 알았다면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변하도록 자신에게 의무를 주렴. 

그러면 된다. 

그거면 다 된거다.      


나는 외면적 자아만 조타수에 남겨두고, 항해가 순조로우면 키를 고정시켜 외부 세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생각이라는 유쾌한 선원들과 함께 갑판 아래 선실에 틀어박혔다(주).


주1> 블랙스완, 니콜라스나심탈레브, 2018, 동녁사이언스 

주2>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1999, 민음사

주3> 월든, 헨리데이빗소로우, 2017, 열림원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의 찐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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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5:00a.m. ['부'의 사유와 실천]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금 5:00a.m. [나는 나부터 키웁니다!]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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