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커뮤니티를 지향하며
배우려는 자세와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자세는 같은 듯 다르다.
물론, 기본적으로
알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 배운다.
하지만,
시작은 같아도 멈추는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
진정한 배움을 위한 동기인지
필요한 것만 얻기 위한 동기인지 구분된다.
진정한 배움을 위한 동기라면 '삶'을 배울 것이고
필요한 것만 얻으려는 동기라면 '앎'만 얻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배움의 과정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여기서
'배움을 위한 배움'이냐,
'필요를 위한 배움'이냐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움을 위한 배움'이
더 고차원적인 배움이며 훨씬 효율적이다.
필요한 기능이나 지식의 습득, 즉, 앎을 통해 자신감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자신감이 오만으로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여 나를 지식의 오류에 빠뜨린다. '아는만큼 몰라진다'는 경험으로밖에 터득할 수 없는 진리를 체화할 기회가 박탈되며 배운 지식의 양적 획득과 축적이 질적으로 승화되는 길을 안내받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서의 배움은 필요를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자기주체성, 능동성, 일선형적인 독단, 재단 후 수용으로 인한 앎과 삶의 단절을 가져와 다른 차원으로의 연결이 차단된다. 당연히, 연결이어야 획득되는 통찰이나 혁신, 창의와의 관계도 소원하다.
반면,
필요한 기능이나 지식에 대한 '앎'을 너머 '배우는 자체'의 경이로움에 나를 빠뜨린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져 오만은 커녕 자신감조차도 스멀스멀 사라지는 듯하지만 그 자리는 '나는 모르오' 겸손과 '조금 더 해보자' 인내, 그리고, '지식(앎, 知)'을 너머 '지혜(삶, 智)'에 대한 혜안으로 채워진다.
지식의 양만큼 다른 지식이 갈급하니 이 융합과 연결은 새로운 차원으로 자신을 이끈다. 이러한 배움은 배우다 보니 필요가 채워지는 자기객체성, 수동성, 다선형, 비선형적인 수많은 앎을 투입시키는 열린 마음과 열린 마인드, 재단없는 수용으로 무엇이든 수렴하는 '그릇이 큰' 인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당연히 이들의 통합은 일치로, 일치는 일체로, 일체는 새로운 무언가로 나를 재창조시킨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필요한 것은 필요없는 것처럼 보이는, 앞으로 필요할지 모르는, 필요한지조차 모르는 그것들의 양분으로 배양되고 채워진다.
난제의 연속인 인생의 난해함은 일시적으로는 '필요를 위한 배움'으로 풀리는 것처럼 위장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배움을 위한 배움'을 통해 저절로 풀리게 된다. 네이비색 큰 동그라미(배움) 안에 각각의 작은 동그라미(필요)가 존재하며 개별적 작은 동그라미들이 '삶'이라는 전체에서 융화되기 위해서는 작은 동그라미들 사이의 여백(노란안개)이 채워져야 한다. 이 여백이 '필요'에 대한 요구가 없을지라도 배우려는 자세로 채워나가는 '배움을 위한 배움'이다.
한마디로, '필요'한 것을 배웠다고 배움에서 자리를 떠나면 양분(노란안개)을 더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는 일시적으로만 요긴할 뿐 곧 '쓸모'가 없는 지식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마치, 학교에서 똑같은 수업을 똑같은 시간에 받는데도 성적에 차이가 있는 이유가 수업시간 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가령, 꾸준한 예습복습이나 지속적인 건강관리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험 당일 감기에 걸릴 확률이나 이래저래 감정낭비하느라 정신집중을 하지 못할 확률이 훨씬 적어지니까 말이다.
나아가 필요해서 배운 것(필요1)에 여백의 배움이 보태지면서 필요1은 점점 조밀한 밀도와 진공없는 부피의 꽉찬 힘을 갖게 되고 필요한지 몰랐거나 필요하지 않았던 필요2,3,4까지 등장하여 필요1이 언제나 든든한 지렛대가 되어줄 수 있고 '자신이 몰랐지만 필요'했던 앎들을 지속적으로 삶에서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지렛대의 힘은 앞으로 어떤 것이 필요하더라도, 또는 굳이 필요없지만 내가 원한다면 뭐든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중심역할이 된다.
이렇게 '배움을 위한 배움'은 새롭게 생성되는 '필요'들이 '배움'이라는 여백의 양분으로 힘을 가지게 되면서 '난해한 삶'을 풀어낼 지혜와 '문제의 연속'인 삶에서 문제보다 커진 나로 나를 견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너무나 중요한 '필요한 것을 깨닫는 능력'까지 배양시켜 필요한 그것을 얻어내는 능력으로, 그 능력은 삶의 결과로 이어져 원하는 삶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
따라서, 정말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필요없다고 판단한, 앞으로 필요할지 모르는, 필요함을 인지하지 못한 그 부분에 현재 시간의 일정부분을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나에겐 그것이 책이며 글쓰기이며 매일 안하던(안해본) 짓 1시간씩 하는 것 등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있는 나는 '글을 잘 써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기에 나는 당장에 필요하지 않지만 늘 책을 하루 2시간 이상 읽으며 무조건 배운다. 그리고 정신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몸이 아프면 글을 전혀 쓸 수 없음을 알기에 차를 버리고 걷는다. 그리고 일상에서 벗어난, 평소 안하던 짓을 1시간정도 해보는 것이다. 걷는 동안 또는 안하던 짓을 하는 내내 머리 속은 전쟁이 따로 없을 정도로 이런저런 발상들이 치고 나온다. 나의 글쓰기가 더 향상되기 위해서 나는 많이 읽고 많이 걷고 새로운 경험을 보태는 것이 장기적으로 효율적임을 감히 경험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 판단으로 배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벗어난, 세상이 주는 초월적인 힘에 의지해 배움에 고개 숙이고 무릎 꿇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 세상은 반드시 보상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신은 항상 후하게 계산하기에 이러한 자세를 가진 자는 더 이상 '필요'가 부담되지 않고 내 노력 이상으로 '필요'가 제때 알아서 채워지는 신기한 운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배움'이 내 삶에 주는 거대한 선물이다.
오늘도 나는 이 거대한 선물을 받기 위해 당장에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기적과 운을 안겨줄 '배움을 위한 배움'에 일정 시간 나를 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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