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직장인의 러닝 이야기
나는 달리기가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공으로 하는 운동은 잘하지 못했지만, 뛰는 것은 자신 있었다. 중학교 운동회 때, 한 번은 친구 어머니가 내가 계주선수로 뛰는 것을 보고 놀라서 엄마한테 연락을 했다고 한다.
"효효가 생긴 것과 달리(?) 엄청 잘 달리던데요??"
주변에서 잘 믿지 않지만, 초중고 모두 계주선수였고, 항상 첫 번째 혹은 마지막 주자로 달렸다. 졸업 이후 달릴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일상에서 달리기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웬만해서는 곧 도착하는 전철이나 버스를 잘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촌언니와 갔던 여행에서는 라운지에서 잠이 들어 비행기를 놓칠 뻔했는데, 라스트콜에 달리기로 살아남았다.)
걷는 것도 좋아한다. 평소 광화문 광장을 돌아 정동길을 걷는 것도 좋고, 여행을 가면 하루 이삼만보씩 걸었다. 반면, 오래 달리기는 잘하지 못했다. 운동장을 두 바퀴가 넘어가면 어찌나 숨쉬기가 힘들던지,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운동을 하고 싶어, 올해 초 러닝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저녁 약속이 있어도, 집에 들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경복궁 돌담길을 뛰었다.
경복궁 한 바퀴는 2.5km, 두 바퀴는 5km 다. 처음에는 쉬지 않고 한 바퀴 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잠시 쉬거나 걷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쉬지 않고 두 바퀴 이상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꾸준히 달리다 보면 달리기 거리나 페이스타임이 향상된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경복궁 달리기의 매력
경복궁 돌담길은 러닝 트랙과 닮아있어 비교적 단순하지만, 주변 풍경이 계절마다 바뀌기 때문에 뛰는 맛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벚꽃 잎이 휘날리고, 여름에는 무수히 푸른 잎들이 그늘막을 만들어 준다. 가을에는 황금빛 단풍으로 물드는데, 손꼽히는 단풍 맛집이다. 겨울에는 흰 눈이 소복이 내려 고요한 운치가 있다.
경복궁 돌담길엔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사대문이 있다. 동쪽문은 건춘문(建春門), 남쪽문은 광화문(光化門), 서쪽문은 영추문(迎秋門), 북쪽문은 신무문(神武門)이다.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미하는데, 사대문에도 계절이 담긴 셈이다.
그뿐인가, 돌담길 옆 가로수들은 두 사람이 팔 벌려 안아도 모자를 만큼 밑동이 굵어 세월을 느낄 수 있다. 혼자서 뛰다 보면, 든든하고 묵묵하게 응원을 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경복궁 돌담길을 달리다 보면 잠시 멈추는 장소 두 곳이 있다. 경복궁을 한 바퀴 돌면 남쪽문인 광화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때 '광화문 정중앙'에 잠시 멈추어 서서 서울 도심 전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효자동 삼거리'는 서쪽 돌담길을 달릴 때 지나는 곳으로, 청와대 앞마당이 위치하여 탁 트인 전경을 마주한다. 인왕산의 유려한 곡선을 막힘없이 바라볼 수 있어 가끔 쉬어가는 곳이다.
직장인인 나는 주로 퇴근하고 밤에 러닝을 하는 편이다. 특히 올해 여름 같이 더운 밤공기에는 10시가 넘어 러닝을 나서는 일이 많았는데, 경복궁 돌담길을 달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경찰청이 크게 있어 동네 자체가 안전하고, 그래서인지 늦은 시간에도 뛰는 사람들도 간간히 마주쳤다. (순찰 도는 경찰 분도 있다.)
밤이 되면 북적이던 관광객들과 차들이 사라져, 조용한 밤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돌담길을 달릴 수 있다.
100km를 뛰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러닝페이스가 뭔지도 몰랐다. 6:30은 1km를 뛰는데 6분 30초가 걸린다는 의미이다. 처음 7분대였던 나의 러닝페이스는 어느새 6분으로 바뀌었다. 러닝이 정말 정직한 운동인 것이, 딱 뛰는 만큼 체력도 좋아졌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짓고 그만큼만 했었는데, 어느새 한 바퀴를 넘어 두 바퀴, 세 바퀴씩 뛰기도 한다. (힘들 때면, 미래를 위해 체력을 비축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을 때 러닝을 하다 보면 무념무상이 되면서, 오롯한 나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뛰고 나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서게 된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더라도, 간간이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집에 돌아와 샤워까지 하면 정말 개운하다.
보스턴에 있을 때, 세계 3대 마라톤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을 구경한 적이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오롯이 정신력과 체력으로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뜨거운 응원을 보내는데 그 열기가 엄청났다. 마라톤 끝에 체온 보존을 위해 은막 비닐을 몸에 두르고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리는 선수들의 모습도 멋지게 기억에 남았다.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당시 열기가 담긴 영상을 찾았다.)
요즘 러닝이 인기라고 한다. 주변에 달리기 하는 친구들도 정말 많아졌다. 광화문, 한강, 여의도 공원 등 심심치 않게 달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일명 댕댕런, 고구마런 등 러닝코스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올해 11월, JTBC 10km 마라톤을 신청했다. 대학생 때 뛰어 본 나이키 워먼스 7km 달리기 이후 오랜만이다. 여전히 빠르지는 못해도, 경복궁 돌담길을 달릴 때처럼 주변의 풍경과 계절을 충분히 느끼면서, 그렇게 나만의 코스를 잘 그리며 달리고 싶다. 언젠가 보스턴은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면 10km를 넘어 하프, 그리고 보스턴 마라톤을 뛰는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