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줄리안

비극의 시작, Part-1

by 필리소

[랭캐스터 카운티의 깊어가는 밤]


터벅 터벅...

소년의 발걸음이 랭캐스터의 깊어가는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2월의 차가운 밤공기가 아미시(Amish) 마을의 들판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줄리안은 눈앞에 끝없이 이어져 있는 농장의 펜스를 따라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벌써 몇 시간째 걷는 중이다.


이미 해가 진 지는 한참이 지났다.

구름에 감춰진 달빛이 힘을 발하지 못해 어둠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슈우웅 슈웅, 슈우웅 슈웅..

멀리서 가정용 발전기 소리가 들린다. 지난밤에 지나간 토네이도 때문에 어느 집에 전기가 나간 모양이다.

부엉.. 부엉.. 아오호.. 우우 후..

멀리서 부엉이 소리도 가끔 들리지만

몇 시간을 도로를 따라 걷는 동안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건 이 외로운 소년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터벅터벅…


위탁가정 집주인에게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고 쑤셔왔다.

온몸이 아팠지만 왼쪽 옆구리에는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고, 깊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사이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잠시라도 기대어 쉴 곳이 필요했다.

"으윽..."

줄리안은 마른 몸을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얇은 면티를 뚫고 들어 올 때마다 온몸이 떨렸고 양말도 없이 신은 낡은 운동화 속에서는 발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달빛도 어둡고 몇백 미터마다 하나씩 있는 가로등의 불빛도 이 어두움을 밝힐 수는 없었지만 몇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걸었더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농장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 펜스에 지친 몸을 기대어 선 줄리안은 습관처럼 손끝으로 펜스 표면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최고급 티크우드에 특수 코팅 처리를 한, 드물게 비싼 최고급 자재였다.

"아버지..."

몇 년 전 봄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양아버지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묵묵히 펜스를 점검하고 계셨다.

"줄리안, 이리 와보거라."

양아버지의 낮은 목소리에 줄리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 펜스 나무가 어때 보이냐. 그냥 봐도 꽤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니?”

“네, 아버지. 전에 아버지가 이 펜스는 티크우드로 만들었다고 했었잖아요”

"그렇지. 기억하는구나. 이 농장의 모든 것들은 최고여야 한다."

양아버지는 말씀이 적으신 분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평소보다 말씀이 많으셨다.

"언젠가 네가 이 농장을 맡게 되면, 펜스 관리도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어때, 지금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며 미리 농장 관리하는 법들을 조금씩 배워 볼 테냐? 최고급 자재로 지은 건 오래 버티지만, 그래도 관리는 필요하단다. 관리를 잘해놓으면 반영구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사용을 할 수가 있거든.”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양아버지의 목소리.

줄리안은 어릴 때부터 매 달 펜스를 점검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줄리안은 좋았다.

추운 밤길에 서서 손에서 느껴지는 펜스의 감촉은 줄리안을 행복했던 그 시절의 시간으로 데리고 갔다. 랭캐스터의 대규모 농장들은 대를 이어서 운영을 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하지만 이렇게 고급 자재를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곳은 이곳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급 펜스의 길이만 봐도, 이곳이 랭캐스터 최고의 부농 중 하나인 토마스 농장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 아니, 이제는… 예전의 우리 집.'

양아버지는 늘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시는 분이었다. 농장의 모든 시설을 최고급으로 관리하셨고, 직원들의 복지도 남달랐다. 그런 꼼꼼함이 토마스 농장을 이 지역 최고의 농장으로 만든 비결이었을 것이다.


"흑... 흐흑..."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양손으로 펜스를 꼭 붙들고 있는 줄리안의 눈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렸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졌다. 차가운 2월의 밤공기가 눈물자국을 얼려갔다.

지난 1년여간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양부모님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소식, 장례식장의 침통한 공기, 그리고 그 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악몽 같은 사건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처럼 모든 일들에 줄리안의 세계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일 년 전. 아니, 이년 전..이었던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이제는 더 이상 상관도 없다.]


평화롭고 안전했던 줄리안의 세상은 단 하루 만에 무너져 버렸다. 8월의 어느 평범한 아침, 토마스 농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양부모님은 농장 물품을 배달하러 가신다며 트럭에 오르셨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구나.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라. 맛있는 거 사 올게."

“아버지, 방학인데. 저도 따라가면 안돼요?”

“날도 더운데 뭘 그래. 시원한 집에서 쉬고 있어. 오늘은 쉴 새 없이 다녀야 해서 너 따라오면 힘만 들어. 아, 디아나 이모가 올 거야.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도착할지도 모르니까 집주인인 네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디아나 이모?

이모님은 작년에 다녀가신 후로 처음 뵙는 거다.

디아나가 온다는 말에 줄리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 있을게요!”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마. 우리 아들, 어디 나가지 말고 디아나 이모와 놀고 있어.”

양어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함께 건넨 마지막 말.

우리 아들.

그 모습이 줄리안이 두 분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 순간인 줄 알았더라면…

그 말이 어머니에게 들은 마지막 말인 줄 알았더라면…


부모님이 외출을 한 후 줄리안은 그날도 평소처럼 농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며 놀았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헛간 앞에서 새끼 양들에게 먹이를 주며 뛰어다니다가, 지난번에 디아나 이모가 오셨을 때 알려준 대로 도구들을 레이블에 맞춰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디아나 이모님은 못하는 게 없다. 특별한 물건을 잘 만들고, 도구와 장비도 척척 고치시고 가끔은 희귀한 도구를 만드는 연구도 한다.

‘그런데 디아나 이모님은 언제 오시지?’

디아나 이모는 늘 바람처럼 왔다가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도 넘게 집에 머물다 간다. 방학인데 이번에는 좀 오래 있다 갔으면 좋겠다.

‘디아나 이모에게 장비 만드는 거나 비밀 문 만드는 법을 배우면,,’


그때였다.

딩동~

“이모?”

벨 소리가 들려서 디아나 이모님이 오신 줄 알고 뛰어나갔지만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경찰?’


“네가, 줄리안이니?"

경찰관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뒤에 서 있던 다른 경찰관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네… 누구, 아니, 무슨 일이세요? 부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그런데 아주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아니..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단다. 잠시 시간 좀 내주겠니?”

“네?”

부모님이 아직 안 오셨는데.. 왜 나랑 얘기를 한다는 거지?

경찰들과의 대화는 어른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오늘 오후에 토마스 부부가 탄 차가 산 길을 넘어오다 중앙선을 넘어오는 트럭에 받혀서…”

멍하니 경찰의 말을 듣고 있던 줄리안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경찰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하나 현실감 없이 흘러갔다. 중앙선을 넘어오는 트럭을 피하지 못하고 받혔다고 한다. 그리고 양부모님이 타고 있던 차가 난간의 보호지지대를 뚫고 나가 전복됐다는 말.

“.. 토마스 부부 두 분 다 현장에서…”라는 말들이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어머니가 저녁 같이 먹자고 틀림없이 그러셨는데

줄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중앙선을 넘은 트럭 운전자가 아무래도 음주 운전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중앙선을 넘어 줄리안 토마스 부부의 차를 받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난간으로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토마스 부부는 이미 숨져있었고 트럭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럭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경찰은 운전자가 걸어서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해 현재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라고 했었다.

“사실이에요? 돌아가셨다는 게 진짜예요? 부모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대답 대신 경찰관의 한숨만이 들렸다. 줄리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농장의 고요 속에서 어린 소년의 흐느낌만이 메아리쳤다.


경찰차가 찾아온 일이 없었던 토마스 농장의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저택 앞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줄리안을 껴안고 다독이던 농장 매니저 아저씨가 경찰과 한참 동안 대화를 하다가 줄리안을 데리고 토마스 부부가 누워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가 부모님을 확인한 줄리안은 지금 눈앞의 일이 악몽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닫고 무너져 내렸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줄리안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식사도 하지 못했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양부모님이 타고 나갔던 차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길 한없이 바라고 또 바랬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역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붙잡은 채.

그러나 부모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토마스 부부의 차를 친 트럭 운전사를 며칠간 경찰이 계속 찾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한 세기처럼 느리게 흘렀다. 줄리안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방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랭캐스터 시내의 장례식장]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장례식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실내를 붉게 물들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농장의 직원들, 이웃들, 그리고 평소 부모님이 거래하던 사업가들까지. 몇 명은 얼굴을 아는 분들이다.

모두가 슬픔에 잠긴 표정이었다. 다들 줄리안에게 와서 안아주기도 하고 어깨를 두들겨 주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줄리안의 귀에는 그들의 위로의 말도, 울음소리도, 한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할 때 부모님이 사준 까만 정장을 입은 줄리안은 양부모님의 영정사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진 속 부모님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는 이 사진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정말 돌아가신 거구나. 흑흑.”

줄리안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에어컨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 모든 게 악몽이길 바랐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길 바랐다. 악몽을 꾼 것이라고. 방문 밖에서는 아버지가 종이 신문을 읽고 계실 거고 어머니는 간식을 만들고 계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검은 리본으로 장식된 영정사진과 흰 국화꽃 향기는 이 모든 것이 냉혹한 현실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양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라벤더 향수 대신 국화향이, 양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 대신 조문객들의 숙연한 발걸음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토마스 농장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부모님은 이제 차가운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소년은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아픈 이별을 하고 있었다.


그날.

장례식 절차에 따라 뷰잉(viewing)을 마치고 관을 덮고 장지로 이동을 하기 전이었다.

두 개의 관이 차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 농장 매니저 아저씨를 따라 예배당에 들어가 뒷 마무리를 하는데 검은 정장을 입은 조문객들 사이로 허름한 옷차림을 한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네가 줄리안이구나. 그럼, 내가.. 너의 삼촌.. 이 되겠구나.”

줄리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삼촌? 남자는 자신을 양아버지의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삼촌이라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존재였다. 일 년에 몇 번씩 다니러 오시는 양부모님의 친구 디아나 이모님 말고는 부모님을 찾아오는 가족은 없었다.

‘아, 디아나 이모!’

부모님 돌아가신 날 틀림없이 디아나 이모가 오실 거라고 들었었다.

‘디아나 이모는 왜 안 오신 거지?’

잊고 있던 디아나가 떠올랐지만 줄리안은 눈앞에 나타난 처음 보는 남자 때문에 디아나 이모에 대해 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양아버지는 가족에 대해 한 마디도 하신 적이 없었다.

언젠가 줄리안은 아버지에게 조부모님과 양부모님의 형제들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입양을 온 이후 양부모님께서 한 번도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다른 가족은 없다고 하셨었다.

그리고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만 하셨을 뿐.

그런데. 갑자기 삼촌 이라니?

“네, 네? 삼촌 이라고요...?"

줄리안의 목소리가 장례식장 안에 울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남자의 얼굴에 묘한 빛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삼촌이라는 남자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며칠 뒤, 장례식을 마치고 무기력감에 빠져있는 줄리안에게 또 다른 충격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왔다는 어떤 남자가 집으로 줄리안을 찾아온 것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통역을 하는 사람을 대동해서 나타났다.


"줄리안, 나는 한국에서 온 네 삼촌이야.”

한국에서 온 남자는 어린것이 혼자서 이 험한 일을 당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에는 아버지의 형제라는 남자가 장례식 장에 찾아왔었는데.

지금은 줄리안 자신을 나아준 부모님의 동생이라며 찾아와 울며 위로를 건넨다.

이게, 다 뭐야..

갑자기 있는 줄도 몰랐던 한국 친척이 등장을 하다니.

그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줄리안은 한국말을 할 줄 안다. 입양 온 후에도 어머니가 계속해서 한국말 튜터를 붙여주셨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대화는 충분히 가능했고 알아듣는 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수상하고 미덥지 않은 남자의 말에 굳이 자신이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리기 싫어서 남자가 데려온 통역을 통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한국에 가족이 없어요. 이 아저씨는 누구지요? 그나저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어떻게 알았대요?”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정확히 계산된 타이밍에 등장한 남자의 존재감에 줄리안은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통역을 통해 줄리안의 불안감을 전해들은 남자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줄리안. 내 말을 못 믿는 것도 당연하지.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내가 너를 더 신경 쓰고 챙겼어야 했는데.. 형님이 돌아가시고 네가 보육원에 있다는 걸 들었었단다. 그때는 나도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너를 데려올 수가 없었어. 흑흑… 나중에 너를 찾으려고 했지만 네가 미국으로 가버린걸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 뭐니. 내가 많이 늦었다. 그러나 네가 내 혈육이라는 건 증명할 수 있어."


증명이라니?


남자는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했다.

줄리안을 어릴때부터 봐왔던 농장의 인부들에게까지 자신이 줄리안의 삼촌 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노력을 했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안해하는 줄리안을 이해한다고 하며 온갖 감언이설로 줄리안의 옆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 시키려 했다.


“줄리안. 난 너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야."

남자는 틀림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했지만, 줄리안의 등줄기로는 끓임 없이 한기가 흘렀다. 양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 그리고 이어진 두 남자의 등장.

모든 것의 타이밍은 어쩐지 너무 완벽하게 느껴졌다.

“줄리안, 네가 나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 알아."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남자는 줄리안을 이해한다며 미소 지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된단다. 하지만 네가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잊지 마. 이제부터 이 삼촌이 너를 지켜 줄 테니.”


줄리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토마스 농장의 푸른 들판이 멀리 보였다. 자신의 정체성이 마치 안개처럼 흐려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건 이 동네 사람들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부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줄리안에게는 양부모님이 전부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양아버지의 동생이라는 남자, 한국에서 온 남자, 아동 보호센터 사람, 아버지의 변호사라는 사람…


아동 보호센터에서 나온 사람과 아버지의 변호사라는 사람에게서도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남자의 말대로) 줄리안은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며칠 후 줄리안은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남자와 양 아버지의 형제라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서 유전자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이 병원. 사고 난 부모님을 찾으러 왔던 병원인데..’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르자 명치끝이 아려왔다.

병원 복도를 걷는 내내 자신의 존재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갔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몇 가지의 검사를 했었다.


이 검사 결과로 나는 뭘 알게 되는 거지?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거지?

검사가 진행됨에 따라 줄리안은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입양이 되었었지만 토마스 가의 아들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어떤 한국 남자의 조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검사를 받고 있다니.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다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다.

줄리안은 떨리는 두 손을 꼭 붙잡고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눈물을 참았다.


몇 주 후.

그날도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줄리안을 찾아와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불편했지만 매일 계속 찾아와 한국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줄리안의 생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이 남자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새 조금은 의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오늘, 어쩐 일인지 통역 없이 혼자 찾아왔다.

큰길 입구에 있는 파네라 브래드 (panera bread) 빵집에서 사 온 샌드위치 봉지를 흔들며 함께 먹자고 하면서 남자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줄리안, 솔직히 얘기해보렴. 너, 내 말 알아듣지?”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눈치 빠른 남자는 대화할 때 줄리안이 보내는 반응을 관찰하며 줄리안이 한국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줄리안은 눈을 피하며 남자가 들고 온 샌드위치를 낚아채서 뒷마당 테이블로 가지고 갔다.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해한다고 말하며 뒷마당으로 줄리안을 따라왔다.

“다 괜찮다. 줄리안. 내가 너라고 해도 그랬을 거야. 이해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난생처음 본 사람이 삼촌이라고 찾아왔는데 처음부터 믿음이 간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러나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줄리안. 난 네 편이야.”

줄리안은 말없이 입 안으로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줄리안, 잘 들어봐. 네가 아직 미성년자 이기 때문에 너는 보호자가 필요해. 그리고 이 세상에는..”


빵빵~!

타닥!

어디선가 갑자기 자동차 클락션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어요. 마침 줄리안도 함께 있네!”

양아버지의 형제라는 사람이 서류를 흔들며 줄리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친족 관계가 확실합니다."

눈빛을 반짝이며 들떠있는 남자의 말에 한국에서 온 삼촌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줄리안의 마음 안에서는 알지 못할 무언가가 천천히 깨어져 무너져가고 있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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