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줄리안

비극의 시작, Part-2

by 필리소

한국에서 온 삼촌은 친절했다.

너무나도 친절해서 오히려 불편할 정도였다.

유전자 검사 결과지에는 한국에서 온 삼촌과 혈연이 틀림 없다는 소견서가 첨부 되어 있었다.

삼촌은 뛸듯이 기뻐하며 줄리안을 끌어안았다.

이날 이후 삼촌은 줄리안을 정말로 가족으로 대해줬고 전보다 더욱 친절했다.


"줄리안, 이제 우리가 진짜 가족이야. 너와 나, 우리 둘 말이야. 죽은 네 친 아버지가 못 해준 걸 내가 다 해줄게. 일찍 떠난 네 양 아버지 대신 내가 네 곁에서 오래도록 지켜줄께. 줄리안, 이제 아무 걱정 말거라.”

줄리안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양부모님을 잃은 상실감 속에서, 새로운 가족이라는 희망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것이 허상 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린 줄리안은 기댈곳이 필요했다.

그날, 삼촌은 짐을 싸서 줄리안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랜만에 가족..? 이라는 사람과 한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조금은 익숙해 질지도 모르겠다고 줄리안은 생각 했다.


그러나, 줄리안의 불행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줄리안의 파양을 신청합니다, 판사님."

양아버지의 동생이 입양 유지를 거부하면서, 줄리안의 삶은 또 한 번 흔들리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주 아동보호법에 따르면, 양부모의 사망 후 미성년자의 파양은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했다. 특히 아동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 of the Child)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했다.

"줄리안에게 새로운 보호자가 생겼기에 죽은 형의 입양자를 계승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판사님."

랭캐스터 카운티 법원의 차가운 법정에서, 양아버지의 동생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판사는 줄리안의 입장을 중요하게 짚어냈다.

"미성년자의 의견도 존중 되어야 합니다."

줄리안은 낯선 법정 분위기에 움츠러들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는 재판에서, 줄리안은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법정에서 묻는 질문들에 줄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미성년자인 그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특히 한국에서 온 삼촌이 줄리안의 새로운 입양자로써의 의사를 밝히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삼촌은 자신이 줄리안의 친족이며,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동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혈연관계가 입증된 친족이 보호자 의무를 넘겨받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입양한 부모의 사망 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양부의 동생인 미스터 토마스가 기존 입양 관계를 떠 안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변호사들의 법적 공방이 이어졌고, 복잡한 법률 용어들이 법정을 채웠다.

줄리안에게는 그저 자신의 운명이 타인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지켜고만 있었다. 혈연관계 입증이 확인 된 후라서 파양 절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고, 자신과 토마스가와의 마지막 흔적마저 지워지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온 삼촌은 완벽한 보호자의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파양이 확정되고나서 두 달이 지난 어느날, 가족이라던 삼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도 없이 사라졌고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삼촌이 사라지고 갈곳이 없어진 줄리안은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그리고 몇달 후 다시 위탁 가정으로 옮겨졌다.

보호 시설에서 위탁 가정으로 옮겨질 때까지, 줄리안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왜 양부모님은 그날 굳이 외출을 나가셨을까?

왜 전에는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내 삼촌 이라며 바로 그 시기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을까?

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밤마다 그를 괴롭혔다.

지금도 줄리안은 가끔 아침에 눈을 뜨면 모든 것이 꿈이었기를 바란다.

양아버지의 목소리로 깨어나고, 양어머니가 준비한 아침 식사 향기가 코끝에 닿기를.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낯선 위탁 가정의 차가운 아침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위탁가정의 주인 아저씨는 난폭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소리를 질렀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줄리안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이 동양인!”

“이 버릇 없는 입양아 같으니!”

남자가 입버릇처럼 말 하는 동양인 아이, 입양아 같은 단어들에 줄리안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할 곳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리안은 점점 위축이 되어갔고 남자는 그런 줄리안에게 더욱 함부로 하기 시작했다.

위탁가정에서의 구타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줄리안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멍 자국들은 하나둘씩 쌓여갔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우유 누가 다 마셨어??"

늦은 아침 식사 시간, 위탁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줄리안은 식탁 앞에서 움찔했다.

"줄리안! 이리 와봐."

위탁부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우유가 조금밖에 없으면 마시지 말고 놔두라고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줄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유를 마지막으로 마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어제 저녁, 자신이 마셨을 때는 분명 우유가 절반 이상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름의 용기를 내어 억울함을 표현했다.


이 집에서 위탁 아동으로 지내는 아이는 줄리안 말고도 두명이 더 있다.

아침을 먹는 시간이 늦어지니 배가 고팠던 다른 아이들이 아침 시간에 우유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줄리안은 자신은 오늘 아침에 우유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을 했지만 남자는 듣지 않았다.


오늘도 남자는 어김없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 위탁부는 마치 정해진 일과처럼 매일 누군가에게 화를 내야 했고, 그 표적은 대부분 줄리안이었다.

다른 위탁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모른 척했다.

"그깟 우유가 뭐라고..."

줄리안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안 했다고요!"

순간 부엌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위탁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 망할 놈!" 위탁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다가왔다.

"어디서 감히 말대꾸야!"

"넌 태생부터 재수가 없는 아이야."


위탁부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그래서 네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재수가 없었던 거야. 넌 원래부터 부모가 없을 운명인 거라고!"

남자의 말을 들은 줄리안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낳아준 부모도, 입양해준 부모도..?

부모님을 모두 잃은 것이 자신의 재수 없는 운명이라니.

그의 말은 더 이상 상처 입을 곳도 없을줄 알았던 줄리안 가슴의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방에나 처박혀 있어! 재수 없는 동양인 입양아 아이한테 줄 식사는 없으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른 줄리안은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뭐라고 대꾸를 했다.

아마 자신에게 입양아 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랬던것도 같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 이후의 고통만이 선명할 뿐 이다.

줄리안이 남자의 말에 대꾸를 할때마다 주먹이 날아왔다.

발이 날아왔다. 그리고 줄리안의 몸은 바닥을 굴렀다.

“멍청한 동양인 입양아 같으니!!”

줄리안을 향해 남자는 끓임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위탁부는 어느정도 분이 풀렸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길질을 하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방바닥에 웅크린 채, 줄리안은 미친듯이 뛰어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누워 있었다.

아프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이제 눈물도 나지 않는다.

위탁가정에서 처음 뺨을 맞던 날이 선명하다.

그때는 ‘아저씨가 화가나서 했던 실수였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자의 손찌검은 더 거칠어졌고, 줄리안을 때리는 이유는 갈수록 더 사소해졌다.


줄리안은 처음엔 그래도 이해하려 했었다.

이렇게 위탁이 되어 살게 되었지만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 버텼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손바닥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


말을 하면 맞고, 대꾸를 하면 또 맞고... 결국 줄리안은 말하는 걸 포기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멍 자국을 감추느라 긴 소매 셔츠만 입었다.

여름에도. 친구들이 물어봐도 "넘어졌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거짓말이 쌓일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구타가 있던 다음 날이면 남자는 줄리에게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었다.

멍 자국이 드러나 학교에 자신이 줄리안이 구타를 당한것이 알려질까 두려워서였다. 그럴 때마다 줄리안은 방 안에 갇혀서 창밖만 바라봤다.

새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데...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줄리안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갈데가 없었다.


방과 후면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발바닥이 아파도 천천히 걸었다.

다리가 아파서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스쿨버스를 보면서도 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그 집에 도착하고 싶어서...

때론 공원 벤치에 앉아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결국은 그 집으로 돌아갔다.

달리 갈 곳이 없었으니까.

그게 불행한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그 말은 참을 수가 없었어."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줄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를 내어서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가 떨린다. 주먹이 저절로 쥐어진다.

"태생부터 재수가 없는 아이라고...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그동안 맞으면서도 참았어.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았잖아. 하지만 그런 말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번엔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분노와 결심이 섞인 눈물이다.

"더는 못 참아. 차라리 길거리에서 자는 게 나아. 추위에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집에는 안 돌아가."

랭캐스터의 차가운 밤공기가 볼을 스친다. 발걸음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 가볍다.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걸음이니까.

비록 그게 도망이라 할지라도.

"... 그냥 걸을 거야."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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