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맨해튼
2월의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맨해튼의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소리. '빠앙— 빵빵' 소리가 28층 높이에서는 마치 도시의 숨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십 개의 고층 빌딩들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이 붉은 실처럼 도시를 수놓고 있었다.
맨해튼 중심부에 우뚝 선 현대식 오피스 빌딩. 미니멀한 외관과는 달리, 28층에 자리 잡은 레아의 사무실은 마치 오래된 도서관처럼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원목 책장에는 고서부터 최신 학술지까지 빼곡히 꽂혀있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 사이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와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아는 다음 주 강의 자료를 정리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이 펼쳐져 있고, 노트북 화면에는 수정 중인 강의 자료가 띄워져 있다. 그녀는 편한 캐시미어 가디건으로 갈아입은 채,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하늘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겨있다. 하지만 맨하탄의 밤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늦은 퇴근길을 재촉하는 직장인들과 저녁 약속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마치 빛나는 진주 목걸이처럼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리는 노크 소리.
"똑똑"
레아의 목소리는 피곤이 가득 묻어있었다.
"응... 들어와.”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며 피터가 급하게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서류 뭉치가 들려있었고,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넥타이는 살짝 풀어져 있었다.
"아직 오피스에 계신 것 같아서 이리로 바로 왔습니다."
뛰어왔나?
아니지. 100미터를 9초에 뛰어도 숨을 몰아쉬는 법이 없는 피터다.
레아는 피터의 가쁜 숨소리가 어떠한 흥분감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아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손에 든거 뭐야? 뭘, 찾아 낸 거…지?”
하지만 피터는 레아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소파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들과 레아의 편한 차림새에 눈길을 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강의 준비를 또 사무실에서 하고 계셨습니까?"
피터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답답함이 섞여있었다.
"여기서 책 붙들고 계시다가 또 소파에서 잠들려고... 그러니 맨날 골골하시죠. 학교 일은 학교에 있는 연구실에서 해야 시간이 늦어지면 집에 가서 쉬고싶어진다고 제가 누누히 말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학교가 싫으면 집으로 가시라고요. 궁궐같은 집은 둿다 뭐하고 매번 이렇게 불편한 사무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잠이들고…아니, 그렇게 오래 살아 계셨으면서 애초에 역사에 대해 할 공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 오히려 미스테리 입니다.”
어쭈?
레아는 자신을 걱정하는 피터의 마음을 알기에 그의 잔소리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역사는 배워야 한다
“수백, 수천년을 안 죽고 살아 있어서 역사를 꿰고 있으면 뭐하겠어. 매일 매일이 새로운 이야기들의 연속인데. 누구도 모르는 미래의 일과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을 연결하는 지금.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재가 이다지도 파란만장하잖아. 그러니 현대를 과거와 엮어내는 방향성도 늘 새로울수 밖에. 과거는 패턴을 읽어야 해. 그것으로 배움을 얻어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에 발을 딛고서서 과거를 보며 공부 해야해. 남들 눈에는 명색이 콜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역사 전문가인데 해마다 똑같은 강의안을 울궈먹을수는 없잖아? 그리고, 이런 연구들, 난 좀 재미있어.”
“아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 말은, 늦은 시간까지 무리 하는게..”
“잔소리는 됐고, 그래, 뭐가 좀 나왔어?"
레아는 피터의 잔소리를 중간에 자르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감과 조바심이 묻어났다.
레아의 물음에 피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손에 든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책상 위 은은한 조명이 서류 위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랭캐스터?" 레아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펜실베니아, 랭캐스터?”
피터는 등을 곧게 펴며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정보를 조합해 봤을 때 시간의 문이 열린 곳은 펜실베니아의 랭캐스터 지역이 확실합니다."
그는 서류를 펼치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래에 적어놓은 리스트는 상위 정보들만 모아서 타겟으로 잡아본 랭캐스터 지역의 좌표들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문은 그 지표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확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이 지표들을 연결해서 형성되는 지역 안쪽에 위치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번 일을 시작한 후 피터의 입에서 '확실하다'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레아는 창밖의 맨하탄 야경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후…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네.”
깊은 한숨과 함께 레아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놈이 지금까지 이곳에 있을까?"
피터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며 차분히 대답했다.
"레아,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문이 열린 후 시간이 꽤 지났으니 장담을 할 수는 없죠. 확실히 놈이 지금까지 그곳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러나 문이 열렸던 지역을 멀리 떠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레아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묻어났다.
피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놈을 잡지 못했잖습니까."
'그렇지.'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놈이 열고 돌아왔던 시간의 문을 찾았다면 놈은 이미 내 손에 잡혔겠지.'
"그게 왜?" 그러나 레아는 모른척 하고 확인차 다시 물었다. 피터의 추리 과정을 듣고싶었다.
"우리 쪽에서 그때 열렸던 시간의 문을 찾지 못했으니 놈과 우리가 마주치지 못한거죠. 놈은 그 문 앞을 떠날 수 없을겁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필코 다시 시간 여행을 하려고 할겁니다.”
우리의 존재를 모를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소멸시킨 디아나에게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확신은 할 수 없겠지.
아마 안전하다고 생각 하고 있을거다.
"어쨌거나, 놈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혼자서는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지 못할 테니 자신이 열고 돌아온 문이라도 다시 찾아 열어서 여행을 할 수 있길 원할 겁니다. 놈은 틀림없이 시간의 문이 열린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곳에 있을겁니다.”
피터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레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생각에 잠겼다. 시간 여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아마, 들어본 적도 없을 시간의 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문이 존재 하는지도 모르다가 생을 마감한다.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운이 좋은 한 두명. 그렇게 우연히 시간여행을 할 기회를 가져 본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기회 또한 손에 쥐게 된다.
디아나를 죽이고 시간의 문을 열어 짧게 여행의 맛을 보고 강제 소환 당했을 놈에게는 그 짧은 여행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을만큼의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시간 여행을 다녀오고 싶겠지. 그리고는 돌아와서 자신은 알고 세상은 모르는 미래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며 욕심껏 누리며 살고 싶을꺼다.
"인간이란 존재가 참 단순하면서도 복잡하지 않나요?"
피터가 레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꺼냈다.
"그래. 시간 여행을 경험 했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그놈은 더하겠지. 고작 일주일밖에 못 다녀 왔을테니..”
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신들의 욕심에 눈이 멀어 무작정 시간의 문을 열었다가 강제로 끌려 돌아왔을 때는 꽤 허탈했을껄?”
레아는 디아나를 망가뜨린 그 인간이 시간여행을 또 갈 수 있을꺼라는 환상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랬다. 그 구렁텅이에서 절대 헤어나오지 못하기를 바랬다. 다시 자신에게 그 기회가 오리라는 허망한 기대로 평생 공허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 욕망이 놈을 지배하는 한 놈은 반드시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실수를 하고야 말것이다.
시공간의 흐름을 관리하는 수호자들중 한 명으로서, 레아는 시간 여행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의 문이 강제로 열린 것을 감지했을 때의 그 긴박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카이의 감각으로 크로노미터의 경보파장이 감지되고, 자신의 감각을 퉁해 시공간 좌표파장이 흔들리던 그 순간을.
경보파장이 감지되고 좌표계가 흔들렸다는 것을 깨닫았을때 일그러졌던 카이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
‘카이 크로노스. 그 인간 성질 부리는걸 다시 보게 될줄이야.’
인간 세계 시간의 흐름에 책임자인 크로노스가 그렇게 분노한 것은 몇백년만에 처음 있는 일 이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까지가 정확히 일주일이었죠." 피터가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168시간, 10,080분... 시간의 프레임을 이탈한 정확한 기간 입니다."
디아나를 망가뜨리고 시간의 문을 연 그 인간은 기본적인 시간 여행 교육조차 받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신의 허락없이, 여행에 대한 완벽한 준비 없이 문으로 뛰어들게 되면 생기는 나비효과. 그 파장이 자신에게 어떤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도 모른 채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다.
"일주일이라..."
레아는 중얼거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지식도, 매뉴얼도 없이 과연 시간 여행을 제대로 활용할 수나 있었을까?"
“허황된 꿈은 꿀수 있었겠지요.”
피터는 말을 이어갔다.
“평범한 인간들에게 일주일간의 시간 여행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을 경험한 거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상상 해보세요.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다는 희망…그 가능성을 잠깐이라도 경험 했다면 놈은 꿈을 꾸게 되었을 것입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될 허망한 꿈 말입니다.”
"맞아. 놈은 시간 여행의 근본적인 원리나 법칙은 전혀 모르겠지만..."
레아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야. 한 번의 특별한 경험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버렸을 테니까."
‘복권 번호를 알아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주식 시장의 흐름을 파악해서 대박을 터뜨리고 싶지 않을까...' 레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놈이 아직도 이 근처를 맴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겁니다." 피터가 지도를 펼치며 설명했다.
“그 후로는 시간의 문을 다시 열지 못했을테니, 그 문을 찾아 수년째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겠죠."
레아는 마침내 피터가 건넨 지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그려진 종선과 횡선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크고 작은 사각형들이 마치 퍼즐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이건 펜타곤의 최신 군사 위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지도입니다."
피터가 전문가다운 설명을 이어갔다.
"각 좌표는 10등분되어 있고, 인공위성 촬영 데이터와 암호화된 정보들이 각각의 구역마다 매칭되어 있습니다."
지도 위에는 다양한 색상의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빨강, 파랑, 초록... 각각의 색이 나타내는 의미는 모두 달랐다. 레이저 프린터로 확대 출력한 흔적이 선명했고, 좌표의 정확도를 검증한 흔적도 역력했다.
"정말 꼼꼼하게 작업했네."
레아가 감탄했다.
제 아무리 정교한 군사 지도라도 좌표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면, 최첨단 장비를 동원했다 한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시간의 문을 찾는 이런 중차대한 임무에서는 단 1mm의 오차도 용납될 수 없었다.
피터가 건네준 완성된 지도를 받아든 레아는, 그가 고용한 팀이 얼마나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쳤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정보분석관들이 밤을 새워가며 데이터를 교차 검증했을 것이고, 양자 물리학자들은 시공간 좌표의 미세한 변화까지 계산했을 터였다.
서류 뭉치를 한 장씩 넘기던 레아의 손길이 멈췄다. 뒷부분의 서류들은 색다른 미색 용지였는데, 그 위에는 치밀하게 정리된 가설과 실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고등 물리학 공식들과 복잡한 행렬식이 가득했다. 시간의 문이 열릴 때 발생하는 양자장 변화를 계산한 흔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자료를..."
레아는 두꺼운 보고서를 뒤적이다가 다시 앞쪽으로 넘겨, 최종 좌표가 정리된 페이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런데 좌표가... 다섯 개네?"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네. 사실 제일 아래 있는 마지막 좌표가 거의 확실합니다만, 이번엔 실수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고자 정보분석관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각 팀의 가설들을 모두 수용해서 다섯 개의 좌표를 도출해냈죠."
각 좌표 옆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전체 연구진과 정보분석관들 중 해당 좌표에 시간의 문이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동의한 인원수였다. 레아의 시선이 마지막 좌표에 멈췄다. 펜실베니아 랭캐스터의 한 지점을 가리키는 이 좌표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직접 가보면 알 수 있겠지.' 레아는 생각했다. '시간의 문이 열렸던 자리라면, 그 고유한 진동과 잔향들을 숨길수가 없을 테니.'
지난 수백 년간 피터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인간 세계의 일이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결국은 3차원 시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그들에게 인간사의 일들은 그리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놈들의 거취를 찾기 위해 했던 수십번의 노력들이… 그리고 이어진 모든 실패가 피터의 자존심을 적잖이 상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그의 굳은 표정에서 그간의 좌절감이 묻어났다.
피터는 책상에 놓인 연구 자료들을 정돈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 실패들도 결국은 소중한 데이터가 되었습니다. 각 실패 사례를 철저히 분석해서 확실하게 제거할 지역들을 걸러냈고, 새로운 가설을 세워 연구를 진행했죠."
피터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질적연구와 양적연구를 분리해서 진행했습니다. 특히 공간 계측 모델은 완전히 새로 설계했어요."
레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공간 계측 연구 모델을 돌린 거라고? 같은 실험으로는 지난번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없었을 텐데."
"지난번에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열린 공간에 대한 계측은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레아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피터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서류 뭉치에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사용한 암흑물질 관측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양자역학적 접근으로 초공간 좌표를 추적하는데 성공했거든요."
"그건 지난번에도 했던 방법 아니야?"
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군용 초음파 탐지기까지 동원했었잖아. 그때도 실패 했었는데."
피터는 책상 위에 놓인 복잡한 도표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군용 기계로는 우리가 원하는 정밀도의 결과값을 얻을 수 없었어요. 추가 연구 결과, 방법론의 방향성은 맞았지만 장비의 정밀도가 부족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더 정교한 기계?"
레아의 눈이 반짝였다.
피터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뭐, 초음파 기계 하나 만들었지요. 양자 중첩 상태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의..."
레아가 말을 자르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잠깐만! 지금... 군용보다 더 정교한 초음파 기계를 만들었다고?"
피터는 미소만 지을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기계... 완성했어?"
레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피터는 레아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은 기밀입니다만, 네."
레아는 저녁 내내 읽던 19세기 역사 논문이 뭐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거, 오랜만에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는걸?
그러나 새로운 물건 때문에 골치 아파질 상황이 바로 떠올라 짜증이 올라왔다.
"대통령이 곧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럼 귀찮아질 텐데..."
레아의 눈썹이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다.
"쉽게 쉽게 가야죠."
피터가 손을 휘휘 저었다.
"입 막는 건 돈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연구원들 특별 수당에 특수 조항을 넣어 입을 막아놨습니다. 레아님. 그게 뭐가 되었던 이쪽의 정보를 대통령이 알게될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겁니다. 늘 그랬듯이요. 그보다..."
그는 책상 위의 지도를 가리켰다.
"오늘 연구 결과지를 받아보고 완전히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기 좀 보세요."
피터는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줄들의 색깔이 제일 많이 모인 이 부분입니다. 지난번 군용 기계로 실험했을 때는 겨우 두 가지 색깔의 패턴만 나왔는데, 이번에는 여섯 가지나 되는 뚜렷한 색상 패턴을 도출해냈습니다.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한 새로운 측정법이 놀라운 결과를 보여줬어요."
레아는 지도의 복잡한 패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엔지니어들이 입는 체크무늬 남방 같네. 이제 알겠어, 왜 엔지니어들이 매일 체크무늬 셔츠만 고집하는지."
피터는 레아의 유머에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하하, 우리 연구원들이 들으면 정말 기뻐할 것 같네요. '드디어 누군가 우리의 패션 미학을 알아봤다'면서요. 그들이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체크무늬 패턴처럼, 이번 연구 결과도 완벽히 정교하게 나왔습니다."
피터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연구팀 전체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어요. 기존 계약은 모두 파기하고, 인센티브는 5배로 올렸죠. 물론, 철저한 보안 조항도 포함시켰습니다."
“음…피터..” 레아는 창 밖 맨하탄의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중국과 러시아의 산업 스파이들을 너무 얕보고 있는 거 아닐까? MIT나 칼텍의 최고 연구진들도 이 기술에 눈독 들일 텐데. 그 정도 인센티브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
피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밀 유지는 길어야 2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면 2년은 틀어막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저희가 이 기계를 활용할 일은 이번 프로젝트 하나 입니다. 어차피 단발성으로 설계했어요. 더 사용할 프로젝트는 염두에 두고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에서 볼때 이정도의 기술은 혁신 입니다. 기계에 대한 소문이 나면 어떻게든 뺏어 갈 꺼예요. 머리 아파지기 전에 저희 쪽에서 먼저 터뜨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바로 국방부에 매각할 계획입니다. 양자역학 기반의 이번 기술이 군사적으로도 활용 가치가 높거든요."
"잠깐만," 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엄청난 연구비를 들여서 겨우 2년짜리 계약이라고? 피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우린 상장 회사가 될 생각이 없어. 투자자들도 없는데 내 돈을 이렇게 펑펑 쓰면 어쩌자는 거야?"
피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개인 재산이 수십조 단위신 분이 왜 이리 구두쇠세요? 이 지구상에 레아님 보다 돈 많은 사람이 있답니까? 구두쇠 카이나, 숨만 쉬어도 돈이 따라다닌다는 에이든도 레아님보다는 한 수 아래 일겁니다. 하하. 2년이면 충분합니다. 계약서에 들어간 위약금이 천문학적이라 적어도 다음 대통령 취임까지는 입 다물고 있을 거예요. 기계는 적절한 시기에 국방부에 매각하고, 선거 기간에 맞춰 기술력 정보도 조금씩 흘릴 겁니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이 기술을 놓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정리했다. "역시 피터답네. 좋아, 대선 후보들 동향은 계속 체크해. 양당 모두. 늘 하던 대로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레아는 지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펜실베니아 주의 랭캐스터 근교에 찍힌 다섯 개의 좌표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손가락으로 각 지점을 짚어가며, 그녀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이 모든 좌표가 랭캐스터 근처라고…?”
레아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오랜 시간의 치열한 추적 끝에 마침내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피터가 이토록 확신에 찬 자료를 들고 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디건이 소파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바로 가자.”
"뭐라고요?"
피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아, 당장은 안됩니다. 에이든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잖습니까. 출장 중이니 곧 돌아온다고..."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들고 와 놓고 또 기다리자고?"
레아가 피터의 말을 자르며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맨하탄의 야경이 그녀의 초조한 발걸음을 비추고 있었다.
“에이든이 언제 올줄 알고!”
"급한 건 맞습니다만,"
피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군인 출신다운 침착함이 레아의 조급함과 대조를 이뤘다.
"이번에는 절대 변수가 있어선 안 됩니다. 설사 놈을 잡더라도 에이든이 없으면 최종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레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창틀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평소라면 이미 독단적으로 행동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피터의 말이 맞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성격 급한 자신의 보스가 말싸움 도중에 조용해지는 순간은 매우 드물다. 28층 사무실의 야경이 창문에 비치는 가운데, 피터는 레아의 표정 변화를 예의주시했다. 평소라면 이미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을 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밀리면 안 돼.'
피터는 마음을 다잡았다.
'레아님을 말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피터는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정돈하며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레아님의 안전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계속했다.
"그 누구보다 제가 놈을 잡고 싶지만, 지금의 정보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문이 열렸던 장소 뿐입니다. 놈에 대해서 우리 쪽에서 가진 정보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피터는 레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조했다.
“놈의 신상을 완벽히 확정할 수 있는 에이든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레아는 말없이 피터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평소 같았으면 피터가 물러섰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보셔도 이번엔 절대 양보 못 합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피터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후..."
레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피터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듯했다.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한 피터조차도 놈의 뒤를 쫓으면서 수없이 헛다리를 짚었었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자료를 분석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누구보다 피터 자신이 제일 먼저 놈을 찾고 싶을 터였다. 그의 눈빛에서 복수심이 서렸다.
'이번에는 꼭 잡는다. 디아나의 원수.'
레아는 창가로 걸어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에이든 프로메테우스/
타닥 타다닥
피터를 등지고 선 채 에이든에게 텍스트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전화기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렸다.
레아는 에이든이 질려서 전화가 올 때까지 텍스트를 보내려는듯 했다.
'휴... 곧 전화가 오겠구나.' 피터는 예상대로의 상황 전개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