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은 죽기로 했다

by 필리소


레아는 여전히 쉴 새 없이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다..

"Rrrr …Rrrr..."

예상했던 대로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레아의 전화가 아닌 피터의 전화기가 울린 것이다.

피터는 귀에 꽂은 스피커가 달린 소형 마이크를 살짝 건드리며 받았다.


“에이든? 회의 중 아니었어?"


“지금 회의에 집중할 수 있겠냐? 레아 쟤 왜 저래? 뭔가 불안한 일이 있나 본데. 뭐야?" 에이든의 목소리에는 짜증보다는 걱정이 묻어났다.


"레아님에게 바로 전화를 해보지 왜 나에게 전화했어?"


"전화 걸어도 안 받아."

에이든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화는 안 받으면서 오늘 안에는 오는 거냐는 텍스트만 끝없이 보내고 있어. 텍스트 좀 그만하라고 해!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서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타협점이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거겠지. 내 말이 맞아?"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의 레아님은 타협점이 없으시지."

“…”

잠시 숨을 고르고 피터가 입을 열었다.

"문을 찾은 것 같다.”


순간 에이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확실한 거야? 확실히 찾은 것 같아?"


"확실해."

피터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에이든과의 통화를 끊고 피터는 강아지처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30분 안에 회의 마치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레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25분 후.


맨해튼의 고층 사무실 구석에 매달려있는 시계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레아는 오른쪽 창가에서 왼쪽 창가로 걸음을 옮겨가면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든 이 답답한 놈은 도대체 왜 아직도 안 와? 무슨 회의가 그렇게 길어? 곧 자정이라고! 걔 이렇게 늦게까지 직원들 붙들어 놓는 거 불법이야, 불법! 오버타임 페이는 제대로 해 주면서 일 시키는 거래?”


레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레아님, 에이든이 지금 다른 나라에 있는 다른 시간대 사람들과 화상으로 미팅 중 일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흥! 이 세상 일은 에이든 혼자 다하지? 그렇다면..


"안 되겠다. 차라리 에이든의 회사로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오늘 안에는 미팅을 마치겠지?”


28층 창밖으로 보이는 맨해튼의 야경이 반짝이는 동안, 레아는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했다. 피터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레아는 이미 양손을 들어 공간을 열고 있었다.


"레아님, 잠시만..."


피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아는 희미한 빛줄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열렸다가 닫힌 공간의 잔상만이 허공에 아른거렸다.


"하아..." 피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든과 통화를 마친 게 25분 전이다.

나름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고 있던 레아였지만, 역시나 오래 기다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레아님이 폭주하기 전에 에이든이 빨리 미팅을 마쳐야 할 텐데.'

피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끙..."


사무실을 둘러보니 레아의 코트가 눈에 띄었다.

코트도 없이 나가버린 것이다.

피터는 책상 위에 걸쳐있던 레아의 캐시미어 코트를 팔에 걸치고, 책상에 던져져 있던 최신형 스마트폰을 주워 들었다.

"이런, 전화기도 놓고 가시다니..."


소파에는 강의 준비를 위해 펼쳐놓았던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노트북은 아직도 켜진 채였다. 피터는 서둘러 책들을 한데 모아 책상 위에 쌓아두고, 노트북을 덮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카디건도 눈에 띄었다.


"이거라도 정리해 놔야..."

피터는 책상 아래에 있는 레아의 핸드백도 챙겨 들었다.

"나중에 잃어버린 걸 알면 또 찾을 텐데."


한 손으로는 레아의 소지품들을 안전하게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간을 열었다. 푸른빛의 찬란한 빛줄기가 사무실 안에 펼쳐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피터는 한숨을 쉬며 레아를 뒤쫓아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들 눈에는 내가 그래도 명색이 이 회사 대표인데 … 하이고 내 운명아..”


그의 뒤로 맨해튼의 불빛이 반짝이는 사무실이 고요히 남겨졌다.


[그 시간 Lancaster]


줄리안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 그 집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릴 거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의 순간이 찾아왔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안개 같은 비가 온몸을 덮었다.

급기야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룩주룩 내리는 비로 바뀌어 버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줄리안은 자신의 성급했던 결정을 되돌아보았다. 감정에 휘둘려 행동할 때마다 늘 후회가 따라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음이 이성을 앞질러 버렸다.


"항상 이렇지..”

줄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두 번만...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더라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뛰쳐나온 집을 뒤로하고, 이제 줄리안은 어디인지도 모를 랭캐스터의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여보았지만 있는 거라고는 몇 장의 휴지가 전부였다.

지도도 없이, 돈도 없이, 따뜻한 겉옷 하나 없이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무작정 뛰쳐나온 것이다.


"제발..."

줄리안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집을 나올 거였으면 미리 준비를 할 것을. 적어도 배낭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위탁 가정에서 토마스 농장까지는 차로도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걸어서는 도저히 갈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를, 줄리안은 지금 몇 시간째 맨발로 걷고 있었다. 위탁 가정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이 살던 토마스 농장에 혼자서 오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먼 거리 때문이었다.


“해가 떠 있는 낮에... 날씨가 좋을 때 왔어야 했는데."


줄리안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2월의 차가운 비는 그의 얇은 티셔츠를 완전히 적셔버렸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해가 떠있었다면, 저 멀리 아버지 농장의 큰 헛간이 보였을 텐데. 양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그 거대한 건물이,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텐데.


"해만 떠 있었어도… 헛간이 보였을 텐데”


목이 메었다. 너무 그리웠다. 어둠 속에서도 틀림없이 저 멀리 어딘가에 서 있을 헛간을 상상하며, 줄리안은 차가운 빗속에서 잠시 멈춰 섰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숨은 헛간을 눈으로 찾았다. 그곳에는 따뜻했던 기억들이, 행복했던 순간들이 가득했다.


매일 저녁이면 농장 관리인들과 함께 가축들을 헛간으로 몰고 왔다. 소들의 느릿한 발걸음 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말들의 콧김 소리가 헛간을 가득 채우던 그 시간이 그리워졌다. 특히 지하 창고의 도구 관리는 줄리안만의 특별한 임무였다. 디아나 이모님이 설계한 이중문 덕분에 고가의 장비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고, 그곳은 오직 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헛간 뒤쪽 문 옆에는 디아나 이모님이 사용하던 아담한 오피스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이모님은 종종 광산 관련 서류를 검토하셨다. 그 방에서 줄리안은 처음으로 광산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모님은 언제나 줄리안의 미래에 대해 밝은 청사진을 그려주셨다.


"줄리안, 공부가 좋으면 공부를 하거라. 그러나 농장 일이 싫지 않으면 미리 일을 배워두는 것도 좋을 거야. 내가” 광산 일도 가르쳐주마.”


디아나 이모님이 줄리안의 진로에 대해 얘기를 할 때마다 옆에서 거들던 양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어차피 우리가 늙으면 이 농장이 모두 네 소관이 될 테니 미리미리 생각해 놓는 것도 좋지.”


무뚝뚝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양아버지는 어린 줄리안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늘 곁에서 많은 말을 해 주셨다. 사업 미팅이든, 농장 순찰이든, 어디를 가던지 줄리안을 데리고 다니셨다. 말씀은 적으셨지만, 줄리안을 향한 눈빛만큼은 언제나 따뜻했다.


일곱 살에 이 농장에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열네 살 생일이 얼마 안 남았던 그 비극적인 날까지, 토마스 농장은 줄리안의 전부였다.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며 농장을 이어받아 경영하는 것, 그것이 줄리안의 꿈이었다. 디아나 이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학에 가서 광산 경영도 배우고, 양아버지처럼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의 미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줄리안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흘렀다. 차가운 빗방울이 그의 눈물을 가려주었다.


토마스 농장의 펜스를 붙잡은 줄리안의 손이 떨렸다. 한때는 자신의 집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곳은... 아직도 내 집인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진정한 가족의 온기를 떠올렸다. 차가운 펜스를 붙잡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마치 그날의 마지막 작별인사처럼 느껴졌다.


투두둑 투두둑-

내리던 빗방울이 어느새 점점 더 굵어졌다.


"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네."


가로등 하나 없는 농장가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하늘 아래, 줄리안은 온통 흠뻑 젖은 채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간간이 지나가던 자동차 불빛마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겉옷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준비 없이 뛰쳐나온 자신의 결정이 자꾸만 후회되었다. 비상용 가방 하나 준비하지 못한 것도, 몇 푼의 돈이라도 모아두지 못한 것도 모두 후회가 되었다. 양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 펜스 앞에 멈춰 선 것조차 이제는 후회될 뿐이었다.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신은 닳은 운동화 안에서 발가락이 쓰라렸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발바닥과 발꿈치가 모두 부어올라 있었다.


'이러다 발톱이라도 빠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구타로 얻은 상처들이 온몸 곳곳에서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가운 빗속에서 줄리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있다가 잠이 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아도...'


죽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밤중에 지나가는 트럭이 자신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치고 지나가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빠를 테고, 맞아 죽는 것보다는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이왕 집을 나온 거... 차라리...'


무작정 뛰쳐나온 것은 순간의 결정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시골 농장의 밤길에는 속도 제한 표시를 무시하고 쌩쌩 달리는 트럭들이 많이 있어서 위험하다고 했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그런 트럭 한대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비가 와서 시야가 더욱 제한되어있는 오늘 같은 날이면 길에서 사람이 차에 치이는 사고가 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줄리안은 그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깜깜한 시골길에 조아리고 앉아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야속하게도 트럭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차가 안 다니지?’

날이 안 좋고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날이 좋을 때보다야 지나다니는 차들이 적을 테지만 오늘은 유난히 조용하다.

트럭은커녕 자동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배는 고프고 춥기까지 했다.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줄리안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려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문득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토마스 농장이 꺾이는 지점 아래에는 아버지의 자수정 채굴 광산이 있었는데…’

토마스 농장 소유였던 자수정 채굴 광산 근처에는 작은 노동자 마을이 있었다. 농장 관리인들과는 달리, 광산 노동자들은 채굴장 근처의 작은 빌리지에 모여 살았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양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몇 번 가본 적이 없던지라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당장 그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두워진 길을 따라 걸으며 줄리안의 마음속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검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토마스 농장의 펜스를 따라 걸으며,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채굴장까지만 가보자..."


추위 때문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사고로 죽으면... 역시 사람들은 나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할 까?’

줄리안은 계속 걸으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다.

‘트럭이 지나간다면..’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트럭, 순간적인 충격, 죽음, 그리고 영원한 해방.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상하게도 줄리안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럭이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뛰어드는 거야. 머뭇거리다가 실수하면 안 된다.’


가출을 해 보니 뭔가를 저지를 때는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집 남자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 후에는 살기 위해서 도망을 쳤다. 살아보겠다고 도망쳐 나왔는데도 준비 없이 나와 후회하고 있다. 그러니 죽음만큼은 완벽해야 했다. 죽음에 실패하면 더 큰 고통만 남을지도 모르니까.

줄리안은 머릿속으로 끓임 없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 트럭 앞으로 뛰어가면 운전자가 자신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운전대를 꺾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틈이 없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 전속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처량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던 줄리안은 춥고 어두운 길을 걸으며 간절히 바랐다.

‘트럭만 나타나라..’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트럭이 나타나주길.

그래서 죽음에 성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채굴장으로 가는 길은 희미한 희망과 짙은 절망이 뒤섞인 길이었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가는 발걸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기도 했다.


'오늘 못 죽으면 내일 죽으면 되지. 어차피 나한텐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줄리안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목소리가 끊임없이 싸웠다. 하나는 살기 위해 채굴장을 찾아보라는 속삭이는 목소리, 다른 하나는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외치는 목소리.


그 사이에서 그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마치 달라붙은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죽으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죽는다는 것이 막연하지 않아 졌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게 지금 이 고통 속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다.

단지, 한 번도 죽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두려울 뿐이었다.


‘어떻게든 죽을 수 있겠지. 곧… 그렇게 될 거야.’


이렇게 자신을 달래며 걷는 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해서 죽음에 대한 환상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달콤한 독과 같았다.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고통스럽지만 해방적인 그런 것. 삶보다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초라해서 눈물만 흘렀다.

비 오는 겨울의 시골 밤길을 울며 홀로 걷고 있는 줄리안은 아직 열네 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랭캐스터의 어두운 시골길에는 차량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 오늘따라 차가 한대도 안 지나가는 거지?”


깊어가는 밤, 몇 시간을 걸었는지도 모를 만큼 걷는 동안 트럭은커녕 자동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줄리안은 계속해서 토마스 농장의 익숙한 펜스를 따라 걸었다. 펜스가 꺾이는 지점까지 오자,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가늠했다.


오른쪽으로 농장을 두고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가면 나타나는 언덕. 그 언덕 어딘가에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채굴촌이 있었다는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위치를 그려보려 했지만, 어둠과 빗줄기가 시야를 가렸다.


'언덕 위였나... 아니면 아래쪽이었나…?’


아까보다 빗줄기가 굵어져서 이제는 쏟아지는 비에 눈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채굴촌의 불빛이라도 보이길 바라며 눈을 찌푸렸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언덕을 따라 내려왔지만, 기대했던 빌리지의 불빛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고, 거센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걷다 보니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 이제는 토마스 농장이 있던 방향조차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채 주변을 계속 걸어가던 그때,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건물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접근 금지. 개인 소유=


줄리안은 '접근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물로 다가갔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 이라기보다는 다른 용도로 보였다. 다행히 담장이 높지 않아 기운이 빠져있는 줄리안의 어설픈 도움닫기로도 넘어갈 수가 있었다. 줄리안은 담장을 넘기 위해 몇 번을 뛰어 담장에 배를 걸친 후 몸을 밀어서 안쪽으로 굴러 들어갈 수 있었다. 안쪽에는 벽돌로 지어진 낮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건물 크기로 봤을 때 유치원이나 상점은 아닌 것 같았다. 간판도 없고 특이하게도 창문도 없었다. 개인 소유라고 되어있는 걸 보면 창고일 수도 있었다.

주위에 다른 집도 없고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채굴촌은 아닌 것 같은데’


줄리안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떠올렸다.

건물을 지을 때는 안전을 위해 반드시 입구나 창문처럼 밖과 통하는 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 창문이 없다는 건 이 법을 어겼거나 특수 목적 건물이라는 의미였다.


담장을 넘어온 줄리안은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한 바퀴 더 돌았다. 입구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진짜 문이 아닌 벽에 문으로 보이도록 디자인만 해놓은 가짜 문이었다.


열릴 리 없는 가짜 문 앞에 선 줄리안의 손끝이 차가운 벽면을 더듬었다.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도 이 문이 눈속임을 위한 단순한 장식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건축가가 미학적 목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 가짜 문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숨어있었다.


'눈 속임용 문이라면...'


줄리안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가짜 문은 종종 진짜 입구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로 사용된다. 보안이 중요한 시설일수록 이런 기만적 건축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벽면을 쓸어내리며, 줄리안은 건물을 한 바퀴, 두 바퀴 돌았다. 빗물에 젖은 벽돌의 거친 표면이 손끝을 스치다가, 문득 다른 질감이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길게 이어진 미세한 홈이었다.


'찾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건물의 벽면과 완벽하게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문. 낮이었다 해도, 의도적으로 찾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정교하게 위장된 입구였다.


이런 종류의 문은 줄리안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토마스 농장의 헛간에 있던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중문'. 보안이 필요한 귀중품이나 서류들을 숨기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출입구. 겉으로는 평범한 벽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진짜 문이 숨겨져 있는 교묘한 구조물이었다. 비밀 문 전문가나 문을 직접 제작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입구.


줄리안의 손끝이 벽면의 홈을 더듬으며, 디아나 이모님과 나눴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디아나 이모님, 이 이중문은 어떻게 여는 거예요?"


어린 줄리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던 그날.

디아나 이모님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비밀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이중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단다. 우리 농장의 것처럼 바닥에 무게를 실어 스프링이 해체되면 열리는 방식도 있고, 왼쪽으로 밀면 반동으로 오른쪽이 열리는 미닫이식도 있지. 심지어 보이지 않는 홈에 열쇠를 꽂아 여는 방식도 있어."


양아버지의 헛간 지하에 있던 이중문은 수십만 달러어치의 농기구와 귀중한 장비들을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이었다. 디아나 이모님이 직접 설계한 그 문은 이중문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였다. 바닥에 정확한 무게를 가하면 스프링이 해제되어 첫 번째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진짜 문이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그럼 이 문은 어떻게 숨겨져 있는 거예요?"


자신이 어릴 때 디아나 이모님에게 했던 질문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겉은 외부 벽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서 위장해 놓았지. 그래서 누가 봐도 벽 사이에 문이 있는지 모를 거야."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평소에는 바퀴 달린 가구로 가려두고 필요할 때만 열었던 그 문. 지금 눈앞의 이 건물에도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비슷한 이중문이 있다는 사실이 줄리안을 놀라게 했다.


'여기도 비싼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일까?'

줄리안은 생각에 잠겼다.

'디아나 이모님 말고도 이런 이중문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니...'


줄리안은 디아나 이모가 떠오르자 다시 궁금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외출을 하시면서 어머니로부터 디아나 이모님이 오실 거라는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날 디아나 이모님은 왜 오지 않으신 걸까?’


양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도 자신의 집에 정기적으로 놀러 오시지는 않았지만 한번 오면 몇 달간 머물다 가셨었다.

‘디아나 이모님은 부모님의 사고를 아실까?’

이모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아마도 모르는 것 같다. 이모님이라면 부모님의 장례식에 안 오셨을 리가 없다. 만일 알았다면 혼자 남은 자신을 위해 틀림없이 도움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모님이 오신다면 자신을 그 지옥 같은 남자의 손에서 구해주실 텐데..


‘이모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지만 줄리안의 손끝은 쉴 새 없이 차가운 벽면의 홈을 더듬었다. 벽에 길게 파인 홈의 형태로 보아, 이 문은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어 밀어야 열리는 구조인 듯했다. 디아나 이모님이 설명해 주었던 이중문의 원리가 떠올랐다.


'이런 구조라면...'


랭캐스터 지역은 예로부터 자수정과 철광석이 풍부한 곳이었다. 줄리안의 머릿속에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양아버지와 함께 광산을 둘러보던 날들, 채굴된 자수정의 보랏빛 광채가 햇빛에 반짝이던 순간들.

'이 창고도 자수정을 보관하는 곳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줄리안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귀중품 보관소라면 당연히 보안 시스템이 갖춰져 있을 것이다. 문을 열려는 순간 요란한 알람이 울린다면... 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알람이 울리면... 경찰이 올 거야.'


경찰이 오면 그다음 수순은 뻔했다. 다시 그 남자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줄리안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위탁부의 험상궂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분노에 찬 눈빛, 휘두르는 주먹, 그리고 끝없는 모욕적인 말들.


'차라리 여기서 얼어 죽는 게 차에 치어 죽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다행히도 건물은 지붕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비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줄리안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벽에 바짝 붙었다. 차가운 벽돌의 감촉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죽을 결심을 하면서도 몸은 추위 앞에서 자꾸 움츠려든다.


끝없이 내리는 비를 보면서 줄리안은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았다. 비가 그친다 한들 갈 곳은 없었다. 토마스 농장도, 위탁가정도, 어느 곳 하나 자신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줄리안은 주저앉아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젖은 옷에서는 냉기가 스며들었고, 온몸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였다.

엄마.. 아버지.. 흑흑


고개를 파묻은 채 눈을 감자, 양부모님의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억마저 이제는 아픔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랭캐스터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한 소년의 흐느낌만이 희미하게 울렸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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