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맨해튼의 늦은 밤.
사무실에서는 세 사람이 지도를 놓고 마지막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실내의 은은한 조명 아래 피터가 가지고 온 군사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 마지막 좌표가 가장 확실한 장소라는 거지?”
지도 위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레아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좋아. 내가 이쪽으로 갈게.”
에이든이 오랜 미팅으로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돌리며 씩 웃었다.
“나는 위 쪽 두 지역을 훑어보고 레아 쪽으로 합류할게. 오랜만에 흥미 있는 사냥이 될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나머지 두 지역을 맡지.”
피터가 정장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레아님, 도착하시면 감각부터 여셔야 합니다. 제가 만든 새 장비로 측정한 것이 맞다면 그곳 공간 흐름이 미세하게 비틀려 있을 거예요. 먼저 공간 압력을 확인하시고 신호를 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이를 부를까?’
시간의 흐름을 읽는 데는 카이가 최고의 전문가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에도 오류이면 카이의 실망이 너무 클 거야. 나중에… 내 감각으로 안되면 그때 부르자.’
“카이에게는 나중에 알릴까?”
“그러죠, 레아님. 장소가 확정된 후에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매번 실패를 할 때마다 카이는 무기력해 졌다.
타락한 인간들이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는데도 시간의 수호자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며 카이는 아직도 자책감에 빠져있었다.
제발… 이번에는 찾아낼 수 있기를.
그래서 디아나의 원수를 갚아주고 카이의 무기력함도 회복될 수 있기를.
세 사람은 기대감에 서로를 바라보며 짧은 미소를 교환했다.
“자 그럼 나는 먼저 출발할게.”
레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좋은 소식으로 만나자.”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이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밤, 그들은 마침내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Lancaster]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열리는 시간의 문.
그것은 물리의 법칙을 거스르는 순간이자, 시공간의 찢어짐이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인간 세계의 시간과 공간 사이에 생긴 이런 강제적인 균열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이 만들어 내는 파문처럼, 공간의 문과는 다르게, 시간의 문이 열린 자리에는 미세한 진동이 남는다.
랭캐스터의 밤은 깊어져 있었다.
이곳 랭캐스터의 밤은 구름에 가려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짙었다.
“뉴욕 날씨는 괜찮았는데 …”
이곳은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구나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어서 공기의 흐름이 불규칙했다. 이런 날씨라면 보통 시공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레아는 공간을 열어 랭캐스터에 도착한 즉시 이곳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챘다.
레아는 감각을 완전히 열기도 전에 온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공기의 압력이 확연히 달랐다. 마치 수면 아래 깊이 잠긴 듯한, 묵직하면서도 불안정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여기.. 구나.’
이 근처 어디엔가에서 강제로 시간의 문이 열였었을 것이다. 그 영향으로 아직도 균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간의 문이 강제로 자신의 친구 디아나는 소멸되었다.
디아나를 떠올리니 다시 심장이 아려왔다.
감았던 눈을 뜬 레아는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남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노, 슬픔.
디아나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레아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못한 채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마침내 마음을 추스르고 감각을 활짝 열었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며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예민한 감각이 전해졌다.
‘이곳이 정말 맞구나.. 디아나.’
시간의 문을 열고 지키지 못했을 디아나의 죽음은 사실상 소멸이었을 것이다. 신화적 존재인 자신들은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벌을 받고 지금껏 인간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 허락될 온전한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 진정한 죽음이 되지 못했을 디아나가 받은 벌은…
‘소멸..이었겠지..’
죽음이 비켜가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이자 형벌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날들을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수호하는 일. 그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죽음 뒤에 있을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자신들에게 죽음은 그 무엇보다 간절히 갈망하는 소원이다. 자신들에게는 이렇게도 간절한 죽음이 인간들에게는 두려움 이라니.
레아는 겨우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이 땅에서의 짧은 시간들을 허무와 방황과 죄악으로 사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죄의 짐을 지고 죽음의 문을 열게 될 사람들이 안타깝다.
죽음은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관문과도 같다.
그러나 죄의 짐을 가지고는 왔던 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나도.. 돌아가고 싶다’
언제일까.. 언제 나에게도 죽음이 허락될까.
죽음을 기다리며 함께 살던 동료들은 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과오들을 범한 동료들에게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소멸될 뿐이었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 무서운 형벌이다.
디아나…
그러나 레아는 작은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디아나는 소멸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죽음의 문을 열 자격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 희미한 가능성이 레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디아나가 죽고 난 후 타락한 시간 여행자들을 소환하는 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있다.
과거로 간 시간여행자들은 반드시 같은 문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다른 문이 열렸다는 것은 그 여행자가 과거가 아닌 곳에서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과거가 아닌 시간에서 돌아왔다는 의미는… 과거로 간 놈들이 과거에서 다시 미래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미래로 갈 수 있었을까…’
시간 여행의 기본 원칙을 깨고 미래로 이동한 자들의 정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디아나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이 모든 수수께끼가 이곳, 랭캐스터에서 시작 되었다.
시간의 문은 창조자가 정교하게 설계한 복잡한 메커니즘이다. 시간의 문을 넘을 때 출발 시점에서 정확한 좌표와 시간을 미리 설정해 두지 않으면 돌아올 때 그 문이 어디서 열릴지 예축할 수 없다. 마치 어둠 속에서 온 힘을 다해서 던진 돌이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에이든, 피터, 찾았어. 이곳이야. 마지막 지표한. 여기가 맞아-
감각을 열어 메시지를 보낸 레아는 주변을 살폈다. 시공간의 균형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지점에서 수상한 창고 건물을 발견했다.
‘이거...? 여기에 뭔가가 있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어 놓다니. 우리가 상대할 놈은 그리 똑똑하지 않을지도?”
건물 앞에서 레아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비가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지붕 처마 아래 웅크리고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키가 꽤 커 보이는 남자의 형체였다.
레아는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특별한 감각을 열어 상대를 탐지하기 시작했다. 시간의 문이 열렸던 장소인 만큼, 이곳에서 어떤 비정상적인 존재와 마주칠지 알 수 없었다.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앞으로 뻗어 감각의 촉수를 보내자, 젊은 남자의 생체 신호가 잡혔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이건…’
이런 날씨에 저 상태로 오래 있었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레아! 멈춰!!”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레아의 앞에 갑자기 에이든이 나타났다.
차가운 빗줄이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갑자기 나타난 에이든이 레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레아는 그제야 자신이 무의식 중에 웅크린 소년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는 걸을 깨달았다.
“아.. 에이든” 뒤로 물러서며 레아가 중얼거렸다.
“별 뜻은 없었어. 저기 앉아있는 사람의 바이탈이 너무 약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유난히 뛰어난 레아이지만 그녀의 신체 능력은 평범한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주변 상황을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별 뜻 없이 움직이는 거. 그게 바로 문제라고.”
에이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네가 계획을 가지고 낯선 남자를 향해 움직였다면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으… 잔소리 대마왕.’
레아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딱히 에이든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창고 건물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서 얼굴을 확인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인데? 얼굴이 어려.”
멀리서 봤을 때는 덩치가 있고 키가 커서 젊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눈을 감고 있어도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에이든은 소년을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열이 많이 나네.. 잠이 든 게 아니야.’
보호자가 있을 텐데.. 어쩌지? 할 수 없다.
에이든은 어디로든 연락할 곳을 알아내기 위해 지체 없이 소년의 손을 잡았다.
빗 속에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소년의 몸은 열로 펄펄 끓고 있었다. 신체 접촉으로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발현되자 에이든의 감각 속으로 소년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아직 어린데.. 이런 사연이.. 무엇보다 아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이대로 두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에이든의 눈빛이 걱정스럽게 변했다.
“레아, 공간을 크게 열어줘. 비를 피해서 안으로 옮겨야겠어. 열이 너무 높아.”
‘뭐지?’
레아의 연락을 받고 막 장소에 도착한 피터는 그의 동료들이 낯선 소년 주위에 모여있는 광경을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에이든의 특별한 능력-피부 접촉을 통해 상대의 기억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소년의 정보를 알아내고 있었다. 에이든의 굳어진 표정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음을 암시했다.
“벌써 확인해봤어?”
피터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이 놈이야? 이놈이 우리가 찾는 타락한 시간 여행자야?”
에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군. 그런데 …이 소년이 디아나를 알고 있는데? 그리고, 사연이 좀 있는 것 같네.”
공간을 열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레아는 ‘디아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 사람이 디아나를 알고 있다고? 빨리 안으로 옮겨줘!”
레아의 목소리에는 절박감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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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지?’
줄리안의 흐릿한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낯선 공간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으윽”
‘내가 결국 트럭에 치였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마치 트럭에 치인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츠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걸 보니 살아있나 보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거친 콘크리트 바닥의 질감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줄리안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운 생각이 밀려왔다.
‘목이 아파.’
“깨어났나? 정신이 들어? 열은 내렸으니 괜찮을 거다.”
줄리안의 눈앞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낯선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자 줄리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누구..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드디어 일어났네? 난 너 정말 죽은 줄 알았다니까!”
“멀쩡히 숨 쉬고 있었는데 죽긴 무슨… 넌 왜 자꾸 죽었다고 그래?”
“아니 뇌사! 뇌사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내가 열심히 기운을 불어넣어줬는데도 안 깨어나길래 혹시나 했지. 요즘 젊은이들 체력이 많이 약하다니까!”
에이든이 한숨을 쉬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피터는 입을 삐죽거리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뇌사’ 발언으로 여러 번 구박을 받은 터라 더는 말을 보내지 않았다.
“아까는 식물인간 이라더니, 이제는 뇌사라…” 에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의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거라고! 내가 메이요 클리닉에서 연수를..” 피터가 항변하려고 했지만 에이든의 가소로운 시선에 막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줄리안은 정신이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낯선 공간과 그 안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손전등 불빛 아래, 세 명의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안 눈앞으로 한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지만 따뜻한 목소리였고, 그 뒤에 서 있는 다른 남자는 군인처럼 딱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여자는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했다.
‘사람이.. 어떻게, 왜 저렇게 희미해 보이지? 내 기분 탓인가?’
이들의 잘 빠진 정장 차림은 이 랭캐스터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 구세요?”
줄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와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리 때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예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이제부터 질문은 내가 하지.”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권위가 배어 있었다.
“이름이 뭐야, 꼬마?”
“줄.. 리안입니다.”
목이 바짝 말랐다.
피터와 레아는 눈빛을 교환했다. 에이든이 이미 소년의 기억을 읽어 전달했기에, 그들은 줄리안의 이름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과거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양부모의 갑자스러운 사망, 갑자기 나타났다가 어디로 인가 사라져 버린 삼촌, 그리고 학대받던 위탁가정에서의 생활까지.
이 꼬마가 바로 디아나가 소멸되기 전에 부탁한다고 했던 그 줄리안 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줄리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피터와 줄리안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이어졌다. 피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줄리안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줄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길을.. 잃었어요. 채굴 노동자들이 사는 빌리지를 찾고 있었는데, 비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에이든은 피터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소년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지만,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다.
“아니,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고.”
피터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우연히 온 게 아니잖아?”
“네? 그게, 무슨..”
줄리안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빌리지를 찾아서..”
에이든은 소년의 방어적인 태도를 관찰했다.
이미 소년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읽었기에, 줄리안이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멍든 상처들과 소진된 기력의 이유를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으려 했다. 어른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피터는 줄리안의 완간한 태도에 승부욕이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 안 하나, 꼬마? 여기에는 어쩌다가 오게 된 거야? 너 부모님 없어??”
‘누가 군인 출신 아니라고 할까 봐.. 휴~’
에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피터의 강압적인 태도를 쳐다봤다.
수백 년의 군 생화이 몸에 밴 탓일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걸까. 레아 앞에서야 순한 강아지 모습이지만 피터의 성정은 원래 저렇게도 거칠다.
전쟁요정도 요정이라면 요정 일 텐데 저 무식한 전쟁 요정은 사람을 홀리며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보다 못한 에이든은 움츠러드는 소년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름이, 줄리안이라고?”
그는 의도적으로 피터와는 반대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 음.. 이 건물에는 정말 우연히 오게 된 거라는 말이지?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찾을 일이 있어서 이 근처에 왔다가 네가 건물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안으로 옮긴 거야. 몸은 좀 괜찮니?”
레아는 에이든의 말에 피식 웃었다.
‘다 알면서. 애쓴다..’
레아는 에이든의 유치한 어른 놀이는 우스웠지만 자신도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소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줄리안의 몸 상태는 말 그대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뼈도 두어 군데 부러져 있는 듯했다.
‘죽을 만큼 안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줄리안은 당장의 응급처치가 필요해 보였다.
‘돌아가기 전에 뼈는 붙여줘야겠다. 저대로 두면 통증이 말도 못 할 거야’
그러나 레아는 줄리안의 몸에 난 상처보다 깊숙히 자리잡은 절망과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힌 소년의 마음이 더 걱정이었다.
에이든은 소년이 잠들어 있는 동안 소년의 손을 잡고 그의 기억 속으로 깊이 들어갔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 사이에서 디아나의 모습이 불현듯 나타났다. 동시에 디아나가 소멸될 때 부탁했다던 소년의 이름이 줄리안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토마스 농장의 헛간에서 줄리안에게 이중문의 원리를 설명하는 디아나, 줄리안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남자와 함께 농장을 둘러보며 미소 짓는 디아나. 소년은 그녀를 ‘디아나 이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에이든으로부터 소년이 디아나를 가족처럼 부르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레아는 충격을 받아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알던 디아나는 철저하게 혼자이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가족도, 친밀한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던 디아나가 …
소멸되어 가던 디아나로부터 줄리안이라는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웠지만 소년의 기억 속에서 디아나가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간신히 타락한 시간 여행자의 실마리를 찾아온 이 시간에,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디아나와 연관된 소년을 만난다는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소년의 기억에서 디아나의 흔적을 발견한 에이든은 소년의 기억을 더 깊이 파고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 했지만 타락한 시간 여행자에 대한 단서나 흔적은 소년의 기억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소년은 디아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부모님의 장례식에 왜 디아나 이모님은 오지 않았는지 궁금해했고 속상해했던 기억의 흔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디아나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시간 여행자의 접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레아는 힘이 빠졌다. 또다시 막다른 길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아이의 양부모가 디아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았어. 갑작스러운 사고였던 모양인데… 이게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뭔가 의심스럽지 않아?”
“의심스럽다고 해도 이 아이가 아는 건 없다며.”
줄리안이 눈을 떴을 때 디아나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디아나가 죽은지도 모르는 아이에게는 더 이상 물어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양부모의 죽음과 같은 시기에 당한 일이라는 얘기까지 굳이 해 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몸과 마음이 상처 투성이로 얼룩진 아이에게 또 다른 슬픔을 얹어줄 이유는 없다.
결국 아이에게는 디아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줄리안이라고 했지? 너… 갈 곳은 있니? 집은 어디야?”
“아… 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하는 줄리안에게 피터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갈 곳 없으면 우리와 함께 갈 테냐?”
“네??!?”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제안을 한다.
물론 자신이 갈 곳은 없다. 다시 위탁 가정 아저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줄리안이 멍한 얼굴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피터 눈이 줄리안 뒤쪽 창고 구석으로 날카롭게 꽂혔다.
‘저건 또 뭐야?’
한참을 무서운 기세로 구석을 노려보던 피터는 다시 줄리안에게 물었다.
“지금 결정하면 우리가 너를 데리고 가줄 수 있어. 살 집도 마련해 주마. 뉴욕에서 사립학교를 다니게 해 주마. 너를 괴롭힐 사람도 없어. 어때?”
피터의 말에 줄리안은 멍 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왜 저를 데리고 가려고 하세요? 가기 싫어요!”
갑자기 나타나 줄리안을 집에서 쫓아낸 양아버지의 형제, 자신의 생부라는 사람의 형제라며 나타났다가 줄리안의 재산을 모두 들고 사라진 한국 삼촌, 자신을 매일 폭행했던 위탁 가정 남자.. 어른들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줄리안은 피터의 말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또 갑자기 나타난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따라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이든은 줄리안의 손을 잡고 줄리안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상처가 너무 많구나.’
어떻게든 줄리안을 뉴욕으로 데리고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에게는 믿을만한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가 자신들을 당장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에이든은 줄리안의 피곤한 얼굴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안, 그레이스 선생님과 션 선생님께 연락을 해 두었단다. 곧 이리로 오실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를 따라가지 않아도 좋아.” 에이든은 잠시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래이스 선생님에게 이곳에서 우리를 만났다는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을 거야. 그냥 도망 나와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만 하렴.”
줄리안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내가 도망 나온 아이라는 걸 알아? 이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뭐라고? 누구?
“그레이스 선생님이요? 선생님을 아세요? 여기에 오실 거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에이든은 소년의 기억을 읽으며 그의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줄리안이 도움을 청할 만한 어른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줄리안의 기억 속 현재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어른들은 그야말로 몹쓸 인간들이었다. 이다지도 삶이 고달픈 아이가 자신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나마 줄리안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그레이스와 션이라는 학교 선생님 부부만이 이 소년이 신뢰하는 유일한 어른들이었다. 특별한 접점은 없었지만 줄리안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좋은 어른들]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이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레이스 선생님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어.”
에이든은 지친 모습의 소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기운 없을 테니 말 많이 하지 마라. 우리는 이만 가봐야 해. 선생님 올 때까지 이 안에서 기다리렴.”
...같은 공간안에서 각자가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줄리안.
-줄리안 뒤로 보이는 창고 구석을 뚫어지게 노려보고있는 피터.
-여전히 줄리안을 데리고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에이든.
-줄리안의 마음에 여전히 죽고싶다는 생각을 읽어내며 걱정하는 레아.
레아는 줄리안의 흉부에서 느껴지는 골절을 고쳐주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꼬마야. 가슴 아래가 많이 아프지? 네가 우리와 따라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 상처는 .. 안타깝지만 그냥 두고 갈께. 그게, 지금은 너에게 유리 할꺼야.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병원을 가면 치료할 수 있어."
레아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줄리안을 억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소년을 이렇게 만든 남자의 집으로 되 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디아나의 부탁을 생각하면 당장 아이를 데려가야 하겠지만 ...
'그나마 이게 최선이구나. 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