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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희 Jun 25. 2024

문수동떡(댁)이야기

사진: 네이버블러그


문수동떡은 90세가 되신 마을 어르신입니다. 이분이 겪으신 6·25 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이후, 변산 빨치산 떼가 방망이를 옆에 차고 온 마을 사람들을 휘두르고 다녔다. 농사지어 놓은 목화솜도 수탈해 가고, 애써 지은곡식, 서숙 모가지까지 수를 세어 놓고, 먹지 못 하게 하는 파렴치한 횡포가 극에 달했었다. 그때 마을 주민들은 생사가 아슬하게 갈리는 공포의 시기를 살았었고, 이때를 인공 때라고 불렀다.


우리 집은 하서면 백련 리 문수 동 뒷재라는 곳이었다. 아버지와 행안 면서기였던 작은아버지는 우익이었다. 한 동네에는 좌익이었던 자가 살았었다. 이자는 마을을 이 잡듯이 해서 우익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서슬 퍼런 빨치산 앞잡이였다. 행안 면서기였던 작은아버지는 좌익의 타깃이 되자 마을을 떠나 은둔 생활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도 빨치산이 두려워서 집에 오시지를 못 하였다. 가족들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미쳐서 맘을 놓고 살 수가 없게 되는 두려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마음씨가 참 좋고 인심이 후한 우리 어머니를 보고 좌익들은 우리 가족을 살려줬었다.


살기등등한 좌익들이 산에서 내려와 온 마을을 들쑤시는 횡포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빨리 어딘가에 숨어야만 했었다. 어머니와 나는 집 앞 산으로 도망쳐 산중턱에 숨었고, 그곳에서 집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방안에 그냥 계셨는데, 3살짜리 동생은 마루에 나와 어머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17살이었던 나는 너무 두려워서 3살짜리 동생을 업고 올 생각은 엄두도 못 냈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산을 내려가서 마루에서 울고 있던 동생을 업고 다시 산으로 올라오셨다. 강인한 모성애를 보이셨던 나의 어머니셨다.

사진: 네이버블러그

무더운 여름을 지나 9월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겨우 초상은 치렀지만 혼백을 치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 동진 면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3년을 살다가 빨치산 좌익들이 거의 사라질 무렵, 하서면 백련 리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어라. 지금 생각하면 치가 떨려 말이 잘 안 나오는 무서운 세상이었응게.”


이렇게 문수동떡 어르신이 겪으셨던 6·25 때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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