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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렌 Sep 08. 2022

자기 파괴를 멈추기 위한 수단, 창작과 예술

종말인의 우울 극복 도전기 #그림수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하늘과 바다 (이세렌 作) 캔버스에 유채 P25호 Sold Out


   인간은 그저 세상에 태어났을 뿐 의미 없는 존재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에겐 모두 삶을 윤택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존재 이유를 만들라고 강요한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이지를 가지고 의미 있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줄 알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인간의 삶을 매우 고통스럽게 한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질문 던지기를 멈추는 사람도 있다. 사유하길 포기하고 삶의 목표를 찾지 않는 것. 그저 실재할 뿐,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그저 태어났을 뿐인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진리일까? 진리란 남이 강요한 가치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누군가 광신해 마지않는 종교적 가치도, 21세기에 자리 잡은, 다수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과학적 가치도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잉태한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없다. 따라서 진리보다는 진실성이 중요하다.


   혹자는 말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반드시 삶의 목적이 필요한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자. 흐르는 대로 사는 것도 고귀한 인생이다. 생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틀림없이 삶의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거대한 타자가 강요한 가치라고.


   이 주장이 전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자가 강요한다는 이유로 삶의 목표를 찾는다면 자기 주도적인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흐르는 대로 부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고귀한가? 신탁에 휘둘려 제 눈을 도려낸 오이디푸스와 같은 운명론자가 과연 거룩한가? 고귀한 삶이란 결코 타인보다 나은 삶이 아니다. 진실을 마주하며 매일 끊임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기 삶을 긍정하고 어제의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내는 인간이 고결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결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가? 니체는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타성과 관성이 인생을 지배하게 두지 말라. 누구나 열정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열정이 이끄는 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찰나를 살지만 삶을 하나의 예술로 완성하는 사람이 있다. 무한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기억하며, 나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람. 자칫하면 자기 파괴적으로 빠질 수 있는 이 무한한 삶의 고통을, 본인의 실재를 수없이 극복하는 존재. 인권은 노예의 반란 덕택이라는 말이 있다. 무력한 나 자신을 전복하는 자만이 인생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창조란 고통 끝에 얻어낸 달콤한 과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찰나를 살지만, 창조 정신을 위시하여 삶을 예술로 만드는 자가 고결하다. 예술이란 인간의 본성이다. 나는 나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 창작과 예술을 택했다. 나의 열정은 날 것과 같은 인간의 본성,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내 과업은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돕는다. 그 사실은 우울과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쉼 없이 구해준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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