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의 고통을 그대로 경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고통에 긍정적인 이름을 붙여주곤 한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고 부르거나, 아픔을 성장의 동력이라고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은 모두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노력이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고통은 힘든 것이다. 아픈 것이다. 괴로운 것이다.
물론 위약효과를 느끼기도 한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강해질 나를 떠올리고 있자니, 마치 현재의 고통이 성장통이라도 되는 것마냥 긍정적인 마음이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리라. 다만 분명히 거짓말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삶 자체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실 갓난아기도 할 줄 아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거짓말들이 우리가 그 방법을 망각하도록 유도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무의식 속 깊숙한 곳에 순수한 경험의 의지를 묻어두고, 피상적인 거짓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인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삶의 진리의 단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번민과 그에 수반하는 고통을 경험해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누군가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용되는 사람들도 대부분 누군가를 인용하였다. 역사적으로 진실된 철학자가 몇명 되지 않는 이유이다.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의 권위나 명예에 의존한다. 심지어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보통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수많은 다른 이들의 명예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대표로 무책임한 사람이 당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사색하지 않으며 말하기와 행동하기를 즐겨한다. 그 중 가장 즐겨하는 행동은 바로 권세를 뽐내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정적을 부당히 처벌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요즘에는 이러한 행태가 심해져, 무책임한 사람들이 우후죽순 조직을 창설해 지지자들을 선동한다. 이것이 정당과 시민단체의 진실이다. 그들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의 지지로 밥을 먹을 권리를 획득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광신도처럼 그들을 따른다. 그들에게 군과 경찰이라는 조직화된 물리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놓는다. 이러한 물리력은 무책임하게 작동하게 되는데, 무책임한 인간들이 무책임한 인간들에게 내어놓은 것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다 하더라도, 최초로 인용된 자는 현인이니 괜찮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책임의 고유한 성질을 무시해야만 성립하는 주장이다. 시대와 환경, 이를테면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 살고있는지와 같은 상황에 따라 올바른 사고와 이에 따른 의지는 달라진다. 예전에는 옳을 수 있었던 결론이 지금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옳지 않다 하여 예전에도 옳지 않았으리라 비판할 것도 없고, 예전에 옳았던 것을 무책임하게 현재에 인용해서도 안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