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거나 "아픔 뒤에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에 위로를 받곤 한다. 이는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다. 실패를 실패로,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앞선 위로의 말들은 그 과정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삶을 더 쉽게 사는 방법은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를 외면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그것과 싸우려는 데에 너무 많은 애를 쓴다. 하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빛보다 그림자에 가깝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이 없지만, 빛이 없어도 어둠은 있다. 이 간단한 명제는 우리 삶을 너무도 잘 대변한다. 성공의 이면에는 고달픈 발버둥이 있지만, 성공이 없어도,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고달프게 발버둥 쳐야 한다. 생명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자를,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삶에 주어진 고통을 직시하고 품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찾아오는 신경증적 증세들을 나는 품으려 애쓰고 있다. 그것이 도려낼 수 없는 나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혹덩이 취급 하던 이전의 나는 지금의 나에 비해 너무나 비참했다. 고통의 이유를 찾아 고민했고, 당연하게도 이유 따윈 없었다. 이를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자 나는 피해자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생존자다. 생존의 대가를 신경증으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존과 신경증은 하나다. 떨쳐내려 애쓸수록 죽음에 가까워질 뿐이다.
그러나 나의 삶에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 나의 삶은 멈춰있는 그림이 아니다. 시간 축의 어느 범위에서, 신경증은 더 이상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시간 축을 조망하지 못하지만, 나의 정신은 그것의 존재를 비추고 있다. 이따금 명료해지는 나의 정신에게 내일의 내가 귀띔해주고 있다. "내일의 나는 생존해 있다."
찾아온 아픔에 관하여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 것. 부조리함에 합리적 잣대로 대가를 요구하지 말 것.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 살아낼 것. 그것이 한 구간의 시간을 차지하는 생명의 요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