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신? 가정파괴범? 톨스토이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
※ 이 여행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집을 다녀온 후, 저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습니다. ‘도스토옙스키를 봤다면, 톨스토이도 봐야 한다.’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 누가 더 위대한가를 놓고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두 인물. 도스토옙스키의 고통과 신앙이 머문 방을 본 이상, 이제는 톨스토이의 숨결이 남은 공간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 톨스토이 집 박물관.
담벼락을 지나 들어서니, 나지막한 2층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가가 실제로 1882년부터 1901년까지 19년간 살았던 공간.
표를 끊고 겉옷을 맡긴 뒤, 저는 천천히 톨스토이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공간은 식당이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고, 자신만의 식기들을 따로 사용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합니다. 식탁 위에는 다채로운 접시와 그릇들이 놓여 있었고, 당시의 가족 식사 풍경을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밥을 먹는 공간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부부 사이의 갈등과 화해가 오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방 안 공기조차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와 자녀들이 머물던 방은 아늑하고 정갈했습니다.
그는 친구의 딸이었던 18살의 소피아와 결혼했는데, 당시 톨스토이는 30대 중반이었습니다. 나이 차이도 컸고, 신분의 간극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소피아는 손수 자수로 집안을 꾸몄고, 톨스토이는 아내를 작품 속 인물로 등장시킬 정도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하녀, 집시 여인, 심지어 매춘부와의 관계 속에서 사생아까지 두었다고 합니다. 늘 가정적인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은 복잡하고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사랑이 오히려 서로를 갉아먹기도 했던 삶. 이 집은 그런 모순과 진심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계단 옆에는 톨스토이가 입던 외투가 걸려 있었습니다. 키가 180cm를 넘는 거구, 지금도 작지않은 키지만 당시엔 말 그대로 거인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노년기에도 근력이 뛰어났고, 농사일도 도맡아 할 정도로 강한 체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대지주 귀족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달리 그는 노동을 숭상했고, 몸으로도 철학을 실천한 작가였습니다.
2층에는 그의 서재와 작업실, 그리고 하인들의 방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책상, 펜, 손글씨 원고들. 그가 앉았던 의자에 잠시 손을 얹으며 상상해봤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서사가 이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람을, 삶을, 국가와 인간의 본질을 그토록 깊고 풍부하게 담아낸 문장이 바로 이 방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올랐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집과 비교하면 이곳은 확실히 더 크고 화려합니다. 톨스토이는 원래부터 귀족 집안의 아들, 대지주의 후계자였습니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글을 썼고, 시베리아 유형소를 다녀온 사람.
두 작가의 삶은 극명하게 달랐고, 그래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톨스토이는 문학의 신이다”라고 외쳤고, 톨스토이는 말년에 “내 작품은 태워도 좋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책은 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침대 머리맡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놓여 있었다고 하죠. 두 사람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문학으로 서로를 마주본 유일한 라이벌이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집 옆 정원을 걸었습니다. 겨울이었고,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이 정원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다고 합니다. 작품 속 문장들도, 삶에 대한 성찰도 아마 이 길을 걷는 동안 피어났겠죠.
하지만 저에게 문학적 영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 좀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문학적 재능은 없는 듯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작가의 집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문학, 영광과 결점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은 가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가는 체험이 될 겁니다.
그리고 아마… 돌아오는 길에 ‘전쟁과 평화’를 다시 펼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