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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ppel du vide Mar 02. 2023

AI 시대의 자기완결형 판단과 결정 역량 키우기

AI 시대의 자기완결형 판단과 결정 역량 키우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은 항상 가족 혹은 여러 무리들이 모여 행복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곤 했다. 미래는 언제나 희망적이었으며 보다 나은 삶은 미래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인간의 삶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더 멋진 삶을, 그리고 보다 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더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곤 하였다. 하지만 몇 십 년이 지나도 인간의 삶은 그대로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 사고의 기술이나 문명의 기술은 예전보다 더 발전했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인간의 삶은 이전과 다름없이 생존과 생명의 연장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인류 태동기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기술적 발전은 최근에 와서야 가속화되고 폭발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도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가 부족 할 뿐 그 시대에는 폭발적인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우려스러운 희망과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기술은 더 나아지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예전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회상, 과거로 돌아가고픈 늙어버린 이들의 추억팔이, 젊음은 사라지고 과거의 기억만이 남은 인간들, 인간은 보다 풍족한 인간의 삶을 만들기 위해 발전시켜온 기계와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 불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오히려 삶에 대해 불만족스럽고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 화를 내고 자신을 가혹하게 처벌하는가? 사회는, 경제는 더 많은 부유함을 쏟아냄에도 누군가는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하고 인간으로서의 행복도 잃어버린채 살아가야만 하는가? 

인간은 쓸모가 없어지면 소멸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왜 사회적 쓸모, 사회적 필요함이 없어지면 인간으로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게 되어버렸는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찾는 것은 일에서밖에 찾을 수 없을까? 

일은 사실 인간에게 있어 저주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인간에게 평생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의무를 지게 만드는데 이러한 일에 대한 부정적 의미 부여는 일에 대한 인간의 고민이 종교의 힘을 빌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이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생명을, 자신 자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한탄이다. 일은 인간에 있어 부정적이며 저주적 상징인 것은 인간이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악인은 괴로운 고통의 불길에 항상 고통으로 받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저승에서 일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좋은 음식과 저승의 삶을 즐기며 사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 모습에서도 인간의 일이란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행위일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일에 속박된 인간의 일생, 평생 일의 붙잡힌 인간의 모습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버리고 싶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거기에 대하여 사람들은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둔다. 그런 의미가 인간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의미를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AI와 4차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드디어 일에서의 해방을 만들어주게 될까? 

인간의 욕망과 소유욕에 대한 즉각적 반응, 그리고 그러한 욕구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거의 현실화된 모습을 보여주게 될 4차 산업혁명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찾아가고 자신들의 가치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해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알아야만 했던 인간들에게 더이상 일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의미를 찾아내게 만들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들은 분명 인간이 더 나은 삶의 영위하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대의적 명분 하에 각 개인들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해 발전해왔다. 대의적 명분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부여된 의미일 뿐 인간의 삶을 더 발전시킨 그 기술은 발전시킨 인간의 개인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오히려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에 더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앎은 무지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분을 자양분 삼아 더 큰 불행으로 옮겨져 버린 인간 스스로의 자위적 해석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질문을 갖는다. AI는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의 가치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AI는 항상 부족한 데이터에 시달릴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데이터는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곤 있지만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그 데이터들은 아직도 다 글로 그림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쓸모 없다고 판단되는 데이터 내용이든, 인간의 삶을 더 좋게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데이터든 그것은 AI가 인식하고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데이터일 뿐 아직 그러한 형태로 만들어지지 못한 지식 데이터들은 여전히 인간의 뇌 속에 남아있다. 그에 대한 해석들은 점차 많은 데이터를 만들어내지만 원초적 지식 데이터들은 아직도 이 세상의 온전한 데이터로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데이터의 부족으로 인해 인간은 뇌에 대한 직접적 접속을 통해 인간 내부의 데이터에 접근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 뇌 속의 전자적 데이터 형태는 불완전한 형태로 남게 될 것이다. 인간들은 불완전한 데이터를 계속해서 완전하게 데이터화 하고 AI가 이를 인식해 보다 더 인류의 삶에 더 나은 미래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AI가 더 발전하게 되면 논리적 판단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인간 내부의 데이터를 더 이상 AI가 필요로 하는 데이터 형태로 변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데이터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쓸모는 사라지게 된다.

인간을 위해 필요했었던 산업혁명은 이제 인류를 위한 혁명이 아닌 AI를 위한 혁명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AI의 구속 하에서 지배 받게 될 것이다. 인류는 자신을 위한다는 목적을 지니지만 결국에는 AI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위해 애쓴 인간으로 기억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다고 인류의 발자취에 나의 한 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인가? 왜 나는 기억되어야만 하는가? 

인간은 곧 다가올 산업혁명에 있어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AI의 판단, 다른 이들의 판단과 결정에 우리 자신을 머물게 놔두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인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 방법은 “판단과 결정의 몫을 스스로에게 남겨두는” 방법밖에 없다. 확률적 결정의 AI는 보다 더 합리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겠지만 인간은, 그들이 속한 생명계에서의 발전은 합리적인 방식이 아닌 불완전 형태의 진화와 불안정 속에서의 갈등 상황이 부딪혀 만들어진 진화의 충돌이 만들어낸 발전과 퇴보의 역사이다. 돌연변이라는 형태로 보여질 수 있는 진화라는 변화는 결국 환경의 선택을 받게 되고 환경의 변화를 자신에게 적합한 '변형'시킴으로써 발전하고 스스로 지구의 지배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한 돌연변이로의 변화, 환경적 변경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지구생물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우리는 변화와 변경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점차 멈추고 있다. 아니 이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가치는 '스스로의 결정과 평가'라는 부분에서 시작함에도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의 의무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내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미래를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결정의 노력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하는 것일까? 많은 책임과 굴레가 씌어진 삶에서 나는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결정과 판단을 할 수 있어야만 하고 온전히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질문의 답,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의 답은 끝까지 찾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계속되는 삶에 대한 고민과 질문, 그리고 스스로 내린 결정과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갈 때 나는 결국 나로서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고 나라는 사람으로 이끈 운명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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