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and Techno
테크노 음악을 중심으로 밤낮으로 클럽에 모여드는 ‘레이버(Raver)’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패션 피플’이다. 어떠한 공식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레이버들의 패션은 귀가 터질 것만 같은 테크노의 청각적인 효과와 그들의 자유로운 패션이 적절히 조화가 되어 하나의 스타일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여러 디자이너에 의해 레이버들의 스타일이 컬렉션에 오르고 있으며, 테크노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컬렉션의 아우라는 가히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물결 ‘테크노’
가수의 가창력이나 밴드의 악기 연주 따위는 필요 없는 오로지 ‘춤’을 위한 음악인 테크노 음악은 1970년대에 흑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몰락한 미국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도시는 자동차 산업의 쇠퇴로 인해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거리에는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흑인들이 난무했으며 도시는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 회색빛의 도시 속, 흑인들을 달래줄 화려한 디스코 음악이 큰 인기를 끌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디스코 음악을 전자 드럼머신을 통해 새롭게 가공하여 만든 시카고의 전자음악인 ‘하우스’가 디트로이트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하우스 음악은 디트로이트의 어둡고 차가운 도시의 분위기와 결합되어 디트로이트의 외각지역 ‘벨빌(Belleville)’의 청년들로부터 ‘테크노’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테크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일명 벨빌 쓰리(The Belleville Three)의 후안 앳킨스(Juan Atkins), 데릭 메이(Derrick May), 케빈 손더슨(Kevin Saunderson)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의기투합하여 전자악기인 드럼머신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각각 만들어낸 초기 테크노 음악은 암울하고 무거운 곡들이 주를 이루었고 강하고 반복되는 비트와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미래지향적인 사운드로 디트로이트에서의 삶을 음악에 녹여냈다. 1980년대, 벨빌 쓰리의 테크노 음악은 회색 도시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냈으며 오늘날의 테크노의 원형인 ‘디트로이트 테크노’가 탄생하는 순간을 알렸다.
미국에서 탄생한 테크노 음악은 정작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바다 건너 영국에서 뜻밖의 인기를 얻었다. 당시 영국에서 테크노 음악이 부흥하게 된 이유는 보수적인 정치적 분위기에 지친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 클럽에 모여 젊음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영국 테크노 신드롬은 ‘제2의 사랑의 여름’이라고 불릴 정도로 젊은이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서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은 1970년대 미국의 히피들을 중심으로 사이키델릭 록과 마약을 함께하며 표현을 자유를 외친 미국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젊은이들도 이 현상에 빗대어 다른 차원의 소리를 내는 테크노 음악과 마약 ‘엑스터시’를 즐기며 약에 취해 밤새 춤을 추었고, 마약과 테크노라는 위험한 조합에 중독된 젊은이들의 환각의 밤은 점점 커져갔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테크노 클럽은 위험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정부는 술과 마약이 난무하는 클럽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클러버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넓은 야외 공간이나 들판, 빈 건물로 장소를 옮기게 된다. 이때 ‘대규모 댄스파티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레이브(Rave)’라는 용어가 음악 잡지인 ‘Mix magazine’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 용어는 ‘황홀한 정신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Raving Mad’에서 유래되었다.
그렇게 영국의 레이버들을 중심으로 밤낮 구분 없이 미친듯이 테크노 음악을 향유하는 본격적인 레이브파티가 시작되었다. 테크노의 기계적이고 빠른 리듬의 청각적인 효과는 테크노 기반 패션 스타일을 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레이버들은 밤새 미친듯이 춤 추기 편한 스포티한 의상을 추구했으며, ‘엑스터시’의 영향이었을까. 그들은 특유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영국에서 레이브파티가 지속되는 한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4달 전에 독일의 테크노 DJ인 닥터 모트(Dr. Motte)는 서베를린에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며 ‘평화, 기쁨, 팬케이크(Friede, Freude, Eierkuchen)’라는 슬로건으로 일종의 레이브파티인 ‘테크노 퍼레이드’를 기획하게 된다.
이 행사는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둘을 갈라두었던 동독과 서독 간의 화합과 평화를 말하고자 했으며, 독일이 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군에게 배급받은 밀가루로 투박하게 만들었던 음식인 ‘팬케이크’ 하나에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역사를 떠올리며 사소한 것에 감사를 느끼는 것을 목표로 기획되었다.
처음으로 기획된 이 행사에는 닥터 모트의 생일을 기념해 약 150여 명의 테크노 음악팬들이 모였다. 이들은 평화를 외치며 베를린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였고, 첫 행사의 성공 이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 기쁨과 환희에 목말라 있던 독일의 시민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러브 퍼레이드’를 시작하며 갈증을 해소하게 된다. 러브 퍼레이드의 참가 인원은 해를 거듭할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비교적 최근인 2010년, 많은 인파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게 된 후 ‘러브 퍼레이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2022년 8월, 닥터 모트를 중심으로 ‘Rave The Planet’이라는 이름으로 러브 퍼레이드의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행사가 열렸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에는 ‘베를린 패션’의 ‘쿨’함을 보여주는 ‘패션 피플’들이 모여 파티를 즐긴다. (‘베를린 패션’이라 함은 메탈릭한 무드와 펑크의 결합, 몸에 꼭 맞는 실루엣과 어두운 분위기의 컬러 등으로 대표되는 ‘쿨하다’라는 말로밖에 표현하기 힘든 패션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을 대표하는 문화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은 테크노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베를린의 시민들은 과거 자신들의 아픔을 치유했던 테크노 문화를 누구보다 아끼고 있으며,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를 넘어서 세계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독일은 그들의 테크노 문화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테크노 음악을 중심으로 모여든 독일의 ‘레이버’들은 과거부터 특유의 분위기로 스타일을 정립해 왔다. 이들의 패션에는 ‘베를린의 클럽에서 입을 것 같은 옷’이라는 추상적인 말만 있을 뿐, 스터드가 박힌 가죽 자켓을 입는 펑크족이나 M-51 피쉬테일 파카를 입는 모드족 처럼 정해진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쿨해 보이는 스타일만이 베를린 패션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레이브 문화를 동경하는 여러 브랜드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판 레이버 패션’을 엿볼 수 있다.
요르크 코흐(Joerg Koch)에 의해 설립된 매거진 032c는 브랜드 네임을 팬톤의 레드 컬러 코드인 ‘032c’를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투박하고 쿨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무심하게 설정한 브랜드 네임처럼 032c는 예측 불가능한 자유로운 행보를 이어오고 있으며, 2018 FW 컬렉션을 통해 공식적으로 패션 브랜드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032c의 의류 컬렉션은 요르크 코흐의 아내인 마리아 코흐(Maria Koch)과 스타일리스트 마크 괴링(Marc Goehring)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이 선보이는 컬렉션은 90년대 베를린의 거리와 클럽, 독일의 사회주의의 붕괴와 군대 등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032c의 컬렉션은 베를린을 가장 잘 표현하는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 잡아 ‘베를린 패션’을 이끌어가고 있다.
과하지 않으면서 웨어러블한, 독일의 특유의 투박한 무드를 가지고 있는 032c의 컬렉션은 마치 시대를 초월해서 돌아온 90년대의 레이버들이 클럽으로 향하는 모습을 연상케한다.
032c와 나란히 베를린을 대표하는 브랜드 GmbH. 이들도 032c와 공통점이 많다. 먼저, 브랜드 네임을 쿨하고 투박하게 설정했다. 032c는 팬톤의 컬러 코드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GmbH는 독일어로 ‘유한책임 회사’를 뜻하는 ‘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의 약자를 그대로 브랜드 네임으로 차용했다.
GmbH를 이끄는 벤자민 허스비(Benjamin Huseby)와 세르하드 이식(Serhat Isik). 이 둘은 베를린의 클럽을 즐기면서 자랐고, 브랜드를 이끄는 영감의 원천 역시 클럽 문화와 테크노 음악 속에 있었다.
두 디자이너는 GmbH를 통해 선보이는 패션 디자인의 의도는 옷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음악, 정치, 문화와 인권,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랑, 가족, 통합’에 대해 외치며 앞서 본 ‘러브 퍼레이드’의 정신. 즉, 베를린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히 ‘쿨’하게 보이는 외적 이미지를 넘어서 과거, 독일을 둘로 갈라둔 아픔을 기억하며 세계 평화와 사랑을 앞장서 외치는 것이 아닐까.
테크노 문화는 독일 패션 브랜드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요소는 아니다. 오늘 살펴본 레이브 문화 역시, 현대 패션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으며, 다양한 색을 가진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통해 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유스 컬처를 옷으로 표현하던 RAF SIMONS. 2023 SS 컬렉션을 통해 보여준 마지막 유스 컬처는 레이브였다. 이들은 컬렉션이 끝난 후, 레이브파티를 벌이며 화려한 종지부를 찍었다.
꾸준한 사랑을 받는 매튜 윌리엄스(Matthew Williams)의 1017 ALYX 9SM. 브랜드 네이밍부터가 남다르다. 1017은 그의 생일을, 9SM은 브랜드가 시작된 뉴욕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의 주소를 의미한다.
©vogue.com
프랑스어로 ‘옷’을 의미하는 VETEMENTS. 이들도 ‘옷’이라는 단어를 브랜드 네이밍에 그대로 활용했다. 다양한 스트리트 문화를 적절히 믹스하여 선보이는 VETEMENTS의 컬렉션에도 레이브 문화는 필수.
못된 짓을 하다, 비행을 저지르다는 뜻의 ‘misbehave’를 줄여 지어낸 MISBHV. 이들 역시 클럽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컬렉션 음악을 직접 레코딩할 정도로 테크노 음악에 대한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고 있다. 첫 등장부터 ‘클럽 유니폼’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ISBHV. ‘Club Wear’의 ‘Solution’을 알고 싶다면 MISBHV를 보라.
이렇듯, 여러 색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옷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레이브 문화를 살피고 그것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고민하고 있으며, 레이브 문화의 자유로움은 디자이너들의 창작에 많은 기여를 한다.
현대 패션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입는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 옷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살펴본 이들의 옷 너머에는 ‘레이브’가 있으며, 그들이 영감받은 환각적인 레이브파티를 아래의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길 바란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