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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피 Jul 10. 2023

9. 기억의 재구성(상)

기록은 기억을 강화한다.

현재를 살고 또 미래를 살고 싶지만 경험이라는 게 과거에 형성되어있다 보니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과거를 자꾸만 되짚어 보게 된다. 나는 아무래도 과거에 얽매여있는 사람이라 나 스스로 기억에 대한 관점을 바꿔보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기록은 기억을 강화한다.


"아휴, 속 시끄럽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이 말을 나이가 먹고 보니 너무 공감하게 되었다. 생각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내게 당장 닥친 상황, 예견되는 불안 실체없는 걱정 모두가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어댔다.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들로 채워지곤 하는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들을 내뱉을 해우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방학숙제로나 썼던 일기를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쓸 때는 조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에 쌓인 독소와 찌꺼기들을 배변하듯이 막 속사포로 나만의 일기장에 쏟아내고 나면 감정들이 한결 가라앉곤 했다. 오롯이 해우소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일기를 들여다보지 않고 배설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블로그에서  알람이 떴다. 작년, 재작년, 몇 년 전 같은 날 썼던 포스팅들을 리마인드 시켜주곤 했는데 거기에서 바로 현타가 왔다.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몇 년간의 내 인생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프고 더러운 기록들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청춘은 아름답다더니 순간의 나쁜 감정으로 아름다운 내 청춘을 다 놓쳐버린 기분이었다. 일터를 떠나 비로소 스스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을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는데 얽매여 그 귀중한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일이 아쉽고, 나아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일기를 보내 될 때 부정적인 언어와 감정으로 가득 차버린 어두운 내가 남아있었다. 좋은 것도 바라보기에 모자란 삶을 미움과 분노에만 몰두했던 내 삶에 자괴감이 들었다.


사는 동안 분명히 즐거운 일도 있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좋은 날을 기록하지 않은 대가는 현재의 나에도 영향을 주었다. 좋은 날을 기록했다면 좋았을까. 내 삶이 좋은 나날들이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 분명히 그런 날이 있었다.


대학생 때 한 달가량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수첩을 한국에서부터 사서 매일 일기를 적었었다. 사실은 건축학도로서 받은 인사이트를 적으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앎이 짧아서 여행 일기로 남았다. 쓰면서는 아쉬움이 철철이 었는데 그렇게라도 기록을 남긴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여행 이후 그 수첩을 다시 열어본 건 4~5년쯤 지나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서 다음 대책 없이 백수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집에서 할 일 없이 필요 없는 책들을 중고로 내다 팔아 용돈을 모으려고 책장을 다 뒤집다가 그때의 여행 수첩을 발견했다.

'아아, 이때 이랬지.' 하면서 추억에 잠겼다가 이렇게 보고 또 덮고 나면 언제나 이걸 열어보겠나 싶어서 컴퓨터에 기록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의 기록이라 정리하는 데에도 거의 일주일 정도 소요했는데 뭔가 일주일간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재밌었던 것은 내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일기와는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수첩의 워딩을 그대로 옮겨 적고 나서 아래에 별도로 코멘트를 달아놓기 시작했다. 강력하게 남아있던 어느 날의 기억은 일기보다도 훨씬 긴 코멘트가 되기도 했는데 기억이란 확실히 스스로 편집한 장면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건축학도의 야심 찬 건축기행으로 시작했던 일기만 남았을 뿐 아쉽게도 그 외의 여행들은 어리석게도 전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었다. 복기할 기록도 없는데 지나간 세월과 번아웃으로 새까맣게 잊은 상태가 된 상황이 너무도 아쉬웠다. 내 삶은 여태껏 써놓은 일기처럼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는데.


그래서 일기에 감정의 해우소 역할 대신 내 삶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특히 좋은 날의 기억은 나중에도 오래오래 곱씹기 위해서 좋은 기분으로 날려버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즐겁고 행복한 일들은 자주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기를 쓰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는 내게 좋은 일이 별로 없긴 하지' 생각하다가 내가 너무 행복을 거대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억지로 즐거운 척을 하며 스스로 기만하는 건가 생각도 들었지만 그조차도 즐겁게 생각하려는 다짐이 되고 이게 반복되면 자기세뇌가 되지 않을까 하며 노력하는 중이다.



여행이나 즐거운 날의 기록은 필수!

 - 내 삶의 즐거운 경험은 디테일하게 많이 남길수록 좋다.

   가끔 삶이 힘 겨울 때 그 즐거운 추억을 곱씹으며

   그 삶을 다시 살아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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