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괸리자는 비전을 그리는게 중요해" 라는 말은 '세부적인건 몰라'와 같다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업계획 시즌. 이때쯤이면 회사는 다음 해의 성장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느라 바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큰 그림"에만 너무 집착하는 일부 관리자가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에 전략부서에서 야심차게 발표한 중장기 경영전략 발표. 각 팀마다 한권씩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컨설팅회사 브랜드가 막힌 두꺼운 컨설팅 보고서가 전달됐다. 회사의 미래가 담긴 대외비 정보가 많기 때문에, 각 팀의 팀장만 전문을 읽고, 팀원들에게는 전략을 내재화시키라는 기획실의 엄명이 떨어졌다.
비밀문서를 펼쳐보는 제임스 본드가 된마냥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보고서를 훑기 시작한다.
"그렇지...이건 이래야 하지"
"어라...이건 컨설팅이 헛소리를 써놨네"
관리자들은 이내 자신이 회사의 미래, 장기적인 경영전략, 글로벌 트렌드를 모두 통달한 K-스티브 잡스라는걸 깨닫고 이내 전율에 휩싸인다. 유수의 컨설팅회사가 나보다도 경영전략을 모르다니..ㅉㅉ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족한 부분을 발견한 팀장님은 그동안 갈고닦은 나만의 현란한 개인기가 오히려 빛을 발할때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자신감이 뿜뿜 차오른다.
"김 대리 오늘 2시에 팀 회의할테니까 전파좀 해주세요"
결연하다. 과감하다. 걷어올린 와이셔츠의 소매며, 풀어헤친 첫 단추며, 오늘은 왠지 컨설팅보고서를 독파한 내 자신이 섹시하게 느껴질 정도
정작 바로 앞에 닥친 실질적인 사업 목표나 실행 전략에는 아직도 모호함이 많다는 것은 알지만, 컨설팅 보고서를 읽어보니 큰 그림과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팀원들에게 경영전략의 '내재화'만 잘 해내면, (팀원들이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건 자연스럽게 해결될것을...세세한 부분 하나까지 걱정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난 이류, 삼류 팀장이 아니라 일류 팀장이니 걱정은 잠시 접어둔다.
먼저, 모든 계획의 시작은 야심 찬 목표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한 관리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야심은 좋다. 글로벌 진출, 신시장 개척, 새로운 투자 다 좋다. 문제는 그 말에 그칠 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해외 진출이라니,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어떤 시장을 목표로? 현지 법인 설립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몇 년 전, 이런 목표를 내세운 한 관리자는 해외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막연히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자”
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리고 그 목표는 각 부서에 전달되었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부재했다. 결국 그해 사업계획서엔 글로벌 진출 항목이 담겼지만, 아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어차피 내년에도 복붙해야할 사업계획서 꼭지하나는 매년 남겨놓는것이 관례이기에....과감히 '중장기 과제'로 분류하면 되는것이여서 타격도 없다.
비전만 크고 실행 전략이 빠진 경우는 흔하다. 특히 연말 사업계획 시즌에는 더더욱. 전략회의가 진행될 때마다 리더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방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그리고 그에 맞춰 어떤 자원이 투입되고, 어떤 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획부서에서 근무할때 총 5명의 리더를 겪었었다.(내가 이 분야에서 고이고 있긴 한것 같다..), 그 중 기억나는 한분은 경영 전략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마치 TED 강연 같았다.
"우리 회사의 미래는 혁신에 달려 있다. 10년 후, 우리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슬라이드를 보니, 정작 다음 달에 출시할 신제품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은 없다. 직원들은 그 큰 비전을 들으면서도, 당장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더 큰 문제는 성과에 대한 모호함이다. 목표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평가할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면 그 계획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매출을 몇 퍼센트 성장시킬 것인지, 비용을 얼마나 절감할 것인지, 구체적인 숫자나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대략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 CEO가 "우리 회사는 내년에 수익성을 극대화할 겁니다!"라고 외쳤다. 수익성을 어떻게 극대화할지에 대한 질문에선 답변이 없었다. “그건 부서에서 알아서 하겠죠”라는 대답뿐이었다. 하지만 부서가 알아서 할 리가 없다. 큰 그림은 멋지지만, 그 속을 채울 작은 디테일이 없다면 그 사업계획은 단지 좋은 프레젠테이션에 그치고 만다.
결국 사업계획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회사의 미래 비전과 경영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비전과 전략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될지에 대한 디테일을 놓치면, 현실은 멀어진다. 더구나 연말 사업계획 시즌에는 모든 관리자가 "큰 그림"을 그리기 바쁘지만, 그 그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작은 퍼즐 조각들이 빠진 계획서는 무의미하다. 매년 돌아오는 사업계획 시즌, 이번에는 큰 그림만이 아닌 세부 전략도 꼼꼼히 챙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