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르륵 불타버려 소멸된 쓰기 욕구
초록 검색엔진에 ‘현타‘를 치니 사전적 정의가
정리되어 있었다. 현타를 정의하는 여러 가지 설명이 더 있었지만 오픈사전에 올라와 있는 저 설명이 가장 나의 상태를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무념무상의 시간-
시어머니 욕을 실컷 하고 나니 속이 개운했다. 그동안 묵혀왔던 나의 울분을 시원하게 토해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글로 다 쓰고 나니 무념무상이 되고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며 한동안 글쓰기가 싫어졌다. 현실적으로 일하랴 육아하랴 바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이런 류의 글을 쓰게 된 것이 서글퍼졌다.
브런치 글을 읽다가 이혼, 갈등, 미움이 판치는 세상에서 행복을 쓰고 싶다는 작가님을 발견했다. 그때 내 무릎을 탁 치며 깨달았다. 나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읽다 보면 혹은 보다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보단 그 현실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때론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선호했다. 영화 <웰컴투동막골>을 참 좋아하여 여러 번 영화관에 가서 봤었다. 그때도 전쟁이라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그리지 않고 비극 속에서 재미와 정을 그려낸 것에 감탄했다. 내가 글을 쓰게 된다면 누군가에게 감동을, 솜사탕 같은 포근함을 선물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를 갖게 했다. 그러나 나의 글은 주제부터 틀려먹었다. 열받고 답답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포근함은커녕 화딱지 한 트럭 정도 안기는 글이다. 전쟁 속에서도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쩜 그보다 하찮은 고부 갈등에서 유머 하나를 찾아내지 못할까 자책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문제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특히나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의 시어머니는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니었고
요즘 며느리인 나 또한 변하지 못했다.
요 며칠 남편과 나는 또 시어머니께 시달렸다. 남편은 중간에서 무척 괴로워했고 집에 들어올 때 코가 쑥 빠져있으면 퇴근길에 어머니와 통화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엔 남편이 하도 안쓰러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또 참아가며 남편을 위로했다.
“네 어머니가 그런 걸 어쩌겠니…”
(아마도 위로가 전혀 안 되는 말이었겠지…)
한편으로는 내 감정을 다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발동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우리에게 마구 퍼부으실 때 속으로 ‘오? 또 새로운 소재가 생기는 건가?‘하며 방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러저러한 갈등이 있었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 후 서로를 아끼며 행복하게 잘 지냈답니다!
라는 동화 같은 결말은 없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해서 아름다운 동화를 쓰면 뭐 하나 당장 지금 하고 싶은 말부터 하고 살아야겠다. 그래야 내가 살겠다 싶었다.
다시 시작된 우리 어머니의 행패(?)에 나는 접어두었던 키보드를 다시 열었다. 어머니의 언행은 나의 글쓰기에 동력이 된다. 쉬었던 글을 쓰게 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동안 제목만 써두며 묵혀두었던 이야깃거리를 이제는 그냥 꺼내야겠다.
아쉽게도 나의 현실이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이좋은 고부관계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착하고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며느리가 아니다.
전에 내가 쓴 글에서 시댁에서 기쁘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희망적인 결론을 냈었다. 그러나 그건 헛된 꿈이었다. 결론은 나의 시어머니는 현재 진행형이고 아직 못다 한 이야기는 계속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쁘게 포장하지 않고 날 것의, 서늘하고도 살벌한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