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돌아왔다.
두 달 만이다. 낯선 땅 인도를 오가며 매달렸던 일이 성과가 없었는지 어깨가 한 뼘이나 내려앉았다. 입맛도 없는지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지켜보다가 “우리 밥 먹고 산에 갈까?” 물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남편은 약수터까지 오르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약수를 나누어 마시며 며칠째 고민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빠 머리도 식힐 겸 애들 방학하면 바람 쐬고 올까?”
“그래, 태국이나 베트남으로 한 일주일 다녀오지 뭐.”
부산 언니네나 상주 언니네 정도를 염두에 두고 건넨 말이었는데 갑자기 해외로 돌아온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갑자기 진행된 가족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짙은 어둠이 내린 밤 맥주 한잔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지? 태국은 아닌데. 그곳 가능할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은 우기인 발리. 항공권을 찾아보니 확실히 시즌 때보다 저렴해진 항공료가 내 마음을 마구 흔들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며 항공권을 덜컥 구매한 후 사전 지식을 얻기 위해 유튜브 검색을 시작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아 떠난다는 우붓에서 4일, 길리섬의 숙소 비용보다 더 비싼 액수의 페리 가격을 보고 순간 뜨악했지만, 이곳에 가기 위한 선택이라 하와이에 가지 않고도 거북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길리 트라왕란에서 4일을 지내기로 했다. 마지막 일정은 개성 있고 아기자기한 발리의 인기 장소라는 짱구에서 4일을 마무리로 세부 일정 계획을 세웠다. 천국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의 해변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서핑을 즐기며 거북이와 수영하는 4남매의 모습, 비치에 누워 오랜만의 호사에 감사할 나의 모습만 생각하기로 했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모처럼 휴일 아침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어젯밤 나 홀로 결정한 목적지를 이야기한 후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아들은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내왔고 딸들은 “발리? 지구 오락실에서 나왔던 발리?”냐며 눈치 없이 자꾸 물었다. 남편의 예상했던 반응에 나는 구차한 이유를 나열하며 설득을 시도했고 흔쾌히는 아니지만 ’ 알겠다 ‘ 는 답변을 받았다.
준비기간은 2주. 인터넷과 책을 찾아보며 여권 기간 확인, 항공권 구입, 숙소 예약, 현지 투어 알아보기 말고도 환전, 카드, 데이터 구매, 인도네시아 도착비자 등등 준비해야 할 것들을 적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급한 문제는 숙소였다. 대식구가 움직이다 보니 가격도 비싸고 3곳으로 나눠진 일정이라 선택의 폭 또한 너무 좁았다. 거의 매일 여행 준비에 매달렸다. 밤새 찾고 저장하고 장바구니에 담아 가격 비교를 하면서 가성비 좋은 숙소를 골라낸 후 호텔마다 메일을 보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했다. 나머지 현지 투어와 길리섬으로 가기 위한 페리 예약은 은희 씨 덕분에 40%의 비용을 절감하며 그나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요즘 나의 최애 말이 될 만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매달리면서도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아! 장밋빛 인생이여! 길고도 짧았던 여행 준비를 끝내고 출발 3일 전. 며칠째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4개의 여행 가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한 후 지퍼를 올렸다.
“내가 할 준비는 다 했어. 비자 신청만 당신이 오늘 하면 돼요.”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냉장고도 비워야 하기에 오늘은 냉동실에 있는 만두로 만둣국을 끓일 계획이다.
“현아, 여권 줘” 비자 신청을 하려고 남편이 나왔다. 다시 육수를 내고 시원한 동치미를 꺼내 썰어 살얼음 낀 국물도 자작하게 담아낸 후 채소를 손질하고 있는데
“현아, 이리 와봐. 애들 여권 만료일이 5개월뿐이 안 남아 있는데?
최소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해!”
“뭐? 줘봐. 내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이게 뭐지? 어머 어떡해. 내가 미쳤나 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나는 여권 3개를 들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 어떡해? 우리 못 가?”
남편이 인도네시아 대사관과 우리나라 여권 팀에 전화를 걸어 사정했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다시 여권 신청을 해도 열흘은 족히 잡아야 했다.
“다 날렸지. 뭐!. 우리 마누라 내가 여행을 너무 안 보내 줘서 감을 잊었네.”
차라리 화를 내지, 농담하는 남편을 냅다 쏘아보았다.
“은희 씨한테 전화해. 호텔들 날짜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해 봐 달라고. 항공권은 지금 내가 확인할게.”
펄펄 끓고 있는 육수 가스 불을 끄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젠장, 대형 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