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그늘은 풍족하지 않았다. 4남매의 야간 자율학습 도시락도 모자라 당뇨와 고혈압이 있으셨던 아버지의 식사까지, 매일 아침 9개의 도시락을 싸시던 엄마. 어린 눈에도 몸이 약한 엄마가 부서져 버릴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도시락 속에는 아침에 갓 지어 따뜻했던 밥알의 온기만큼 반가운 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둘째 딸 현아. 오늘도 힘내자, 사랑한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건 언제나 최백호나 패티김의 멋들어진 노랫가락이었다. 엄마는 청바지에 화사한 린넨 셔츠를 걸치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또 어떤 날은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에 쁘띠 스카프로 포인트를 준 의상을 입으시고 시장에 다녀오시는 어머니와 하교 길에 만나면 단아하고 단정한 어머니 모습에 놀란 친구들! 부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엄마야? 예쁘시다”하던 친구들의 말이 듣기 좋았다.
중학교 2학년 첫 월경을 시작할 때 새하얀 속옷 세트를 사 주시면서 “이제 여자다. 속 옷 짝짝이로 입지 말고 단정하게 가꿔라”말씀 하시던 어머니.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자신이 없을 때도 여자의 품격을 지키려 애썼던 어머니의 영향을 4남매 중 가장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 사춘기를 겪는 언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매일 눈물짓던 어머니가 버틸 수 있던 힘이 된 것은 책이었다. 독서로 쌓은 교양이 가장 힘든 순간에조차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는 무기가 되주었던 것이다. 몸이 약하셨으니 살림과 육아 속에서 늘 허덕거리며 시간에 쫓기셨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어머니의 취미를 따라 하는 거였다.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어 옆에서 따라 읽기 시작한 책들은 나에 학창시절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그때 나는 책을 통해 우아함이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지 배웠고 ‘소공녀 세라’가 말한 것처럼 “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에요. 가장 춥고 배고플 때조차도 다른 게 되지 않으려 애썼다고요.”의 마지막 말처럼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들을 나 스스로 '왕녀의 품격'이라 정의하고 마음에 새기며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사신 것처럼 언젠가 내게도 시련이 찾아온다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민낯마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소망했다. 아마도 이런 기억들, 아니 이런 습관이 내가 4남매를 육아하며 힘든 순간순간에도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고 배움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가꾸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헌신 속에서 사랑받았던 4남매. 안락하고 따뜻했던 우리 가족에게 어느 날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충격이 크셨는지 사십구재를 끝내고 돌아와 집에서 낮잠을 좀 주무시고 일어나신 아버지가 장보러 나가신 어머니께 다급하게 전화하셔서“내 몸이 좀 이상해. 빨리 와 봐”하셨단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미 어눌한 상태로 당시의 위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던 어머니는 한달음에 달려가며 구급차를 부르셨다. 경희대학병원으로 실려 오신 아버지는 오른쪽 마비 뇌졸중 판정을 받으시고 재활치료 하며 6개월을 병원에 계시게 되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후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여리고 약한 몸으로 오른쪽이 마비된 아버지를 24시간 병간호하시는 어머니를 보는 것과 이제 막 사회인이 된 언니와 내가 생활비와 병원비를 분담하게 된 삶의 무게였다.
모두에게 삶이 버겁고 힘들었다. 아버지는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한순간 몸을 가누지 못하니 모든 화가 병간호하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병원 화장실에서 조용히 우시던 어머니를 자주 목격했다. 집에서는 셋째가 막내를 챙겨 학교를 보내며 살림을 도맡아 했다. 우리는 점점 웃음을 잃었고 짜증은 늘어갔다.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겠다’ 다짐했던 소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 버렸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어려움 없이 살다가 갑자기 부딪친 현실에서 나는 한없이 나약했다. 추운 겨울이 되기 전 아버지는 오른쪽이 마비된 상태지만 겨우 지팡이를 짚고 혼자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셨다. 힘들고 지독했던 병원생활을 마무리하고 우리 가족은 또다른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겨울 끝자락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