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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Jun 29. 2023

난 왜 여행하는 공예가 라는 직업을 창직하게 됐나(1)

내 워크숍에 오시는 분들이 종종 묻는 질문이 있다.

“모모님은 전공이 원래 공예/미술 쪽이셨어요?”

“모모님은 어떻게 자연염색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여행하는 공예가라는 직업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

나는 엄연히 따지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워크숍과 관련이 1도 없는 비전공자이다. 어떻게 염색을 하게 되었고 여행하는 공예가라는 직업을 만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려면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는 세계적인 호텔리어가 될 거야!
사실 나는 학부 전공도 정말 소신 있게 골랐다. 왜냐하면 10대 때 내내 꿈이 ‘호텔리어’였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 때 아빠가 신문을 보다 스위스 호텔학교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주신 것이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 기사는 아직도 투명 파일에 간직하고 있다. 수능을 보고서야 국내에서 대학을 가는 것보다 그 학교에 가는 것(이론+실습을 병행하는 커리큘럼 때문에)이 내 꿈에 더 빨리 닿을 수 있겠다 확신이 들었다. 수능을 보고 토플학원을 몰래 등록하고 그 학교 입학설명회에도 몰래 갔었다. 설명회에 갔을 때 너무 부러웠다. 다들 엄마 아빠 손잡고 오거나 부모님이 대신 왔는데 학생이 그 학교에 가겠다고 설명회를 들으러 온 학생은 나 하나였다. 입학처장이 내가 너무 용기 있어 보인다며 자기네 학교에 꼭 왔으면 한다고. 학교 교장이 직접 입학 설명회를 해주고 브로셔까지 봉투에 고이 챙겨 왔으나 바로 보여드리기가 무서웠다. 한국에서 사교육이며 입시 생활을 기껏 해놓고 또 돈이 많이 들어가는 유학을 가겠다니,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 입학설명회를 다녀온 날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 밖에 오래오래 서성이다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말로 전하기엔 두려워 장문의 편지와 학교 브로셔를 안방에 두고 하교 후 돌아오니 그걸 왜 이제야 말을 하냐 그러셨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진학할 때부터 말씀을 드렸고 주변에 문의를 해도 하나같이 돌아오는 말 “한국의 입시를 경험하기 싫어 가는 도피성 유학 아니야?”

그건 또 아닌 데다 일개 고등학생이라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생각하여 그냥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이제 너도 성인이니 너의 의견은 충분히 존중하나 우리 조금만 더 알아보고 결정하는 걸로 하자.”

결국 그 학교는 학위가 인정되는 학교가 아니어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교환학생이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선배님, 저거 등 나갔는데 갈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안 있어 M호텔에서 생애 첫 인턴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이 때는 내 별명이 ‘쓰나미’였을 정도로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실수 투성이었고, 퇴근 후에는 즐겨 마시지도 않는 쓰디쓴 소주가 매일매일 당길 정도로 속상했다.

M호텔에서의 인턴을 마치고 L호텔 F&B 인턴을 하게 될 기회도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기본부터 차근차근 경험하는 것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든 중요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불필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 함께 인턴을 하는 동료가 백사이드에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 맞냐? 는

불평불만을 듣다 보면 나는 속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의심이 들고 가치가 없다 생각되면 안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불평불만만 하면 자기가 더 힘들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되려 나는 더 주인의식을 갖고 인턴 생활에 임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선배한테 “선배님, 저거 등 나갔는데 갈아야하는거 아니에요?” “선배님, 이 접시 이가 나갔는 데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다음 날에 출근하면 깜빡거리던 등이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이가 나간 접시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정신없이 바쁜 게 낫지, 일이 없는 날에는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면 선배님들 곁에 가서 “선배님은 언제부터 여기서 근무하셨어요? 왜 소믈리에가 되셨어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냥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음료 만드는 방법이나 뭐 하나라도 더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들도 계셨다.

그럼 시간이 빨리 가기도 했고, 이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컵 워머 기계에 컵을 넣다가 누가 온도를 평소보다 높게 올려놨는지 손등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손등에 갑자기 물집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고 당황했지만 선배님이 응급처치를 적절하게 해 주시고 의무실에 다녀왔다. 인사과까지 다녀왔는데 내 손을 보며 걱정하시는 담당자분을 보고 나는 “괜찮아요.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으면 일할 때 힘들었을 텐데 손등이라 다행이에요.”라고 말하며 담당자를 되려 위로했다.

인턴 종무식에 인사과 담당자분이  그 에피소드를 곱씹으며 감동받았다고 내게 공식 석상에서 선물을 주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그 인턴십 이후 휴학을 결심했다.




길을 잃은 것 같다면, 잠시 쉬는 것도 좋아

업무 자체는 재밌었고 취업을 한다면 로컬보다 인터내셔널 체인 호텔에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크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오래 일하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주체성을 갖고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싶은데 로컬이든 인터내셔널이든 주어진 일만 해야 하는 것이 내게는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도 이쪽으로 진학을 했고, 마지막 인턴활동을 했던 곳에서는 정규직 전환 제안까지 받았지만 그냥저냥 묻어가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그릇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담 든 그릇이 커야 많이 담을 텐데 담을 그릇이 작으니 넘치는 건 한 순간일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내가 휴학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 휴학을 했다. 호텔리어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도 컸다.


그 당시 외가에서 하는 일을 배워 남미에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남미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 무작정 서점으로 달려갔다. 여행 서적은 있으나 남미 관련하여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서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세계가 우리 집이다.’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책은 매듭공예(마크라메) 품을 팔아 여행 품삯을 벌며 여행을 다니는 한국인 여성(지언니)과 스페인 남성(다리오)의 여행기였다.

사람 일은 참 웃기다. 현재 이 책을 쓴 저자와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지인이 되었다.


남미는 모르겠고, 매듭공예를 배워보고 싶어 바로 검색을 했는데 집과 멀지 않은 곳에 공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주저하지 않고 바로 수업을 등록해 배우기 시작했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기 전에 있던 종종 가던 펍 매니저 오빠가 이곳에서 주말에 외국인 친구들과 플리마켓을 하는데 만든 것들을 가지고 나와 팔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내가 만든 것은 겨우 몇 개뿐이라 마켓에 참여하기엔 부족해 보여 공방 선생님들이 만든 것까지 같이 들고 가 참여했다. 첫 판매였지만 판매 금액을 떠나 재미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가 다른 플리마켓도 같이 가보자 제안을 줬다. 그렇게 함께 참여한 마켓에서 플리마켓만 전문적으로 나가는 언니 오빠를 만나게 되었고

어디선가 공지가 뜰 때마다 공유해 주어 나도 어느새 그들처럼 스케줄을 짜서 참여할 만큼 마켓 참여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학생 한일 교류 동아리 모임에 매듭팔찌 수업을 하러 갔다가, 그 교류가 한 해는 한국에서 다른 한 해는 일본에서 2년에 한 번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교류를 하고 있는데 팔찌 만들기 수업이 마음에 다음 해에 일본에 와달라고. 그 덕에 일본이라는 나라로 처음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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