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인간에 속한 단어가 아니에요
믿음의 반대는 문자적으로는 의심이다. 의심의 뒷문에는 사랑이 없다. 한 사람에 대한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사랑, 애정이 없기에 또는 너무도 사랑이 크기에 한번 신뢰에 금이 가면 믿음이 순식간에 증발되기도 한다. 더러는, 아주 더러는 말이다. 물론, 믿음이라는 것은 깨어지면 더 이상은 존재할 수 없어 ‘믿음’이란, 인간에게 속한 단어가 아닌 오직 절대자에게만 속한 단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은 신을 향한 언어이며, 사랑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잘못을 하든 미운짓을 하든 사랑하니 용서하고 사랑하니 또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깨어지면 회복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연약하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하고 때로는 오두방정 난리 부르스를 떨기도 한다.
업무관계나 인간관계, 그리고 가족관계나 연인관계에서도 믿음은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실체를 믿기보다, 어쩌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불완전한 믿음은 아닐까? 믿음의 대상이 무엇일까? 왜 믿고자 했을까?
오래도록 믿어왔던 사람이라도 한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의심을 잠재우는 방법은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있지만, 믿을 수 있는 마음, 믿어주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실체를 보여줘도 자신의 확신에 빠져버린 사람에게 실체를 인식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인 것 같아도 실상은 감정과 생각에 지배당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오랜 인연을 이어온 나의 혈육같은 깐부와 사이가 틀어진 요즘 상실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누른다.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늘 옆에 있을 것만 같았던 친구였는데 홀로 소설을 쓰고 나를 자신의 소설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머리가 좋지 못해 거짓말을 안 하고 못한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 나의 철학인지라 결국 태양아래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돼있다. 나의 찐에게 모든 것을 시시콜콜 상세히 말하지는 못했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설명이 부족했던 나에게 서운했던지… 우리가 가져왔던 그 깊고 굵은 인연을 한칼에 자르고야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급기야 혼자 쓴 그 소설을 사실로 믿고 나를 추궁하는 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문의 긴 편지를 받아본 나는 사실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함께해 왔던 그 시간들이 무엇이었나…
찐친에게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끊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히 끊어지게 된다. 온갖 저주같은 악담을 퍼붓는 친구. 그러면서도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를 또 염려하는 그 모습을 보며 그 속마음을 알기에 같이 되받아치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아픔보다는 충격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무엇이 그리 만들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그 정도의 신뢰 밖에 없었던 것인지…. 솔직한 내 심정은 그렇다. 친구를 하나 잃은 상실감보다 그렇게 오해하고 확신하는 그 병든 생각을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내 마음이 아픈 것도 아프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마음이 아프다. 얼굴이야 안 보고 살아도 그만이고 연락도 없어도 그만이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한다면 무엇을 내가 더 바라겠는가. 내가 싫다는데 나를 더 신뢰할 수 없다는데 그래서 우정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안다. 시간이 한참 흐르면 또 멋쩍게 다가올 그녀를 말이다. 신뢰라는게 믿음이라는게…진정 믿어서도 있지만 때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것 같다.
박사시절 친한 동기가 급작스런 가정의 어려움으로 경제적 곤궁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모든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가까웠고 일주일의 절반은 내 스튜디오에서 함께 지낼 만큼 우린 동고동락을 했다. 어린 핏덩이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그녀의 남편으로 인해 그녀는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무척이나 곤궁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형편이 어려웠다. 그런 그녀를 위해 그저 내 신용카드 한 장을 쥐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었다. 그녀는 어려움을 이겨내었고 결국 자리를 잡아갔다. 그녀와 같은 교회를 다니다 종교에 대한 이견이 생기면서 그녀와는 영영 멀어졌다.
결국 꿈에도 바라던 교수임용이 된 이후에도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딱히 싸운 것도 서운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난 가끔 그녀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그저 어려운 시절에 도움이 간절했기에 나를 의지했었던 것인가…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면 연락도 할 법한데 이제는 이해관계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나 역시 그녀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동문회에도 가지 않으니 만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그저 예전처럼 동일하게 대할 것만 같다.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출산 직후 떠나버린 남편으로 고통받는 그녀를 보며, 또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의 간절한 열망을 보며 그녀가 잘 되기를 바랐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한 것이 전부다.
지금도 딱히 바라는 것이 없다. 동시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서로 응원하고 아껴주는 것…그 정도이지 않을까. 나이 들면 한옥에서 밤에 가야금 뜯으며 노래하고 차마시며 같이 늙어가자고 맹세했던 그런 사이도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 말에 믿음이라는 것을 걸었다면 지금쯤 실망했다며 인연을 끊어버렸겠지… 물론, 그녀와의 인연이 지금 남아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이어질 인연이면 다시 이어질 것이고, 아닌 인연이라면 이대로 끝나겠지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믿어주고 사랑해 준다는 표현이 맞다.
같이 늙어가자며 손가락 걸었던 그녀를 생각하며, 또 그녀와 연락이 끊어진 지난 14-5년을 떠올리며, 그리고 지금 혼자 소설을 쓰다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덕대는 혈육같은 찐을 보며…믿음이라는 것이, 신뢰라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 생각이 깊어진다. 언제고 연락 올 그녀들에게 말하고 싶다.
‘믿음은 사랑하기에 믿어지는 거야. 너희를, 너라는 존재 자체를 아끼기에 믿었던거야. 현재의 너만 아니라 앞으로의 너의 모습까지 미리 끌어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에 하늘이 온통 어둡다. 마치 나의 지난 한 주 마음의 날씨만 같다. 언제고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그날에 꼭 오늘 가진 내 생각을 전하리라 생각하며 이제 그 충격조차도 마음에서 정리해 본다. 긴 글은 아니지만 이 글을 완성하기가 참 버거웠다. 매일 한 줄씩 쓰다 일주일이 되어버렸다. 동물도 털갈이를 하고, 나무들도 낙엽을 떨구며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나 역시 나의 다음 계절을 위해 비우고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