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생태경영을 읽고 떠오른 단상들
생태학자 최재천은 『생태경영』에서 생태계를 생산자·소비자·분해자 같은 생물적 요소뿐 아니라, 이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환경까지 포함한 구조로 설명한다. 물리적 환경을 제외한 생물 공동체는 군집이라 부르며, 군집을 둘러싼 공간·자원·기후 조건 등은 생태계를 떠받치는 핵심 기반이다. 아무리 다양하고 활력 있는 군집이라도 이를 지탱할 환경이 없다면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생태계의 본질은 주체의 자율성 자체가 아니라, 그 자율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환경의 설계에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지역문화, 창작자, K-컬처는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공통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군집의 활동은 활발하지만 이를 지탱할 환경은 취약하고, 에너지는 넘치지만 순환과 축적의 구조가 부족하다. 성취는 크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질 기반이 약한 것이다. 생태계적 관점에서 보면 세 영역 모두 결국 ‘환경 부족’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지역문화 생태계부터 보자.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시민 중심”, “지역 예술가 중심”의 문화도시를 표방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생태계라기보다 단기 군집의 반복에 가깝다. 대부분의 지역문화 사업은 1년 단위 공모로 진행되고, 평가 기준 역시 단기 성과에 치우쳐 있다. 이는 숲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매년 새 묘목을 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생태계는 시간이 축적되어야 유지되는데, 현재의 지역문화 구조는 그 축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군집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군집이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지 않은 구조적 모순이다.
창작자 생태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창작자들은 음악·영화·출판·웹툰·시각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성취를 이루고 있지만, 그 성과를 떠받치는 구조는 매우 불안정하다. 대부분 단기 프로젝트나 건당 계약에 의존하고 있어 장기적으로 역량을 쌓거나 창작을 축적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저작권과 수익 배분 구조도 투명하지 않아 창작의 성과가 창작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시도할 실험 공간도 충분하지 않다. 실패의 비용은 개인에게 집중되는 반면, 이를 흡수할 안전망은 거의 없다. 이처럼 창작자 생태계는 군집의 열정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환경적 지속성을 갖춘 생태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K-컬처 생태계 역시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K-팝,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이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이를 둘러싼 환경은 안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플랫폼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 음원 플랫폼, OTT, 소셜미디어가 생태계의 기후와 물길을 사실상 통제하며, 알고리즘·수익 배분·노출 구조 등 핵심 요소는 대부분 플랫폼이 결정한다. 산업의 집중화도 문제다. 대형 기획사에 자본·교육·유통 인프라가 집중되면서 중소 기획사와 새로운 장르는 자연스럽게 주변부로 밀려난다. 창작 노동의 저임금과 불안정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화려한 성취 뒤에는 군집의 열정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떠받칠 환경은 여전히 취약한 구조다.
결론적으로 세 영역이 공유하는 문제는 군집은 활발하지만, 이들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생태계의 환경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생태계는 군집의 의지나 열정만으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연 생태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종을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서식지를 만드는 일이다. 좋은 토양, 지속 가능한 물길, 균형 잡힌 기후,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 등의 기반이 갖춰져야 군집은 비로소 스스로 자율성을 발휘하며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문화, 창작자 생태계, 그리고 K-컬처가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환경의 설계'다. 장기적인 재원 구조, 공정한 노동 환경, 기반 시설의 균형, 실험과 실패를 흡수하는 안전망, 그리고 지역과 창작자가 스스로 환경을 설계할 수 있는 권한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군집의 활력은 일시적 현상에 머물고 오늘의 성취는 내일의 지속성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생태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군집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다. 창작자와 지역, 그리고 K-컬처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이 생태학적 상식을 사회적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