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길 잘했다고 느꼈던 순간들
내가 위로받았던 순간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된 건 나에게 또다시 위로가 필요할 때 사탕을 꺼내먹듯 알맞은 위로를 꺼내먹고 싶어서였다. 거창한 이유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당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얕게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위로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과정이 예상처럼 썩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충격적이게도 몇몇 굵직한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내가 언제 위로받았더라, 탁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위로가 누군가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기억에서 끄집어내기 더 더 어려웠던 것 같다는 게 연재를 예상보다 일찍 마치게 된 나의 뒤늦은 변명이다.
어쩌면 위로의 다른 말은 ‘살아있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쓸 말이 더 많았을 텐데. 에필로그를 쓰는 지금에서야 이걸 깨닫게 되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살면서 ’살아봤자 의미없다‘라는 씁쓸한 생각을 참 많이 했지만 그보다는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쬐금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살아있길 잘했다, 그런 순간들은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순간에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한가로운 주말 폭신폭신한 침대에서 사부작사부작 소리 나는 이불을 덮고 그 어떤 연락도 받지 않으며 뒹굴거릴 때,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집에 오자마자 신발도 가방도 다 벗어제끼고 냉장고에서 꺼내 온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꿀꺽꿀꺽 마셔댈 때, 춥디 추운 겨울날 누군가 뜯어 준 핫팩을 양쪽 주머니에 넣고 조물조물 거리며 찬바람 쌩하는 거리를 쏘다닐 때, 매번 지던 보드게임에서 드디어 남편을 이겼을 때, 집에 있는 귀엽고 사나운 고양이들이 무해한 냥냥펀치를 날릴 때, 엄마와 같이 K-드라마를 보며 엉엉 울 때, 아빠랑 김이 펄펄 나는 감자탕에 알싸한 소주를 마실 때, 동생과 동생의 여자친구가 술 취한 나의 수다폭탄을 물개박수 치며 들어줄 때,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광고주의 메일을 보고 공동대표님과 주먹을 부딪힐 때. 생각해 보면 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큼 대단치 않은 순간들이 너무 많다. 어쩌면 밀도 높은 위로란 인생에 몇 없을지도 모를 희귀한 에피소드에서 오는 게 아니라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상의 순간들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쓴 위로에 대한 글들은 별 것 아닌 위로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거기에 별의별 위로를 얹은 형태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나는 때로는 사람에게서, 때로는 술로부터, 때로는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에서 위로를 받아온 것 같다.
위로. 글을 연재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나를 짓누르던 단어였다. 이상하게도 어른이라는 단어보다 위로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더 어렵게 느껴졌다. 위로라는 단어는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그렇다.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섣불리 건네는 말들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때가 있다. 그래서 위로를 망설이기도 한다. 또 한편 누군가가 위로받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라 하면 왠지 모르게 인생의 엄청난 변곡점과도 같은 순간을 읊어야 할 것만 같다. 위로라는 말이 나한테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인지 나는 앞으로 위로라는 단어가 좀 더 다가가기 쉬운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위로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부정하거나 아니꼽게 보는 게 아니다. 대단한 것에 위로를 느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의 강박을 내려놓고 소소하다 못해 시원찮은 것들로부터 위로받는 순간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순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같은 순간에서도 위로를 받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몫이니 말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순간 위로가 가볍게, 쉽게, 자주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