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아가게 만드는 가족에 대해서
오랜만에 예전 회사 선배와 퇴근 후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나는 애초에 먼저 이직을 했고 선배는 회사에 오래도록 남아있다가 퇴사를 하셨는데 글쎄 여의도에 있는 증권사로 이직을 했다고 한다.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보니 이 사람이 이 회사에?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선배가 이직하고 처음 보는 자리였다. 어떻게, 금융치료는 잘 되셨으려나. 우리는 이촌역에 있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라는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먼저 도착해서 시원한 하이볼을 꿀꺽꿀꺽 마시며 마른 목을 축이고 있었다. 선배의 한껏 더 행복해진 모습을 기대하면서 증권맨은 언제 오시나, 흐뭇하게 기다리고 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대가 무색할 만큼 크게 당황했다. 선배는 안 그래도 목 끝까지 잠긴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서 사람이라 하기 어려운 몰골로 등장했다. 장소를 옮겨야 하나, 잠깐 고민했던 것도 같다. 딱 봐도 인생의 저점을 찍고 있는 선배를 데리고 '인생의 하이라이트'라는 술집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건지, 나 원 참.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고 속이 많이도 상했다. 어디 아프시냐, 괜찮으신 거 맞냐, 술을 마시는 내내 거듭 물었다. 선배는 축 늘어진 말투로 괜찮아,라고 힘없이 답했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들어보니 선배는 이직한 회사에 전혀 스며들지 못한 것 같았다. 선배와 새 회사는 마치 섞이고 싶어도 섞이지 못한 채 그저 마지못해 몸을 맞대고 있는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선배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배와 술을 마시고 헤어진 다음 날 나는 선배에게 평소엔 걸지도 않는 전화를 걸었다. 몇 통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으셨다. 콜백을 무조건 하는 양반인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선배가 정말 죽었을까 봐 발을 동동 굴렸다. 결국 선배에게서 답장이 온 건 꼬박 며칠이 지난 후였다. 선배는 또 괜찮다고 말했다. 여전히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다행히도 선배는 몇 개월 후 그 회사를 때려치웠다. 훗날 선배가 알려주었는데 나와 술을 마셨던 그 시기 즈음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회사를 그만두어야 될 것 같다'라고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맷집이 센 선배가 그 정도로 이야기할 정도면 버틸 만큼 버틴 게 틀림없었다. 평소 같은 상황이라 해도 퇴사하겠다는 말이 편치 않았을 텐데 선배의 상황은 더 복잡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막 지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돈 들 일도 많고 미래에 대해서 걱정도 많은 시기여서 아내에게 더 미안했을테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고 있던 선배의 아내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래'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배는 아직까지도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아내 덕분에 그 모든 과정을 버틸 수 있었다고. 그렇게 선배가 퇴사하고서 우리는 한 번 더 만났다.
선배는 저번에 봤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배는 웃기까지 했다. 웃기까지 했다고 하는 말이 웃기다. 원래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나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선배를 보며 신기해하면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나 달라질 수 있다니. 회사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나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 선배의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술이 유독 쓰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한편으로는 선배 옆에 든든한 아내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선배의 무얼 믿고 그만둬도 된다고 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언니가 선배를 마음 깊이 믿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 분명한 사실이 선배를 그동안 조금이나마 숨쉬게 했던 것 같다. 나는 몇 주만에 숨을 제대로 쉬는 선배를 보며 배우자에게 그 정도의 신뢰를 받는 선배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도 회사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게 무엇이었을까, 떠올려보면 나도 남편이 생각난다. 일하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쪼르르 달려가 남편의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고 찡찡거린다. 남편은 늘 내 신세한탄을 들어준다. 뭐, 가끔 핸드폰을 보거나 딴짓하면서 들어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듣기는 끝까지 다 들어준다. 한창 떠들다가 뿔난 표정으로 잘 듣고 있어? 라고 물으면 AI가 줄거리를 요약해 주듯 내 이야기를 정확하게 요약해 낸다. 음, 잘 듣고 있군, 하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또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남편은 정말 신기하게 내 상황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로 힘들어하면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로 힘겨워하면 그렇게 머리를 싸맬 시간에 행동하라고 따끔하게 조언해 준다. 남편은 내가 놓치는 무언가를 잡아내는 것만 같다. 남편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 현자에게 솔루션을 받은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해진다.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났을 즈음 정말 중요한 입찰 건이 들어왔다. 인지도 높은 브랜드였거니와 예산 규모도 우리가 과제로 받았던 금액 중 역대 최고였다. 브랜드의 무드도 우리 회사와 잘 맞을 것 같아 기대감이 들었다. 나와 공동대표는 들끓는 승부욕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다. 하고 싶은 마음도 너무 티 내면 촌스러울 수 있으니까. 프로답게 차분하게 생각하자. 그래, 우리의 이름을 걸고 내보내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준비하자고! 그렇게 우리는 최대치의 출력으로 폭주기관차가 되어 달려 나갔다. 사무실에 있는 시간 동안이면 늘 회의를 했고 집에 있는 동안이면 우리가 우리의 아이디어에 너무 심취해 있는 건 아닌지, 좀 더 나은 아이디어는 없을지 검열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2주 간의 피 튀기는 시간을 거쳐 피칭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이디어의 특성상 발표를 내가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공동대표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나는 마냥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발표장으로 들어섰다.
예상보다 참석한 광고주의 인원이 많았다는 점과 광고주들이 발표에 대해 반응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빼고 발표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다들 미리 짠 건지 냉소적인 표정으로 일관했다. 뭐, 나중에는 피식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나도 점차 적응하고선 발표를 잘 마쳤다. 발표가 끝난 후 광고주 측에서는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대행사들의 피칭이 아직 남아있어서 평가를 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어찌 됐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도 그렇고 공동대표도 그렇고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바랐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려는 건지 이번 입찰 건에서 우리를 똑 떨어뜨렸다.
결과 발표가 나기 전 남편은 그동안 입찰 준비를 하느라 고생했다며 주말에 나를 오마카세 집으로 데려갔다. 미리 예약을 해뒀다고 한다. 회와 해산물은 삼시 세 끼로 365일 내내 먹을 수 있는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열심히 먹어댔다. 앗, 물고기라는 비유는 지금 상황에서 좀 폭력적이려나. 아무튼 그런 내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남편이 말했다.
"축하주가 될지, 위로주가 될지 모르겠지만 고생 많았어."
축하주의 기억으로 남길 바랐던 그날의 술은 결과적으로 위로주가 되어버렸다. 워낙에 간절하게 바라기도 했고 욕심도 났던 프로젝트였기도 해서 결과 발표가 난 후 속이 퍽 상했다. 남편은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고 하면서도 내 회사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도 경쟁력 있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점검해 보라고 했다. 또 한 번 따끔하게 조언하는 남편 덕분에 마냥 슬픔에 젖어들 겨를도 없이 나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다시 한번 정신을 차렸다.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편이 너무 매정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업으로 인해 고충을 겪는 걸 이야기하면 남편은 웃으면서 소라는 역시 월급쟁이가 체질인가 봐, 하고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놀려대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나는 때로는 사려 깊게 어르고 달래야, 때로는 냉정하게 일침을 놓아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인데 나조차도 내가 어떤 때에 어르고 달래는 게 필요한지, 어떤 때에 냉정한 일침이 필요한지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남편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남편은 매 순간의 나에게 딱 필요한 것을 해준다. 그러다 보면 힘들어서 찡찡거리던 순간도 어찌어찌 해결되어 내 인생에 나쁘지 않은 순간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을 만난 순간이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남편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또 그러겠지.
"내 생각은 안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