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의 뒷골목에서 발견한 네잎클로버

예고 없이 내 인생에 찾아오는 사람들

by 건빵진소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더라. 새벽 2시, 서울에서도 막차가 끊길 시간인데 낯선 여행지에 와서까지 술을 퍼 마시다 차편이 끊겨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꼴이라니. 그것도 걸어서 4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야 하다니. 내 인생에 또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겼군, 히히. 자꾸만 달아오르는 취기 탓인지 낯선 곳에서의 깜깜한 밤, 그 밤을 가득 채우는 특유의 날 서 있는 공기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둑어둑한 거리를 팔랑팔랑 해맑게 걸어가던 겁 없던 시절이 있었다.

몇 시간 전. 당시 나의 최애 드라마였던 <심야식당>의 모티프가 된 신주쿠의 고르덴가이(골든가이)에 도착했다. 사전답사를 한답시고 며칠 전 일본인 친구에게 거기 어때? 하고 물어봤었는데 친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라 설마 거기 가려고? 라고 되물었다. 우리 또래 여자애들은 거기 자체를 안 간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하지만 청개구리 같았던 나는 정복욕을 활활 태우며 그래? 오히려 좋아, 라고 답했다. 고르덴가이는 서너 개 정도의 긴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구역인데 그곳에는 1, 2층을 포함해서 총 200개가 넘는 술집이 밀집해 있다. 이렇게 작디작은 구역에 그렇게나 많은 술집이 있다니 죽기 전에 몇이나 가볼 수 있으려나, 싶을 정도다. 게다가 술집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생겨서는 오밀조밀 붙어있다 보니 누군가에게 추천받는다 하더라도 그 가게를 찾아갈 수조차 없게 생겨먹은 곳이다. 나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몇 바퀴를 돌며 내가 비벼도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가게를 찾아 나섰다.

처음 찾은 가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굳이 굳게 닫혀 있는 문의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지하로 난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보니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군, 모험심으로 들끓어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는 문을 한 차례 또 열었다. 문을 연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들에 담긴 마음이 빠르게 읽혔다. 순간 들어오면 안 될 곳을 들어간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한 명이에요, 라고 말했다. 테이블 좌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 앉자마자 바에 앉아있던 손님들과 사장님이 우르르 와서 내 앞에 앉았다. 가뜩이나 일본어도 못하는데 다들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신기하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이름이 뭐예요?"

"소라예요."

그러자 다들 유쾌하게 웃으며 어머! 일본에 소라에상이라는 유명한 캐릭터가 있는데! 라고 말했다. 아하하, 그래요? 극외향형인 나조차도 언어의 장벽 앞에서 속절없이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나는 그동안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주워 들었던 흔한 감탄사 몇 개를 돌려쓰며 그들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다만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바, 즉 고독한 애주가처럼 쓸쓸함 한 잔을 진득하게 음미하기엔 너무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나는 또 한 번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남은 술을 한 입에 털어마셨다.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던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하며 다른 가게를 둘러보러 나섰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고르덴가이에서 문이 닫혀 있는 가게는 단골손님만 받겠다는 의중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모르고 그들의 세상에 다짜고짜 쳐들어간 셈이 되었는데도 쫓겨나지 않고 소라에상이라는 별명과 함께 나름대로의 환대를 받았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에 들어간 가게는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문이 활짝 열려있었는데 안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바 테이블에 앉아 갓 따른 맥주를 홀짝이고 계셨다. 나는 이번에도 한 명이에요, 라고 말하며 눈치껏 자리를 잡았다. 가게를 빙 둘러보다가 귀퉁이에 <심야식당> 만화책이 꽂혀있는 게 보였다.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들뜬 나는 할머니에게 손짓 발짓을 해가며 저 만화책을 보고 이곳에 왔다는 뜻을 전하려 애썼다. 할머니는 뭐라 뭐라 말씀하셨는데 아마 만화 <심야식당>의 모티프가 된 배경이 이 가게라는 뜻인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있는 힘껏 들뜬 기분을 만끽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아직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 순간 이 가게를 찾은 것이 운명의 일환이라 단정 짓고선 <심야식당>에 나오는 사연 하나쯤 있는 손님처럼 고독함을 온몸으로 풍기며 하이볼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한테 말을 붙여볼까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외국인 남녀가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들은 내 옆에 한 자리를 비워두고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예상대로 주문 단계에서부터 엄청난 난관에 부딪혔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 사장님께 술을 주문하려고 하는데 누가 봐도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버거워 보였다. 오지랖 넓고 참을성 없는 나는 이 답답한 소통의 광경을 더는 방관할 수 없어서 속으로 으으! 거리다가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고야 말았다. 할머니에게 아는 일본어를 총동원해서 설명했고 내가 이해한 내용을 커플에게 영어로 되돌려줬다. 주문을 마치고선 커플이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아,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대화에 스며들게 되었다. 한 사람은 호주,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발음까지 비슷한 나라 출신이라니 둘은 천생연분임이 분명했다. 둘은 홍콩으로 일하러 왔다가 처음 만나게 되었고 마음이 맞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들이 나와 합석한 걸 후회할 만큼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그들이 운명이라는 뜻을 담아 온갖 주접을 떨어댔다. 주접의 언어는 언제나 만국공통인 건지 다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고는 민망스러워했다. 아무튼 그들은 도쿄에 함께 휴가를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그들과 나 사이에 두고 있던 빈자리 위에 내 엉덩이가 냉큼 자리 잡고 있었다. 어라랏? 어느새 술잔도 함께 부딪히고 있었다. 또 어쩌다 보니 그들이 결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술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갔던 건지 그들보다 나이도 어린 내가 나만의 개똥철학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성이 고운 점마저도 서로 닮았다. 변변찮은 나의 영어 실력과 컨설팅 내용을 듣고 맞장구도 쳐주고 웃어주기까지 했다. 처음 만난 외국인 손님들끼리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주인 할머니도 자주 따라 웃었다. 그리고 결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커플과 다음 차를 가게 되었다. 눈치 없이 그들의 데이트에 낀 나는 늦은 밤 신주쿠의 뒷골목에서 싱싱한 사시미에 맛 좋은 초밥까지 얹어 푸짐하게 식사를 해버렸고 그들은 심지어 내가 낼 값까지 계산해 버렸다. 나는 연거푸 돈을 사양하는 그들에게 멀쩡한 정신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종종 궁금해서 계정을 살펴봤는데 그들은 도쿄에서 나에게 상담을 받고서(주접이다) 몇 년 후 결국 결혼에 골인했고 최근에는 둘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뭐, 나의 상담 덕분이라는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웃는 모습마저 닮은 그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쩌다 보니’가 겹치고 겹쳐 예상치 못한 인연을 낳는다. 어쩌다 보니 영화 <심야식당>에 꽂혔고 어쩌다 보니 그 배경이 된 고르덴가이에 가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는 그 가게에 가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마침 휴가를 온 외국인 커플의 통역을 맡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그 인연이 아직까지도 희미하지만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런 케이스를 심심찮게 경험해오고 있다. 내가 ’어쩌다 보니‘가 주는 인연을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멋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준다고 느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게 봐주는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내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큼 버는지, 얼마큼 이뤘는지보다 내가 어떤 관심사를 가졌는지, 어떤 곳을 여행해 왔는지, 어떤 진귀한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럴 때면 나는 일상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멋대로 평가하고 맘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어 진짜 내가 되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해방의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왠지 모르게 네잎클로버가 떠오른다. 어쩌다 찾아온 이 행운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싶어 조만간 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기대가 든다. 그렇게나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마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나에게 이따금씩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그야말로 낯설고 다정해서 반듯하게 코팅해두고 싶다.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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