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수는 처음 맞이해 봐서요

의지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 일하기

by 건빵진소라

"어떻게 하면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에게 부사수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에 퇴근 후 같은 팀 동료를 꼬셔 함께 하이볼을 때려붓던 중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짐작하고 있었거늘 막상 상상만 하던 부사수가 진짜로 생긴다고 하니 요상스러운 고민이 드는 것이었다. 내 고민을 듣자마자 친구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좋은 '선배'가 될 생각을 하지 마."

아차, 그렇네. 굳이 굳이 선배 노릇을 하려 했던 것이 스스로 끔찍하게 여겨져 멋쩍게 하이볼 잔 안에 있던 얼음을 잘근 씹었다. 아사삭 부서진 얼음 조각처럼 선배 노릇을 하려던 생각을 잘게 부숴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래, 그냥 같은 위계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일하자, 나는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

부사수가 생긴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회의실을 예약하고 문서를 출력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는 건 지금까지 내 몫이었는데 이렇게 부수적이지만 꼭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은 부사수에게 맡기고 광고주와 틈틈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받아내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거나 팀장님께 광고주 제안 전 정리한 문서를 보고하는 일을 메인으로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 주어지는 건가! 회사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 줄곧 내가 얼마큼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제대로 가늠해보고 싶었던 나는 나의 민낯을 그대로 까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고 조금 흥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력이 더 많다는 이유로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단정 짓고선 사수의 역할을 부여하는 회사의 처사에 약간의 불편감을 품었던 것도 같다. 경력이 많다고 다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뭐, 내가 불편하든 어쨌든 경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에 대한 경험이 조금 더 많을 테고 일이 조금 더 익숙한 건 맞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것보다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게 예전보다 더 얹어진 일에 대한 압박감보다는 앞으로 부사수에게 얹어야 할 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오랜 시간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이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 너한테 주는 거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어쩌지? '우리 때는 부사수가 이런 거 다 했어'라고 꼰대처럼 말하는 것처럼 느끼면 어떡하지? 나는 어떤 부사수를 만나든 요청의 말을 내뱉어야 할 때면 예쁜 포장지를 고르고 골라 지시나 요청의 메시지를 꼼꼼하게 여며서 조심스럽게 건넸다. 처음에는 포장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제법 시간도 단축되었다. 고백하자면 부사수와의 상호작용에 익숙해지면서 포장을 게을리한 적도 있긴 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나의 사수 노릇은 오만할 수도 있지만 제법 나쁘지 않게 평가받아 온 것 같다. 나에게 선배 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하이볼 동지가 어느 날 부사수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나를 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보니까 네가 첫 사수면 그 사람한테는 완전 축복인 것 같아."

하지만 모두가 나를 축복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한 번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부사수와 일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그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MBTI 결과처럼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와 사수-부사수로 일하기 전 그녀에게 담당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 다이렉트로 일하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컴플레인을 하는 경우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회사는 광고주와 내부 유관부서 케어 차원에서 그녀를 주요 업무에서 배제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나는 그녀의 사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2인 1조로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 많고 자존심도 센 그녀에게 업무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이 썩 편하진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여긴 회사인데. 나는 그녀와 함께 일하는 몇 개월 동안 정중하게 업무 요청을 했다. 그러고선 그녀가 업무적으로 어려운 일을 혼자 견디고 있는 건 아닐지 혹은 나와 관계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그녀도 내가 이래저래 나름대로 배려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나에게 종종 고맙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리 팀에 중요한 입찰 건이 들어왔다. 나와 부사수 그리고 팀에 새로 들어온 주니어 동료와 하이볼 동지, 이렇게 넷이서 프로젝트를 맡았다. 광고회사에서 입찰을 맡게 되면 통상 2~3주 동안 제안서를 준비하게 되는데 내가 메인이 되어 각자 해야 할 일을 나눴다. 그렇게 착착 일이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입찰 준비를 시작한 지 며칠도 채 안되어서 나의 하이볼 동지가 내 부사수와 일을 못해먹겠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것이었다. 하이볼 동지가 말했다.

"너, 어떻게 저 사람이랑 몇 개월씩이나 일하고 있는 거야? 나는 몇 분만 대화해도 복장이 터지는데."

나의 부사수는 소위 말해 애티튜드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남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퍽 심각했던 듯하다. 그녀는 남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자신의 기량을 증명해 내려 노력하는 시간 동안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속도가 느리니 기다려줘야 한다고 혹은 자신에게 적절한 기회를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때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부사수라는 사람에게 쓴소리를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우리가 해내야 하는 일의 퀄리티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은 뭐가 됐든 그때의 나에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상대가 듣기 싫을법한 말들을 힘주어 내뱉었다. 이후 그녀는 프로젝트 동료들이 함께 있는 메신저 방에 나로 인해 불쾌했던 마음이 빤히 보이는 장문의 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업무에서 빠지다시피 했다. 팀장님도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 후 그녀는 팀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하다가 또 문제가 생겼는지 결국 퇴사를 해버렸다.

그녀의 경우처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나의 부사수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 트라우마가 떠올라 잔뜩 쫄아붙었는데 결론적으로 이번에 만난 그녀는 내 마음속에 축복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녀는 소위 말해 알아서 잘하는 딱 깔끔하고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내가 조심스럽게 업무 요청을 할 때면 그녀는 제발 편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서글서글하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일도 빠르게, 게다가 완성도까지 높게 해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중에 혹여나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 같은 딸을 낳고 싶다는 주접 아닌 주접을 떨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내 마음과 별개로 그녀는 아쉽게도 나보다 먼저 퇴사를 했는데 그때 나에게 전한 손 편지를 나는 아직까지 책장에 두고서 가끔 꺼내어 읽어본다. 편지에는 언제나 앞으로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내 모습이 든든했다며, 많이 의지했다는 그녀의 고백이 적혀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의지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평균적으로 잠자는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만큼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동료라는 건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우리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물들곤 한다. 때로는 그 영역이 사소한 말버릇이나 습관에 머물 때도 있고 어떨 땐 일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번지기도 한다. 기꺼이 물들고 싶은 동료가 있는 한편 절대 섞이고 싶지 않은 부류의 동료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테다. 그래서 동료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귀하다. 사수와 부사수라는 위계를 벗어나 동료 대 동료로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는 더욱 귀하다. 그렇게나 귀한 동료들을 여럿 얻었으니 나는 제법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테다. 치열하고도 외로운 일터에서 나를 느슨하고도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귀한 사람들. 이런 행운을 더 붙들고 싶어서 여전히 나는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이번 고민은 하이볼 동지에게 이야기해도 펄쩍 뛰며 질색팔색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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