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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 Sep 06. 2022

어디까지 익었나

소소 일상

친구네와 함께 묵은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입구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키운 채소를 파는 무인매대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채소를 고른 다음 티슈 상자 크기의 돈통에 현금을 넣고 가면 된다. 비닐 봉지 위에 수기로 붙여 놓은 가격표가 정겹다. 현금이 없으면 계좌 이체도 가능하다. 고공 행진하는 물가 탓에 쉽사리 장바구니를 채우지 못하는 요즘, 매대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푸짐한 채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횡재를 한 기분이 들었다.     

     

애호박, 비트, 깻잎, 청양고추, 노각, 사과 등 웬만한 상점만큼 종류가 다양했다. '이건 바로 사야해!' 친구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장을 봤다. 마트에서 한 개 삼천원에 육박하는 애호박이 두 덩이 묶음으로 이천원 딱지가 붙어 있다. 예닐곱개가 넘게 담긴 사과는 한 봉지 사천원인데, 세 봉지를 사면 만원이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종류별로 싹쓸이를 한 가격은 총 일만삼천원. 아마 마트를 갔으면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냈어야 할 만큼의 양이다.      

     

이천원어치 깻잎 봉지를 뜯으니 여섯 묶음이나 쏟아진다. 삼천원 딱지가 붙은 비트 봉지에는 비트가 열 개 넘게 들어있다. 못생기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저렴하게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크기가 조금 작을 뿐 전혀 뒤처짐이 없는 상품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애호박 전을 부쳤다. 둥글고 통통한 애호박을 써는 순간 탄탄함과 싱싱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즐거움을 두 배로 불렸다. 술술 넘어간다.     

     

깻잎과 노각은 장아찌로, 비트는 피클을 담기로 했다. 양배추와 무가 빠질 수 없으니 한번 더 장을 봤다. 장아찌와 피클을 담을 유리병 소독을 마치고 재료를 다듬었다. 단촛물을 끓일 때 식초를 매번 같이 넣었지만 이번은 다 끓이고 나서 식초를 추가하는 방법으로 바꿔보았다. 대용량 간장과 식초가 순식간에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인다. 올해 내내 든든할 만큼의 반찬이 완성되었다. 이제 맛있게 익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하루 반나절만 잘 익히면 바로 식탁 위에 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기특한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공원 트랙을 돌러 나갔다. 배롱나무 잎사귀가 어느새 누르스름하게 바뀌어 있다. 가을을 품은 햇살이 나른하다. 이름 모를 조경수에는 빨간 열매가 수북하게 맺혀 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무르익어가는 계절, 가을이 왔음이다. 시간이 되면 정직하게 익어가는 나무들을 둘러보며 사람처럼 천천히 익어가는 존재가 또 있을까 물음표를 던져본다. 그저 시간이 주어지는 것만으로 속 깊은 곳까지 충분히 익었다고 말할 수 없음이다.     

     

재료 본연의 신선도에 따라 다 익은 장아찌의 맛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사람 또한 그 바탕이 맑아야 세월의 짙은 그림자를 곱게 물들여낼 수 있으리라. 과연 나는 좋은 재료인가. 다른 물음표를 함께 던져본다. 맛있게 익어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아찌와 같이, 찬찬히 물들어 마음을 간지럽히는 낙엽같이 '익음으로써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낮게 깔린 구름을 따라 여러 질문이 스며들었다.     

     

결국 삶으로부터 배워 익혀지는 것 아니던가. 경험의 산물이 만들어가는 시간. 평생 배우고, 익히고, 적용하고, 다듬어 나가야 함이다. 논어에서 말하기를 '학이치도. 즉, 배움을 통해 자신의 도를 완성하라' 했다. 삶의 현장이 곧 배움의 현장이다. 잘 익어가는 것이 평생의 숙제이자 자신의 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리라.     

     

장아찌와 피클이 잘 있나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비트에서 우러난 자줏빛 물이 곱다. 초록 깻잎이 간장을 머금어 숨이 푹 죽었다. 짙어가는 가을 바람에 울타리 옆 무성하게 핀 강아지풀도 벼처럼 익어간다. 황금빛은 아니어도 적당히 누런 빛을 띤 모습이다. 내 인생은 어디까지 익었나, 얼마나 여물었을까. 식탁에 앉아 하늘거리는 강아지풀을 내다보며 곰곰 생각에 잠겨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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