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족
도시의 지배층과 상류 계급은 자신들을 지켜 줄 보다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들은 돌로 성을 쌓았다. 성은 불확실성으로부터 공간을 제공해준다. 성의 안팎은 차등이다. A군(群)과 B군에 속한 무리들을 확실히 구분한다.
단단한 성벽은 B군으로부터 부와 가족을 보호해 주었다. 팔레스타인의 여리고 성은 돌로 만든 최초의 성이다. 이 성은 B.C 1400년 경 요단강을 건너 온 히브리 민족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난공불락이었다.
고대 중국은 흙으로 성을 만들었다. 흙 반죽에 건초를 섞어 강도를 높였다. 고대의 만리장성 역시 흙으로 지어졌다. 나중에는 흙에 모래와 자갈을 버무려 더 단단해졌다. 지금 남아 있는 벽돌 성벽은 명대(明代)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동방의 축성술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유럽의 왕들은 시리아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 중동의 성을 본 따 자신들의 성을 지었다. 지켜야할 것이 많아질수록 성은 점점 높아졌고, 더 단단해졌다.
투석기의 등장 이후 성은 과시용으로 전락했다. 특히 대포의 발명으로 1453년 단단했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성은 제 기능을 다했다. 대포를 사용해 도시를 함락시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유목민 몽골과 정주민 금(金)의 차이는 현격했다. 정주민은 성을 쌓아 자신들을 지키려 했다. 우뚝 솟은 성은 몽골군 말의 전진을 가로 막았다. 반면 금의 군대는 몽골의 위장 후퇴 전술에 애를 먹었다.
몽골족은 항복을 한 후 돌아서서 등 뒤에 칼을 꽂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배반에 대한 칭기즈칸의 대응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성 주민 전원 몰살이었다. 그를 배반한 성은 완전히 비워졌다.
빈 마을은 하나 둘 초원으로 변했다. 재공격 시 빈 마을은 말의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초원으로 변한 농지는 말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이중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중동지역으로부터 새로운 공성 무기가 도입되면서 전투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정주문명에 대한 공격은 정주문명 방식이 더 용이했다. 투석기가 성벽 너머로 돌을 날려 보내자 전쟁은 훨씬 수월해졌다.
투사기는 한꺼번에 여러 대의 화살을 쏘아댔다. 몽골과 금의 전쟁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화염방사기가 등장했다. 몽골군은 나중에 유럽과의 전쟁에서 화염방사기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불을 뿜는 것은 신화 속의 용(龍)뿐이었다. 몽골이 타타르(지옥)라고 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화북 고도(古都)들의 성벽은 높고 단단했다. 그러나 신무기까지 도입한 몽골군을 막아내기엔 충분치 않았다. 동북방면의 제베는 수월하게 요양(遼陽)을 함락시켰다. 요양은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다. 제베는 요양에서 거짓 후퇴 전술을 활용했다. 금에겐 낯선 전술이었다.
한창 전쟁 중이던 몽골군이 갑자기 물자와 식량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이를 지켜보던 금의 군사들은 한꺼번에 성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몽골군대가 버리고 간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삽시간에 성 밖 벌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탐욕은 참사라는 대형 재난을 초래했다.
달아나던 제베는 잽싸게 말머리를 돌렸다. 금의 군사들은 성을 나올 때의 속도로 안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성으로 가는 길은 사람과 수레에 의해 순식간에 꽉 막혀 버렸다. 제베의 군사들은 천천히 그들을 유린했다.
요양이 떨어진 후 하북과 산동의 여러 도시들이 차례로 칭기즈칸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간을 두들기고 제남을 취했다. 몽골군은 수도 북경을 향해 서서히 압박해갔다.
그러자 금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칭기즈칸의 부대가 점점 가까워지자 북경성 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영제가 살해되고 선종이 제위에 올랐다. 반란자들은 늘 그렇듯 무능하고 다루기 쉬운 인물에게 제위를 맡겼다.
선종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칭기즈칸에게 말 3천 마리와 금, 비단, 공주 등을 배상금으로 제시했다. 새 황제는 겁에 질려 있었다. 굳이 이 조건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몽골의 말과 전사들은 지쳐있었다.
칭기즈칸은 조건 하나를 추가로 제시했다. 자신의 지위가 금의 선종보다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선종은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선종과 그의 조정은 간신히 파멸을 면했다. 전리품은 수송하기 버거울 만큼 많았다.
칭기즈칸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화북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겐 초원의 삶이 편했다. 칭기즈칸은 수많은 도시를 정복했다. 하지만 도시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본 것은 중앙아시아 부하라가 유일했다.
칭기즈칸은 협력의 보답으로 자신의 딸을 거란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거란(契丹)족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당(唐)을 무너뜨린 민족이다. 서양에선 거란을 키타이로 불렀다. 항공사 캐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의 사호가 키타이에서 비롯됐다.
몽골군은 서서히 북상했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몽골군은 사냥을 즐기며 이동하기 쉬운 가을을 기다렸다. 몽골군이 돌아가자 금의 선종은 잽싸게 조정을 개봉(開封)으로 옮겨갔다.
개봉은 황하 이남에 있다. 황하는 몽골군의 말이 건너기엔 너무 넓었다. 큰 강이라는 천연의 방벽에 기대어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다는 계산이었다. 버려진 것은 백성들이었다.
북상하던 몽골군이 다시 남하했다. 금의 백성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손쉽게 북경을 손에 넣었다. 칭기즈칸은 성벽과 농지로 둘러싸인 답답한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초원을 떠나온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제대로 시원하게 말을 달릴 수 있는 그곳이 그리웠다.
금은 아예 황하 이북을 포기했다. 하남과 섬서의 지방정부로 만족했다. 칭기즈칸은 맹장 무칼리를 화북에 남겨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칭기즈칸의 관심은 이제 서쪽으로 향했다. 고려에서 중동으로 이어지는 황금 비단길에는 그가 늘 꿈꿔온 나라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