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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22.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15


칸의 죽음


한 사람을 붙잡기 위해 2만 5000명의 기병대가 동원됐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추격대였다. 사령관은 제베와 수보타이. 몽골이 자랑하던 맹장들이었다. 상승(常勝)의 장군과 불패(不敗)의 기마대. 지구상 어느 군대와 싸워도 지지 않을 강력한 전투부대가 추격에 나섰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칭기즈칸을 우습게본 한 사람을 쫓고 있었다. 한 때 백성들은 그를 ‘제 2의 알렉산드로스’로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시종 몇 명을 거느린 피곤한 늙은이일 뿐이었다.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로트바일러(강한 체력을 가진 최고의 사냥개)를 수천 마리나 푼 셈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또 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어이없게도 무함마드는 이미 죽고 난 다음이었다. 추격전은 애초의 목적을 상실한 지도 모른 채 계속 수행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전례 없는 변이가 일어났다.  

대체 카프카스 산맥의 북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몽골군이 처음 접한 군대는 기독교 국가 조지아였다. 이웃 이슬람 국가들과의 잦은 전쟁을 통해 충분한 실전경험을 축척한 군대였다. 

그들은 몽골군의 소문을 허세로 여겼다. 수보타이는 몇 차례 조지아 군과 탐색전을 벌인 후 주춤주춤 물러났다. 흥분한 조지아 기병은 몽골군을 바짝 추격했다. 어느 사이엔가 몽골군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양군 사이의 간격은 좁아질듯 하면 멀어졌다. 멀어지는가 하면 다시 좁아졌다. 상대는 완전히 달아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었다. 

조지아군 사령관은 상대의 전략에 휘말렸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지칠 때까지 뒤를 쫓았다. 몽골군은 여전히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했다. 

몽골군은 티플리스로 향하고 있었다. 몽골군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장소였다. 몽골군은 거짓 퇴각 중이었다. 조지아 군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지만. 앞서 가던 수보타이 군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조지아 사령관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긴 이미 늦었다. 갑자기 제베가 이끄는 또 다른 몽골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리 그곳에 잠복하고 있던 부대였다. 조지아 군은 혼란에 빠졌다. 전투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결판났다. 몽골군의 완승이었다. 


수보타이는 조지아를 속국으로 삼았다. 몽골이 소유한 최초의 유럽 속국이었다. 몽골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철의 관문’을 지나 계속 북상했다. 그들이 왜 계속 북으로 올라 간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무함마드가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수보타이와 제베는 넓은 흑토 초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초지를 지키기 위해 나선 8만 2000에 달하는 강력한 유럽의 군대를 발견했다. 모스크바, 키에프, 알란, 체르케스 등 여러 공국에서 파견한 루시 연합군단이었다. 루시는 오늘 날 러시아로 불린다.      

그들을 상대로 몽골군은 동일한 작전을 펼쳤다. 몽골군은 러시아연합군(편의상)을 관찰하며 서서히 후퇴했다. 몽골군이 속도를 달리할 때마다 러시아연합군은 작은 무리로 나누어졌다. 

러시아연합군 추격자들은 보병과 기병, 병참이 뒤섞여 있었다. 부대마다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어느 강가에 이르러 양군은 첫 전투를 벌였다. 역시 몽골군이 미리 점찍어 둔 장소였다. 맨 먼저 부러진 것은 러시아 보병부대였다. 

몽골군의 화살 공격에 보병의 대오가 흔들렸다. 몽골기병은 서서히 러시아연합군을 압박해갔다. 궁수간의 대결도 몽골군의 완승이었다. 우선 활의 비거리에서 차이가 났다. 러시아연합군의 화살은 몽골군 근처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몽골군의 활은 동물의 심줄과 뿔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활 전체를 사슴 가죽으로 말아서 감아 탄력성을 높였다. 이중 꺾임 구조로 되어 있어 사거리가 길었다. 고도로 발달된 미사일 체제를 갖춘 현대의 러시아와는 정반대였다. 

몽골의 강력한 활은 러시아연합군에게 참변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또 한 번 변종을 낳았다. 러시아의 화(禍)는 도리어 복(福)이 되었다. 몽골과의 패배이후 러시아의 작은 공국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생겨났다. 몽골 연구가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는 “오늘 날 러시아 제국의 기원은 12세기 몽골의 침략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경계는 넓어져 갔다. 더불어 제국의 주인은 늙어갔다. 자연의 위대함은 모든 생명들에 공평하게 종착지를 둔 데 있다. 슬슬 후계를 생각해야 했다. 정복보다 더 어려운 것이 수성이다. 칭기즈칸은 몽골 고원 부족의 성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부족가운데 흔적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아들들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은 모두 제국의 승계를 바랐다. 권력에 취한 아들들은 예민해져 있었다. 말하는 순서를 놓고 다투기까지 했다. 칭기즈칸은 장남인 주치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성미 급한 둘째 차가다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몽골에서 발언의 순서는 곧 정통성과 직결됐다. 

차가다이는 ‘사생아’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주치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 두 형제는 아버지 앞에서 주먹다툼을 벌였다. 칭기즈칸은 이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함께 우르겐치 정벌에 내보냈다. 

전쟁터에서 부대끼다 보면 저절로 전우애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형제를 회복하라는 의도였다. 두 형제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6개월을 허비했다. 중동 원정에서 한 도시를 정복하느라 걸린 가장 오랜 기간이었다. 결국 주치는 아버지를 벗어나 새로 발견한 러시아 초지로 떠나갔다.  

형제간의 다툼은 온건한 성품의 우구데이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에겐 딱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지나치게 술을 좋아했다. 호주(好酒)는 그의 건강을 해쳤다. 나중 일이지만 몽골의 유럽 2차 원정대는 우구데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기 귀국했다. 

칭기즈칸이나 우구데이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유럽 대부분이 몽골의 속국이 되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제베가 전사했다. 수보타이는 귀국 길에 주치를 데려왔다. 주치는 아버지에게 10만 마리의 말을 선물했다. 그리고 다시 떠나갔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칭기즈칸에겐 아직 서하(西夏)와 남송이라는 미정복지가 남아 있었다. 티베트로 불리는 서하는 내몽골과 둔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하는 칭기즈칸에게 협력과 배반을 번갈아가며 해왔다. 칭기즈칸이 경멸하는 방식이었다. 

칭기즈칸은 직접 서하 정벌에 나섰다. 남송에는 믿음직스런 수보타이를 보냈다. 부하들은 칭기즈칸의 친정을 만류했다. 칸의 나이 어느덧 예순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릴 순 없었다. 

칭기즈칸은 겨울에 고비사막을 건넜다. 사막횡단은 겨울이 더 유리했다. 여름의 사막더위는 말과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은 야생마 사냥을 나갔다가 부상을 당했다. 칭기즈칸의 막사 앞에 창이 꽂혔다. 칸이 아프다는 표식이었다. 

칭기즈칸은 서하의 수도 은천(銀川) 정복을 얼마 앞두고 죽었다. 1227년 8월 18일 그의 나이 60살이었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 장남 주치의 사망 소식을 먼저 들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마지막 유언은 “중국 정복을 완수하라”였다. 중국이라면 남송을 말했다. 최대의 제국 남송을 남겨 두면 세계정복이라 말할 수 없었다. 칭기즈칸의 주검은 몽골 고원으로 옮겨졌다. 무덤의 위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커다란 나무 밑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세워진 도교(道敎)의 한 석비에는 “칭기즈칸은 목동이나 마부와 똑같이 누더기 옷을 입었고, 군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을 형제처럼 대했다. 100번의 전투에서 늘 선두에 섰고 전 세계가 그의 통치에 복속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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