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풍경
나는 서쪽으로 난 거실창가에 붙어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앞산을 마주 바라보는 것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었나 보다.
남편은 아예 그쪽 창가에 아일랜드 식탁의자를 가져다 놓고 늘 창턱에 두 팔을 포개고 앉아 언제까지고 밖을 바라보군 하였었다.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마을길로 어떤 노인이 뒤짐 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반갑고 정원의 소나무가지와 잔디밭사이를 오르내리며 노니는 이름 모를 새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도 소일거리다.
앞산 중턱에 박혀있는 커다란 바위와 50년은 넘었음직한 아름드리 밤나무의 누런 별모양 꽃을 바라보는 것도 지루하지 않다.
가끔 불쑥 솟아오른 이 앞산의 꼭대기로 어떤 순간 햇빛에 반짝 날개를 보이며, 하얗고 기다란 띠로 파 아란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며 동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쳐다보군 한다.
정원너머 저쪽 산기슭으로 길게 펼쳐진 밭 쭉 아래로 사람 키를 훨씬 넘어서서 빼곡했던 옥수수들이 어느 날 알맹이는 모조리 따지고 뎅겅 베어진채로 밭이랑들에 줄느런히 누워 누렇게 말라가더니 몇 주 후부터는 옥수수뿌리 사이사이로 이쪽 밭에는 들깻잎, 저쪽 밭에는 콩잎들이, 또 어떤 밭에는 김장배춧잎들이 뾰족뾰족, 파릇파릇 새순을 내밀더니 어느새 다시 푸르른 밭으로 변모되었다.
여든은 훨씬 넘겼을 노부부가 항상 바깥노인은 다리를 절룩이며, 안노인은 90도로 굽은 허리로 약간 비탈진 꽤 넓은 밭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쟁기들을 다루며 농사짓는 모습을 보며 남편은 항상 존경스럽다고 얘기하기를 잊지 않곤 했었다.
농사의 순리와 농부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하다가, 또 노부부가 몸도 가누기가 힘든데 드실 만큼만 조그맣게 농사짓지 않고 저렇게 많이 수확해서 자식들에게 주려나 하며 추석날 그 집 밭 한쪽에 솟아있는 선조의 무덤 앞에 모여 성묘를 올리던 자손들의 숫자를 헤아리기도 했었다.
퉁퉁 퉁퉁 요란한 소리가 조용하던 온 마을을 발칵 뒤집듯 울리더니 역시나 저기 덧재 골짜기 어느 밭에 새벽같이 출근했던 노인이 조그만 태극기를 단 경운기를 몰고 마을길 떠들썩하며 퇴근하고 있다. 길에서 이 경운기를 가끔 마주치면 허리 굽혀 인사하곤 했는데 노인은 언제나 까맣고 깡마른 얼굴이 무표정이었다. 그래도 이 노인의 얼굴엔 강기가 흘렀다.
집 옆 하천 건너 덧재길을 따라 부지런히 1km 정도 경사진 길을 운동 겸 올라가곤 했다. 그 길 끝에 적벽산장이라고 간판이 붙은 집에 구순이 넘은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데 2~3년 전에는 산장 근처의 이름 모를 묘지 앞의 부드러운 잔디밭에 앉아 두런두런 할머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도 했었다.
병으로 앞세운 어느 아들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이 글썽해지기도 했고 아기를 업고 엿 보따리를 이고 오리 남짓 되는 면사무소 앞 장거리에 가서 광부들에게 팔고 오기도 했다고, 그땐 이 산길이 한두 사람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었다고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내 할머니를 생각했는데 산장의 할머니와 비슷한 얼굴로 떠올랐다.
근래에 산장에 올라가면 할머니는 누구? 하는 얼굴로 나를 맞이하곤 한다. 저기 회관 맞은 켠 어제 올라왔던 사람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듯 아하, 하는 표정을 짓지만 다음날 올라가면 또 누구? 하는 인상을 보인다. 가끔은 생각나는 듯 아저씬 왜 같이 안 왔냐고도 불쑥 물어본다.
그냥 웃음으로 답하며 할머니 두 손을 마주 잡고 흔드는 걸로 나라는 사람을 표해둔다.
다음날 올라와서도 두 손을 맞잡으면 생각나시라고.
저녁 퇴근길에 마을길에서 두 지팡이를 짚고 아주 천천히 걷기 운동하는 아저씨를 만나곤 한다. 저 멀리서 발견하고 내걸음으로 걸어도 아저씨를 추월할 수 있는데 지나치면서 인사말을 한다. 오늘은 꽤 멀리까지 오셨네요.라고. 그러면 멀리 온 것도 아니라고 퇴근하냐고, 쓸쓸히 웃으며 답한다. 일 년 전에 허리수술을 하고 재활 중이라고 이웃에게서 들었다.
서쪽 창가에 붙어서 내다보는 하천 건너 도로변 빨간 지붕을 한, 딸만 내리 여덟을 낳고 맨 마지막에 아들을 보았다고 해서 딸부잣집이라고 칭하는 옛날 집 앞마당에서 작년에 바깥노인을 보내고 홀로 된 안노인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어디로 출타하려는지 마을길로 나오고 있다. 자식 아홉을 낳아 길렀어도 원체 몸이 둥실한 안노인은 정정해 보인다.
그 옆 마을회관에 세 들어 사는 이씨네 부인이 구순가까이 되었을 친정아빠를 모시고 어디론가 갈 모양인지 차에 오른다. 집 옆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이 주인들을 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왈왈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린다.
평화롭기도 하고 단조롭기도 한 이 지극히 원초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나, 이 마을의 노인들은 이렇게 매일같이 부지런히 이 삶을 살아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이 삶이 끝나는 그곳은 저 너머 세상이 아니겠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 너머 세상에 도달하면 우리 모두 평안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2023년 8월 27일 창밖을 내다보며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