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도시
새벽 일찍부터 유난히 빗소리가 다정했다. 내리는 비에도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고인 감정을 씻어 내듯 쏟아지는 비, 소리 없이 부드럽게 소매 위로 내려앉는 비. 습기가 가득한 탓에 비 내리는 날은 외출할 때 애를 먹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비가 영 밉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건조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느낌에 비가 오는 날이 가끔은 맘에 들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누군가 내 마음을 진득하게 두드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 떨어진 꽃잎을 띄운 길 한구석의 물웅덩이처럼 마음이 차오르는 게 좋아서, 탁한 낯빛을 한 하늘 아래 나부끼는 물방울만은 투명한 게 예뻐서.
늦잠을 자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아파트 경비실 앞에 꽂혀 있는 자그맣고 반짝이는 바람개비에 웃음이 났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온통 무채색으로 찌푸린 세상에서 그렇게도 선명한 색을 한 작은 바람개비가 귀여워 그냥은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와 경비 아저씨와는 평소에도 친근한 사이다. 10년 동안 한 아파트에 산 탓에, 초등학생 때부터 어엿한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모습을 지켜 봐 주신 분이기에, 오며 가며 잊지 않고 인사를 나누고, 봉지 가득 빵을 사 올 때는 하나를 건네 드리곤 했던 사이. “아저씨, 혹시 이 바람개비 아저씨가 가져다 놓으셨어요?” 아저씨께 물었다. 그러자 그분은 웃으며 문을 열 때는 바람개비가 멈추고, 문을 닫으면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모습을 손수 보여주셨다. 그렇게 얼마간을 그분과 마주 보고 웃다 집으로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흐린 날에 마주하는 미소는 평소보다 화단의 해바라기만큼 더 아름다운 듯하다. 평소 같으면 16층에 멈춰 있는 승강기에 투정했을 테지만, 기다리는 내내 혼자 팔랑팔랑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눈에 들어와 입가에서 차오르는 실없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 분들이 저를 보았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만큼.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 나를 웃게 할 때,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게서 의미를 찾을 때 그때의 ‘시간’은 하루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순간’이 된다. 오늘은 문득 경비실 앞의 바람개비가 나의 특별한 존재, 뜻밖의 행운이 되었나 보다.
그 바람개비 한쪽의 노란 날개에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비에 젖은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비를 좋아하게 해 준 고마운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때 갖게 된 해바라기 모양을 한 우산이다. 우산 가득 해바라기 꽃을 한 그 우산 덕분에 비 오는 월요일의 등교가 행복했고, 그 우산 아래에서만은 회색 하루도 해사해지곤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늘 옆에 두었던 우산을 열아홉 살 여름에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우산 하나에 이토록 마음이 아파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슬퍼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어디로 갔는지 모를 해바라기 생각에 아직도 서글퍼질 정도로. 우산장을 열어 봐도 날 반겨주던 노란 빛깔의 장우산은 이제 없다. 그곳에 있었냐는 듯 곁을 떠난 그 우산을 이제는 비 오는 날만은 기억 속에서 꺼내 보곤 한다. 점잖지 못하게 울적한 그 느낌을 잊는다,라고 말하나 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유독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다. 그것이 추억이던, 제 곁의 사람이건 간에. 아까는 비 오는 날이 외롭지 않다고 했었는데, 참 외롭다가 외롭지 않기도 하다가, 잘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모두가 지나치는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도. 세상에서 행운은 자신이 찾기 나름이라는 말이 이런 순간인 걸까. 저 얇은 비닐 바람개비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그렇다 해도, 너무나 사소하지만 지금만은 나에게 와 준 분명한 행복. 빗방울처럼 소리도 없지만 분명 맘을 적시고 얼룩을 남기는 그런 존재. 누구나 그런 것, 하나쯤은 갖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