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튼, 시골 <빼앗긴 이름>

시골에서 자라고 살고있는 30대 여성 일기

by 김혜지

이름.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해 부르는 일정한 칭호.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 이소라 Track 9-


우리 부모님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부르기 위해 지어준 이름은 ‘혜지’다.
惠只. 은혜 혜에 오직 지.
오직 은혜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예수님을 거부하는(?) 아빠가 지어주셨다.
덕분에 홀리한 이름을 가지고, 정말 많은 것들을 은혜라고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쉽고, 괜히 튀지도 않는 내 이름이 좋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 이름을 나 말고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존재는 바로 우리 엄마.


경계를 무너뜨린 첫 번째는 아빠다.
내가 뭔가를 기억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엄마 아빠는 “혜지 엄마, 혜지 아빠”였다.
첫째딸이 너무 소중해서였을까? (내 좋을 대로 해석하기 히히)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자, 호칭은 더 경제성을 띠기 시작했다.
네 글자는 너무 길었던 걸까.
“혜지야~”
엄마를 그렇게 부르신다. 아이고야.


여기에 공유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동네 이모들.
아침마다 뒷집 이모가 “혜지야!!!” 하고 부른다.
다정한 듯, 조금 앙칼진 목소리로.
기원은 역시 “혜지 엄마”였겠지.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모두 우리 엄마를 ‘혜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름의 원래 기능—사람을 구별해 부르는 역할—그렇다고 못하는 건 아니다.
그분들은 엄마를 부를 때와 나를 부를 때의 목소리 톤과 분위기가 다르다.
나는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엄마와 목소리가 비슷한 나는 가끔 엄마 전화를 대신 받을 때도
아빠나 이모들이 “혜지야~”라고 부르면
그게 나인지, 엄마인지 정확하게 구분한다.
분명 내 이름을 불렀는데도
“엄마 화장실에 있어요.”
“엄마 출발했어요~”
그들이 궁금할 만한 용건을 바로 내놓는다.


아빠가 엄마를 부르는 “혜지야”는
누군가에게 조금 급하게, 하지만 다정한 톤으로 무언가를 묻고 싶을 때 나온다.
아주머니들의 “혜지야!”는 동네 친구 부르는 톤이다.
나에게는 살짝 예를 갖추신다.
같은 “혜지야!”인데도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어~ 혜지니?” 하고 더 상냥하게 답이 돌아온다.


가끔은 그 뉘앙스를 헷갈려서 내가 대답하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 그냥 말을 이어가실 때도 있다.
동네란 그런 곳이니까.


나는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도 이름 있는데, 내 이름으로 자꾸 불리는 거 기분 별로지 않아?”
엄마는 너무 담담하게 말한다.
“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리고 좋아. 괜찮아. 뭐 어때. 나 혜지 엄만데.”


그 말 들으면 진짜 눈물난다.

조건 없는 사랑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잘 살자, 혜지야.
엄마가 같이 나눠쓴 이 이름,
더럽히지 말고.

name-writing-with-black-letters-wooden-dices-with-old-book-around-high-quality-photo.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무튼, 시골 <팔랑이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