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에 대하여 [어제 뭐 먹었어?]
나를 위한 혐오를 인정하는 것
* 만화 원작 영화 《어제 뭐 먹었어?》 극장판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형태가 없다. 때문에 정답 또한 없다. 내가 어떤 성별을 가졌든, 내가 어떤 성별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든 그런 것은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될 수 없다.
미용사 켄지와 변호사 시로는 동거 중인 중년 게이 커플이다. 둘의 소소한 행복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 둘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이 맛있다거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그런 잔잔한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시로는 켄지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가 넌지시 건넨 폭탄과도 같은 이야기에 켄지는 깜짝 놀라면서도 무조건 가고 싶다고 대답한다. 교토에서 그들은 세간에서 말하는 '평범한 커플'처럼 데이트를 즐긴다. 문제는 시로가 평소와 너무 달라 켄지가 오히려 겁을 먹었다는 것 ···. 이게 이별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그는 문득 '시로가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연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시로는 "시로 씨, 죽어?"라는 켄지의 걱정 어린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여행의 목적을 밝힌다.
정월에 켄지와 함께 찾아뵈었던 부모님께서 아들의 남자친구를 보시고는 적잖이 충격받으신 탓에 다신 집에 켄지를 데리고 오지 말아 달라는 말씀을 전하신 것. 이것이 바로 시로가 '생일 선물'이라는 핑계에 포장해 뒀던 진실이었다. 켄지는 진심을 다해 사죄하는 시로에게 서운하다는 말 대신 시로가 아픈 게 아니라서, 또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그렇게 대화가 잘 끝난 것처럼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둘은 평소처럼 밥을 먹고, 실없는 농담에 웃었다. 하지만 분명 다른 때와는 달랐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만이 알기에 털어놓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관계에 있어 축복이자 재앙.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과는 굳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는 숨기지 않아야 한다.
나도 마냥 '좋음'을 연출하는 것이 관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실은 지금도 나만 입을 다물어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인연이라면 괴롭더라도 참으며 살고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은 결코 나 자신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가짜는 나를 병들게 하고, 내가 쇠약해지면 나는 결국 관계의 줄을 잡은 손에 힘을 줄 수 없게 된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관계에 대해 내가 먼저 지쳐 버린다면 그보다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이후 시로는 켄지에게 묻는다. "너 사실 상처받았지?"라고. 켄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사실은 화내고 싶었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렇지만 시로 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
켄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소중한 관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수백 번 고통받더라도 지키고 싶은 법이니까. 하지만 평생 숨길 수 있는 진심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상처받았어"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을 떠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을 믿어 주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불안할수록 더욱 솔직해지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보다 서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드물다.
영화 속에서 시로는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노숙자의 변호를 맡게 된다. 노숙자는 어차피 자신이 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며 더 이상 변호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시로는 "본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냐"라고 하지만 동료 변호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시로 또한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는 이 에피소드가 꼭 노숙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내가 사회에 느꼈던 반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깨달았다.
살 집이 있는 사람과 집이 없는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 ··· 세상에는 아주 많은 다수와 소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사람들의 편협한 시선을 받게 되는 쪽은 두말할 것 없이 소수자다. 그렇다면 그건 그들이 불합리한 현실을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가 되는가. 다수는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명예나 당연한 것 또한 아니다. 인간이란 종족은 자신의 편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어리석어진다. 사실 전부 개개인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건 지나치게 스스로를 의식한 나머지 세상에 자신과 다른 이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안일한 자기 중심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이 불러온 폐해다. 완벽히 타인을 위해 사는 인간은 없다. "동성애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동성 결혼을 반대한다"거나 "노숙자는 사회 전체의 더러운 부분"이라거나 "장애인은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 거나 ··· 말은 거창하다. 꼭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악을 처단하자는 영웅 같기도 하다. 하지만 더 솔직해지자. 사실은 단순히 '내가 싫으니까'라는 것이 이유 아닌가. 우리는 왜 타인이 나에게 주는 상처는 서럽다고 느끼면서 내가 타인에게 주는 상처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 치부하는 걸까.
이 세상에 차별을 당하고만 있어도 되는 존재는 없다. 소수자도 누군가를 미워할 줄 알고, 사랑을 하며 꼬여버린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한다. 켄지와 시로처럼.
그러니 결국 사랑은 같다. 누굴 사랑하든.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게 되고, 그 사람이 나와 함께 행복하길 바라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 앞에서 우리는 차별의 잣대를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어제 뭐 먹었어?》 원작을 보면 켄지와 시로를 두고 "호모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남자 무리가 나오는데 그들 또한 자신들이 이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켄지와 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인간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나와 다른 인간이 나를 볼 때는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가 아닌 타인의 인생에 너무 깊이 침범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전부 알아야만 한다. 나 자신에게 타인을 이룬 것을 부정할 권리 따위는 없다. 이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타인의 외모나 몸매를 평가하고, 개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나와 다른 것은 '이상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 시대의 진득한 혐오는 솔직히 말해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물들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두 마음이라는 형태의 틀을 하나씩 지녔다. 이 틀 안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부피와 향이 달라진다. 사랑을 채우면 행복이 따라오고, 염오를 채우면 증오가 따라온다. 행복과 증오의 무게는 다르다. 증오는 나를 가벼운 사람이 되게 하며 저 깊숙한 곳까지 갉아먹어 마침내 가죽만 남긴 채 볼품없이 만들어 버릴 것이다.
켄지와 시로, 두 사람을 보라.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밥 한 끼를 함께 하자. 인간에게 주어진 매일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이를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사랑하고 있을 사람에게도 상처 주지 않게 된다. 소중한 관계를 지키고자 애써 보자. 노력하다 보면 그것이 '나와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증오의 시작은 사심이다. 출발점이 같은 두 감정 중 어느 것이 결승선을 통과할지는 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