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회사에서 인사 업무만 20년 넘게 한 사람입니다. 올해 50대 후반으로, 4년 전에 퇴직을 하였습니다. 다녔던 직장은 국내 자산 총액 30위권 안의 회사였어요. 때문에 직원들끼리는 자부심이 상당했습니다.
저 역시 회사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가능한 한 오래 회사에 다니고 싶었지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어차피 미래가 없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오는 게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구상은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말하는 것에 흥미가 많았어요. 학창 시절 때도 팀 발표를 도맡아 했고, 회사에서도 프레젠테이션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막연하게 퇴직 후에는 말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더군요.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일단은 저의 말솜씨를 믿어볼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퇴직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이상과 현실은 달랐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을 밥벌이로 연결시키기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물론 말만으로 잘 먹고 잘 사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같이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들은 그 세계에 새로 진입하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회사 오래 다닌 것은 별로 소용이 없더라고요. 전체 임직원 회의에서 수없이 마이크를 잡아보고, 해마다 신입 사원을 뽑아봤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한참 고민했습니다. 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저만의 장점이 무엇인지요. 그 끝에 한 가지를 선택했는데, 그게 발표 학원이었습니다. 주된 커리큘럼은 직장인들에게 면접, 프레젠테이션 같은 말하기 스킬을 가르치거나, 자기소개서, PPT 자료 같은 문서 작성을 코칭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회사에서 많이 해왔던 일이라 가능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첫출발은 좋았습니다. 학원을 차리려면 교육청 가서 허가도 받아야 하고, 세무서 가서 사업자등록도 해야 하는데, 하는 내내 너무 신이 났어요. 오래간만에 일다운 일을 하려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남들은 퇴직 후에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처리하는 게 어렵다고 하던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노트에 메모해 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챙겼지요.
학원을 연 장소는 서울 시내 번화가였습니다. 학원은 학원가에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큰마음을 먹었었습니다. 임대료가 상당했습니다. 월 4백만 원 가까이 됐으니까요. 건물 맨 꼭대기 층을 얻었는데도 그랬습니다. 한 층 올라갈 때마다 금액이 팍팍 올라가는 바람에 건물 저층을 빌릴 수는 없었습니다. 임대차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데 손이 덜덜 떨리더군요. 그 잠시 잠깐 사이에도 망하면 안 된다는 다짐만 수 천 번은 한 거 같아요.
그로부터 두 달 후, 드디어 학원을 오픈했습니다. 개업 축하 세리머니도 제법 근사하게 했어요. 40평 남짓한 학원이 초대받은 손님들로 북적댔지요. 마치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남들 보기에 번듯한 명함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했습니다. 답례품으로 마련한 수건과 떡 세트 50개가 순식간에 동나는 걸 보니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제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그런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사업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사업을 처음 준비하는 시기이다.’ 슬프게도 저의 상황 역시 이 말에 점점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손님이 없었거든요. 매달 적자였습니다. 계산상 월에 천만 원 매출은 해야 직원들 월급 주고 각종 비용도 낼 수 있는데, 그 돈 벌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한 달에 많으면 8백만 원, 적으면 1백만 원, 평균 2,3백만 원 매출이 고작이었어요. 제 몫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단 한 푼도 학원에서 가져가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정말 피가 말랐습니다. 달이 바뀌어 딱 열흘 장사해 보면 그달 계산이 대충 나오거든요. 목표를 터무니없이 밑돈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지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온종일 가슴이 울렁댔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손해 볼 몇백만 원 생각만 자꾸 나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지요.
결국, 저는 학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영업을 개시한 지 꼭 1년 만이었어요. 큰 것부터 정리하고 끝으로 학원 물품들을 중고마켓에 내다 파는데,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솔직히 제가 마지막에 팔았던 물건의 상당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어요. 책상도 반짝반짝, 의자 다리도 튼튼, 돈도 돈이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몽땅 내다 팔아야 하는 현실이 마냥 서글펐습니다.
결론적으로 퇴직 후 창업을 통해서 제게 남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상표권이에요. 제가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학원 브랜드를 특허청에 등록했거든요. 혹시 잘되면 여기저기 이름을 도용하는 업체가 있을까 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짓을 한 것 같네요. 두 번째는 2억 원 가까운 손실입니다. 2억 원, 살면서 입에 올려 보지도 못했던 ‘2억’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네요. 몇 년 치 생활비를 1년 안에 날려버린 사람의 심정,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아마 모를 겁니다.
모든 분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2NDXet9CGfU?si=bdttEIqeGJYYXfk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