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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직업

제4화. 어느 대기업 퇴직 임원의 창업 폭망기

by 경아로운 생각


오후 5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향할 곳은 강남역 2번 출구, 가방 속에는 정성스레 만든 전단지 500장이 들어 있었다.

그 전단지 한 장 한 장에 사업 성공이라는 소망을 담았다. 문구부터 도안까지 모든 부분을 직접 다 손보았다. 모서리가 구겨질까 봐 인쇄물을 커다란 상자에 담고, 다시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 넣었다.

결심은 비장했지만 내 두 발에는 영 힘이 없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더 느려졌다.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리 빨리 달리는지, 실제로는 평소와 다름없겠지만 적어도 내겐 고속열차 속도 이상이었다. 강남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을 나서기 직전, 깊은 심호흡을 했다.


역 출구에 도착하자마자 무척이나 당황했다. 역 분위기는 내 예상과 달랐다. 자리가 좋아 보이는 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피트니스 센터, 어학원 등 온갖 업종의 홍보 아르바이트생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였다.


순간 회사 밖 경쟁은 상상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보물 한 장 나눠주는 일에도 자리다툼과 눈치 싸움이 극심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우리를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자신들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이 세계가 이리도 치열했단 말인가. 나와, 함께 온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겨우 자리를 잡고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내 목소리가 문제였다. 바이러스 때문에 착용한 마스크가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영 알아듣지 못했다. 마스크 안에서 발음이 뭉개져서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내리지도 못하겠고, 우물거리는 사이 사람들은 저만치 앞으로 가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늦가을 찬바람이 매서웠다. 사람들은 모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찌러 넣은 채 빠르게 걸어 다녔다. 앞서 다른 전단지를 받아본 탓인지 나를 보자 다들 멀찌감치 돌아가기도 했다. 어쩌다 가까이 마주쳐도 지레 손사래부터 쳤다. 30분 가까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내가 오가는 사람들 손에 쥐여 준 전단지는 고작 몇 장에 불과했다.


이러다가는 가져온 전단지를 고스란히 집에 들고 갈 판이었다. 전략을 바꿔야 했다. 지하철 출구 경쟁을 피해 역 주변 사무실을 다니기로 했다. 우편함에라도 꼽아 두면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볼 것 같았다. 버려지기 직전에 큼지막한 홍보 문구 한 줄 정도는 눈에 띄기를 기대했다.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은 깔끔한 신축 건물이었다. 로비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조명은 화려했다. 이 건물 입주민들이 딱 내 타겟 고객일 것 같았다. 하지만 입구에서 막혀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경비 아저씨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용무부터 물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편함에 홍보물을 넣고 싶다고 말하자 곧바로 나가라고 했다. 잡상인이 따로 없었다.


할 수 없이 관리인이 없는 건물을 골라 들어갔다. 출입은 자유로웠지만, 공실이 많아 보였다. 그나마도 얼마나 감사하던지. 바라던 순간이었지만 막상 우편함에 전단지를 넣으려니 손이 떨렸다. 누가 보지는 않을까? 또 쫓겨나는 건 아닐까? 때마침 정체불명의 벌레 하나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며 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남은 전단지를 황급히 끼워 놓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밤 9시가 되었다. 몸은 으슬으슬 추웠고 목은 쉬어가고 있었다.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직도 가방 안에는 300장이 훌쩍 넘는 인쇄물이 남아 있었다. 열심히 돌린다고 했는데 결과는 미미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배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들고 나올 때와 별반 다름없는 가방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한때는 번듯한 직장인이었던 내가 퇴직 후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신세가 될 줄이야. 그나마도 제대로 주지 못해 풀이 죽어 있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씁쓸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가끔은 4호선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역 앞에서 전단지를 돌렸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이미 온라인 시대이건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행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회사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전단지 보고 연락드려요." 결국 해냈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고객과의 만남은 또 다른 고행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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