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서늘함에 대하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주는 시들을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아까운 책장 한 장 한 장이 아쉬워 식구들 몰래 방으로 들어갔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한 구절 한 구절을 낭독했다. 시를 읽는 내 목소리도 꽤나 들어줄만했다.
일상의 비의가 서늘하게 남아있는 글들을 보고 있노라니, 멀리서 안도감이 몰려왔다. 작가의 불안함, 고독함, 혼란스러움, 자괴감, 비소들이 한데 모여 날 고치처럼 둘러쌓았다. 그 속에서 나는 평안했다.
또 읽고 또 읽었다. 검게 빛나는 문장들이 온전한 내 것이 되기엔 아직 먼 것 같다.
버릴 것 없는 은유와 비유에 감탄한다. 삶의 그늘을 이렇게 온전히, 이렇게 차분하게 읊을 수 있는 자는 몇이나 될까 손을 꼽아본다.
김소연 님의 시집을 함께 읽고 나눌 이가 있다면 덜 고독했을까
이런 시가
자신의 피부 밑에서 흐르고 있는 한가닥의 정맥 같다고 공감해 줄, 네가 그리운 날.
#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 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 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 편향나무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 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용기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고쳐 말하고 만 싶었고
작년의 감이 매달려 있는 사월의 감나무를
빨랫줄을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들을
등에 난 흉터를
아까 본 그 사람을
거북이처럼 걷던 그 사람을
거북이는 등이 있어서 다행이고
같은 맥락에서
거북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고
배낭을 메고 내가 나를 거듭 떠났다
나를 배웅하기 위하여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버리고 돌아와 얌전하게
생활을 거머쥐는 나에게로 벚꽃잎들이 달라붙을 때
얇이 라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
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 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 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 울어보앗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 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 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 집을 만들고 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년년 살고 싶다면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 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 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 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 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 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 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노는 동안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은 죄를 겨우 알 것 같은 나날이었지만
내 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날이기도 했다.
앤서니 퀸이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았다
그 여자, 착한데 나쁘지?
응.
그래서 좋아.
심술궂은 비바람이
다 떨어뜨려서 밟으면 걸어갔다
샛노란 나뭇잎들을
잎은 뚫는 성질을 가졌다
봄에 대한 잎의 입장은 그런 식으로 증명되었고
마룻바닥은 무릎을 받아주는 성질을 가졌다 기도에 대한
걸레질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다
십일월에도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를 내가 지나치고 있다
# 스웨터의 나날
무사하지 않다는 것으로 간신히 무사하다고 소식 전합니다 오늘은 막힌 변기와 친하게 지냈고 마침내 양변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싸준 묵은지 한 포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으며 밥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무사하지 않은지는 오래되었지만 이것이 무사하다는 전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부엌 쪽 창에 얼비치는 내 그림자를 보면 자꾸 엄마하고 부르고 싶어 집니다 음악가에게 망원경을 주면 우주의 비밀에 대하여 작곡할 수밖에 없다는데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쥘 게 없는 손으로 주먹을 쥐는 나날입니다 도저히 악의적일 수가 없는 호칭을 등에 업고 늦은 밤에 양말을 갭니다 양말에게 짝을 찾아주는 일 정도가 가장 어울리는 나에게도 스웨터에 오래 매달리다 보면 동그란 보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 우리 바깥의 우리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옆자리는 비어있고
뒤에 서서 동그랗고 까만 팔꿈치를 쳐다보면서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등뒤에서 험담이 들려올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 좀 봐
-말하지 못하는 것 좀 봐
단 하나의 사건에서 모두의 죄들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순간이 온다
-이제 전부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우리는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주: 이것은 바라보는 걸 뜻하지 않았다
언제 단념하게 될지 지켜보는 걸 뜻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말하는 자의
두려움을 보고 있다
분명히 맨 뒤에 서 있었는데
자꾸 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