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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민석 Jan 07. 2024

우연히 완성된 하루

2023년 11월 22일의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작가와의 대화

2023년 11월 22일 수요일.


원래는 오늘 회사에 제출할 사원증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제 자기 전에 확인해 보니까 사진관이 100% 예약제 운영이었다. 사진관 방문 계획이었다면서 검색도 안 해본 나란 사람.. 그렇게 나의 계획이 변경됐다. 역시 나는 J보다는 P가 어울린다. 나는 오늘부터 다시 ENFP다. 


그래서 오늘은 미루고 미루고 미루던 채용검진을 하게 됐다. 8시간 금식하고 오라 해서 아침에 물도 못 마시고 서울로 출발했다.. 채용검진 오래 걸린다는 얘기가 많았는데, 나는 30분도 안 걸린 거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검사는 채혈검사로 피 뽑을 때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후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웃겼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기억. 고등학교 2학년일 때 학교에 헌혈차가 방문해서 지원자들만 헌혈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랑 같이 헌혈을 하러 갔었는데, 살면서 헌혈에 처음 도전하는 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바늘이 내 팔의 혈관을 뚫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내 모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간호사 : 주먹 꽉 지세요~ 중간에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말씀하세요.

고2 길민석 : 네...

간호사 : 자 따끔합니다!

고2 길민석 : 꺅!! 잠시만요!  저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요.. 피 한방에 너무 많이 나온 거 아니에요??!

간호사 : 아직 바늘 안 들어갔는데.... 피 한 방울도 안 나왔어요...

옆에 누워있던 담임 선생님 : 길민석 쫄보네 ㅋ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었는데,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고통을 미리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었나 보다. 근데 진짜 아직도 억울한 게, 정말로 피가 한방에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어지러웠단 말이지... 그때 간호사분이 거짓말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의심 중이다.


그래도 이제는 나이가 많아졌으니 바늘 따위 무섭지 않았다. 바늘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통합설계 도면작성과 졸업논문 쓰기가 더 무서웠다. 그렇게 모든 채용검진을 마무리하고 너무 배고파서 바로 앞에 있던 돈까스를 먹으러 갔다. 뽑힌 피를 보충해 주기 위해 돈까스랑 냉모밀에 밥까지 추가해서 먹어줬다. 근데 자꾸 밥을 먹는데 이상하게도 피를 뽑은 팔보다 다리가 아팠다. 다리가 왜 아프지...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까 어제 4시간 동안 보드를 탔는데 다리가 안 아프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항상 보드 탈 때는 아드레날린이 나와서 그런가? 힘든 줄 모르고 계속 타다가, 꼭 다음날이면 슬슬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도 역시 보드는 재밌다..


그렇게 밥까지 다 먹어주고 바로 옆에 있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어가서 문구 쇼핑을 즐겨줬다. 이번 쇼핑 타깃은 프라이탁 노트 커버에 들어갈 속지와 동일한 사이즈의 노트였다. 일단 동일한 사이즈의 노트에 기록을 해보고 필기감을 확인해 보는 목적이었다. 평소에 옷을 살 때는 정말 빠르게 사는 게 목적이라고 보일 만큼 큰 고민 없이 후딱 사버렸는데, 이 노트가 뭐라고 한 시간을 문구 코너에서 노트끼리 비교하고 고민했다. 심지어 이번에 정장을 사러 갔을 때도 처음 들어간 매장에서 딱 한 벌 입어보고 바로 사버렸었는데.. 갑자기 정장한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프라이탁 노트 커버에 들어가는 속지 사이즈는 150*95 였기에, 제약이 생각보다 많았다. 줄노트보다는 무지노트여야 하고, 이미 노트에 커버가 함께 달려있는 노트는 후보군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똑같은 노트를 들었다 놨다. 두께감이 이 정도면 되려나... 종이 두께는 어쩌구... 뭔가를 이렇게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고민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 내가 꽤나 노트에 진심이라는 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고민했는데 결국 노트는 사지 못했다... 그 넓은 문구 코너에서도 마음에 드는 노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2024년을 위한 다이어리들도 엄청 많았는데, 나와 함께할 노트는 만나지 못했다.. 대신 다이어리 코너에 한 시간을 서있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대화들이 재밌어서 한 시간을 서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 노트에 기록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노트를 사러 왔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내 생각과 흔적이 남들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남겨지는 게 너무 싫어서 다이어리를 절대 안 쓴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노트에 뭔가를 쓰기 위해 구매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책상을 꾸며주는 인테리어의 용도로 노트를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대화들이 들릴 때마다 혼자 속으로 피식피식 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이다라는 말에 완벽하게 동의하게 됐다. 


노트를 계속 고민하면서 프라이탁 노트 커버도 계속 찾아봤는데 프라이탁 홈페이지에서 사면 6만원대에 살 수 있다..!! 네이버 쇼핑에서는 12만원 이었는데.. 왜 가격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서 프라이탁에 빠져있는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프라이탁 브랜드 특성상 제품의 색감, 오염 정도, 텍스처 등이 전부 디자인마다 다른데 이걸 이용해서 대중적으로 많이 선호되는 디자인은 비싼 가격에 판매된다고 알려줬다. (아마도 리셀처럼 취급되는 듯) 그래서 나는 온라인 주문 말고 프라이탁 매장에 직접 가서 노트 커버를 사기로 결정했다. 꼭 사고 싶기는 한데.. 언제 살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번 글의 본론은 여기서부터인데, 교보문고 쇼핑을 (아무것도 산 게 없지만) 마치고 서울시청 쪽으로 걸어가다가 서울도시건축전시관으로 빨려가듯 들어가게 됐다. <서쪽 서식지> 전시가 진행 중이었고, 그 밖에도 <시간을 통한 인연> <건축과 환경적 실험> 전시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도시건축전시관답게 익숙한 얀겔 책도 보였다.

위에 사진은 프로젝트명이랑 방위표가 거슬려서 찍어봤다. 어떤 의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전시인데 너무 대충 던져 놓은 거 아닌가 싶었다...  학교에서 마감할 때도 저렇게 올려뒀다가는 교수님한테 잔소리 폭탄 맞을 거 같은데.. 내가 좀 깐깐해진 건가.. ㅎ



아무튼 그렇게 서쪽 서식지 전시를 보러 계단을 내려갔는데, 딱 그 시간에 작가와의 대화 세미나를 진행한다고 해서 이름이랑 전화번호 적고 현장에서 참여 신청하고 들어갔다. 세미나 시간은 무려 2시간 30분...! 결론부터 말하면 지루할 줄 알았으나 엄청 흥미진진하게 몰입해서 들었다. 로버트 자오 런휘 라는 일본의 아티스트가 20년 동안 자연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김해주 작가도 함께 있었다. 두 작가 모두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작가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작가보다는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포장해 본다.) 작품은 너무 익숙한 작품들이었다. 2020년 부산 비엔날레, 2022년 부산 비엔날레 두 작품.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전시들의 작가를 이렇게 우연히 지나가다 들어온 세미나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부산에서 봤던 작품의 작가를 서울에서 보다니..!!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걸 발견했는데, 나는 정말 사진을 안 찍는다. 어떻게 세미나에 관련된 사진이 하나도 없지. 너무 몰입했었나...



세미나 내용을 정리하면.  [ 도시가 가져오는 자연의 위기 ] 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다. 최근 싱가포르 도시 한복판에 등장하는 수천, 수만 마리의 철새, 박쥐, 앵무새들을 영상으로 기록한 작업을 위주로 세미나가 진행됐는데, 건축과 도시를 배우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세미나였다. 그저 자연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현상들이 그 원인을 찾아보면 결국 건축과 도시가 원인을 제공했을지 모른다는 주장. 주장이라는 것은 작가가 강조하는 포인트였는데 자연현상의 원인을 100% 확신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시설계를 진행하다 보면 수만, 수십만 제곱미터의 땅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지도 위에 영역을 표시하고 재개발, 재건축 혹은 녹지 위에 신축 턱턱 쉽게 쉽게 디자인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번 세미나에서는 건축가가 지도에 표시한 영역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거나 그의 영향으로 앞으로 발생할 일들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건축집단의 도시건축이라는 디자인 행위를 위해 뭐가 파괴되고 있는지를 수천, 수만 마리의 동물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갯벌, 숲, 강 등이 파괴되는 현상들은 그저 자연 자체의 파괴일 뿐 아니라 수많은 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는 현상이다. 도시 건설로 인해 서식지가 파괴된 동물들은 갈 곳을 잃고 결국 인간의 영역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의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연이 도시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에는 최근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곳으로 수만 마리의 철새, 박쥐, 앵무새가 도시로 모여들고 있다.  새들의 배설물은 나무를 죽이고, 소음들로 주민들의 불편이 늘어나고, 대형 쇼핑몰에 새들이 모여서 경제적 피해를 준다. 이러한 문제를 동물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그린벨트를 해제하면서 아파트를 짓는다는 소식들과, 간척 사업 소식이 꾸준히 들리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현상이 앞으로 도시에 어떤 영향으로 되돌아올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서울의 하늘에서도 수만 마리의 철새와, 박지와 동물을 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이건 인간과 동물의 자연친화적인 모습이야!! 라거나, 도시와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현상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을 거 같다. 건축가들은 건축을 하면서 직업적이라는 이유로 뭔가를 파괴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본인이 뭘 파괴하게 되는지를 알고 있는가는 분명 중요하게 작용할 거다. 내가 뭘 파괴하게 되는지 알고 있어야 그 이후를 예상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어야 파괴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을 거다. 뭘 파괴하는지 모르기에 그 이후를 예상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니 파괴의 기준 없이 꾸준하게 파괴하는 거 아닐까.



우연히 완성된 하루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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