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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Nov 08. 2023

그립다

양철도시락, 그 속에 노란 계이 덮인 하얀 쌀밥

포크가 달린 숟가락.

환경호르몬 가득했을 것 같은 노란 유치원 가방의 이상하게 달콤한 냄새.

착한 행동 했을 때 수첩에 붙여주었던 작은 빨간색 하트 모양 스티커.

호랑이 그림이 너무 무서워서 혼자 읽기 겁났던 전례동화책.

흑백 TV가 처음 집에 왔을 때의 그 낯섦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화면 속 지지찍거리던 잡음 가득한 화면.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로 시작하는 처음 들었던 KBS로고송.

손으로 돌려야만 보고 싶은 채널을 볼 수 있던 로터리방식의 TV.

신데렐라 노래와 함께 하던 검정고무줄 뛰기.

꼭 그 고무줄을 끊던 말썽꾸러기 애들.

늘 승리하던, 서부소년 차돌이, 로봇태권 V, 마루치 아라치, 그랜다이져, 마징가 Z, 짱가, 아톰, 독수리 오형제.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았던 캔디, 끝도 없이 달리던 은하철도 999, 철이와 메텔.

저녁 5시 30분쯤에 하던 TV속 화면조정시간의 그 기하학적인 문양과 헬기로 논에 농약 뿌리던 화면과 함께 나오던 애국가.

그리고 국기하강식에 멈춰 서서 가슴에 손 올리고 경례하며 한참을 서 있던 모습.

한글보다 한자가 더 가득했던 종이 신문.

전화번호를 손가락 넣어 한참을 돌려서 걸어야 했던 그 하얀 전화기.

아버지성함과 우리 집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던 두꺼웠던 전화번호부 책.

비싼 DDD시외전화비 대신 우체국에 직접 가 줄 서 신청해서 걸었던 아버지의 시외전화 모습.

듣고 싶은 노래도 몇 번을 돌려 겨우 찾아야만 들을 수 있던 카세트테이프.
늘 먼지 묻어 찌직거리던 LP판.

2장으로 버스를 3번도 탈 수 있는 마법의 버스회수권과 엽전 같이 중간이 뚫린 버스토큰.

1학년 이름표 밑에 받치고 있던 콧물 닦는 하얀 손수건.

불조심 강조기간만 되면, 빨간 사인펜으로 불조심이라고 쓴 명찰 밑에 붙이던 그 끝이 갈라진 기다란 흰 천조각.

200칸이나 되어서 글 배우고 쓸 것도 없는데, 5장이나 써야 했던 200자 원고지 글짓기.

참 밋밋했던 우체국 관제엽서.

비 오기 전 흐린 날 아주 아주 낮게 날아오르던 여름날의 제비.

쓰다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던 타 딱 거리던 소리가 시끄럽고 정겨웠던 타자기.

하루 하나씩만 먹어야 하는데 처음 맛보는 그 맛에 하루에 왕창 먹고 소변색에 놀랐던 그 귀한 미제 어린이비타민.

곪아 퉁퉁 부어 잠도 못 잘 정도 아팠던 종기, 그 시절엔 항생제보다 더 효과 좋았었던 그 시커먼 고약.

철커덕 꺾어 달리기 시작하던 택시미터기.

빈병은 늘 달콤함과 연결된다는 걸 증명해 준 엿장수 아저씨.

처음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뭔지도 모르고 먹었던 번데기.

빨대를 힘껏 질려 먹어야 했던 두꺼운 정사면체 비닐의 빙그레 우유.

병뚜껑 열 때 뻥소리가 좋았던 서울우유.

버스 안에 화장실도 있다며, 늘 타보고만 싶었던, 끝내 못 타본 서울 가는 멋진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

지구보다 더 영롱한 모습으로, 수학은 물론, 투자의 개념도 가르쳤던 유리구슬.

세상의 모든 종이들은 사각형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았던 접는 종이딱지들, 더 진화한 둥근 종이 딱지들.

한겨울에도 따뜻했던 보온 도시락 속 밥과 국.

글쓰기 실습에 가지고 온 펜촉과 늘 한 명씩은 쏟아 엎질러 버려 난감했던 검은 잉크병과 그 속의 잉크.

12색 기본 크레용과 엄청 많은 색깔 크레용이 있던 왕자표 크레파스.

바닷가 해수욕장의 그 검은 튜브.

한여름 좁고 깊은 얼음통 안의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케끼.

어느새 배우지도 않은 한글을 다 알게 해 준 흑백 만화책들.

책 보다 부록으로 주는 신기한 장난감이 더 혹했던 월간지 소년중앙.

지금은 고급카페에서만 보이는, 그 당시 연탄불, 국자에 설탕과 소다로 언제나 달콤했던 달고나.
어묵 한 개 사 먹고, 환경호르몬 넘쳐났던 빨간 플라스틱 컵으로 끝도 없이 퍼먹었던 속까지 따뜻하게 만든 어묵국물.

가끔씩 밥 주는 걸 잊으면 멈춰버리던 작은 손목시계.

느리더라도 세상 모든 역들을 다 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태워야만 갈 수 있는 비둘기호 기차.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재미있었던 5시 30분 애국가 다음으로 했던 인형극.

새하얀 연기가 구름보다 더 신기해 신나게 따라다녔던 소독차.


지나간 것들이, 사라진 것들이 가끔씩은 그립다.


대학 합격 했다고 주시던 비싼 소고기 집에서의 그 소고기 맛도,

그리고 아버지의 그 흐뭇한 미소도.  


그래 다 그립다.


가을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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