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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Feb 26. 2024

울산 내원암에서

준비(準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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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났다는 건 그에게 주어진 어떤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어떤 이라도 그에게 주어진 일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물론 그 주어진 일들을 우리 사람의 잣대로 귀한 일 또는 천한 일,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 편안 일 등으로 나누고 가치를 매기면서 우리 스스로 계급이나 계층을 나누어버린다.

더하여 그 가치판단의 잣대에서 어쩜 가장 중요한 건 돈이 되어 버린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일을 하고 난 후의 수입창출은 누가 무어라 해도 중요한 과정이 맞다.

그리고 일에 합당한 돈은 그 일 혹은 직업에 대한 만족감으로 돌아오는 것도 당연한 이치 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으로 수입 창출이 크다하여 그 일을 선택했을 경우, 물론 본인의 적성에 부합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불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평일 오전, 잠시 지금까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다음 일을 기다리는 짧지 않은 휴식기간이 주어지니, 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봄바람이라 하기에는 아직 제법 차가운 기운이 많이 아 있는 이른 아침 좁고 높은 산길을 오른다.

내원암 가는 길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잠시 살짝 물러서니 크고 또 어렵게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흩어져 잊혀버린다.

하여, 그 어지러운 세상사들이 그 자체가 어지러운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어지럽게 스스로 느끼며 괴로워했다는 게 아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살짝 물러난 것뿐인데도 맑아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이 휴식이 다시 나를 제대로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시간으로 써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좁고 높은 길들이지만 앞에서 내려오는 차를 양보해 주고 잠시 기다리니, 연신 고맙다는 듯 노란 불빛을 깜박이며 내려다.

내원암 가는 길

운전하는 이의 모습은 짙은 선팅에 가려져있지만, 작은 웃음이 보이기라도 한 듯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내게 전해오히려 더 고마워진다.

기다린고 또 비켜준다고 조금 불편했는데, 그 잠시동안의 작은 배려가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얻은 느낌으로 저 차에 타고 있는 이들과 이 차에 타고 있는 내가 많이도 행복해지고 고마워지니 참 좋다.

이런 보시(布施)들은 너무도 빠른 가피(加被)로 화답하시는 걸 보면 작은 배려인데 그 크기는 작지 않은 공덕(功德) 임에 틀림이 없다.

불교라는 게 어렵게만 느낄 뿐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 수도 있음이 다행스럽긴 하다만....


산아래에서 많은 생각들이 몰려와 피하듯 달려왔지만, 작은 배려에도 크게 얻을 수 있는 곳에 이제 다달으니 여기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좋다.


대운산 내원암(大雲山 內院庵)

여기는 큰 구름이 높고 멋스러운 울산 대운산 내원암( )이다.


울산 대운산 제법 깊은 곳에 신라시대 고봉(高峰) 선사라는 스님께서  ‘영남 제일의 명당’이라고 극찬한 곳에 여기 내원암자리한다.


렇게 기분 좋 아주 좁은 산길을 운전해 도착하니, 예사롭지 않은 나무 한그루가 먼저 맞이해 준다.

산사 앞 팽나무

500년 된 팽나무다.


코끼리도 보인다고 하는데, 진짜 보인다.

나무에서 낯선 먼 타국의 코끼리를 발견한 이의 여유로운 마음이 부럽다.

나무도 이렇게 멋지게 서 있고,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여기가 명당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평일 오전, 사람이 드문 산사에는 고요가 한가득이다.

대운산 내원암(大雲山 內院庵)

그래도 무겁지 않은 고요는 부담스럽지 않고, 차분해서 좋다.

그래 이런 고요는 휴식이다.

절밖의 찬 바람도 일주문을 통과하니 따사로운 햇빛에 그 뜻을 잊고, 역시 차분히 숨죽이며 물러난다.


여래께 인사드리고, 햇살 좋은 대웅전 낮은 돌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니, 높은구름 아래로 매화들이 희고 또 붉게 한창 봄을 준비 중이다.

그 사이 동백꽃도 숨죽이는 긴장감으로 붉은 꽃잎들을 준비하고 있다.

동백꽃과 매화

아직 바람이 차기만 한데, 작은 햇살을 받으면서 말이다.

찬 바람이 햇살에 녹아 새로운 계절이 오면, 이런저런 복잡한 세상사들도 다 흩어질 거니 그만 잊힐 것들은 잊고, 새 계절을 준비하라는 듯하다.


잊힐 것들은 잊어야 하는 게 맞다.

새 계절의 색깔이 이들에겐 너무도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꽃피는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이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었다.


한참을 앉아 매화들이 일러주는 힘 있는 미소들을 들으며 하늘을 보니, 큰 구름들이 높이 떠 올라 햇살을 잠시 가리고 있다.

그래도 그 여린 매화꽃잎들은 여전히 소리 없이 조금씩 제 깊은 뜻들을 이루고 있다, 동백꽃잎처럼 말이다.

500년 세월 동안 팽나무가 그렇게 여기 산사 앞에서 서 있는 그 뜻 그대로 말이다.


잠시 머문 시간 속에서 조용히 제 뜻을 알고 기다리며 준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매화, 동백, 바람, 햇살, 구름, 하늘, 낮게 나는 새들, 아직 색이 바랜 절마당 잔디, 그리고 나..

한참을 앉아 그 하나하나의 제 뜻들을 생각해 본다.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고요함이 도와주니, 편안한 시간이 되어 좋다.


바람이 잘게 흩어지고, 햇살이 조금 더 짙어 때쯤 고요함에 물든 산사를 뒤로 하고 물러나온다.


내려오는 그 좁은 길에서도 서로 기다려 양보하다 보니, 그 깊고 또 좁은 길도 높고 험 길도 이제는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길이 되다행이다.

아무도 먼저 가려는 이가 없다.

모두 멈춰 먼저 지나가라며 계속 고마운 손인사만 바쁘다.

연신 노란 깜빡이 두 개가 빠쁘게 깜박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이길도 이제 좁고 험한 길이 아니고 서로를 위한 배려의 미소가 가득한 길이 되어 버렸다.


내려와 뒤돌아보니, 대운산 꼭대기보다 더 위에 구름이 참 많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동백꽃과 매화는 더 예뻐질 거고, 찬 바람도 햇살에 녹아 더 흩어질게 틀림없다.


절마당 잔디가 푸르러지면 그때 또 올라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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